“I’m not fully known to myself. 'cause part of what I’m is the enigmatic traces of others”(Judith Butler)
1. ‘그 복사기’의 이름은, R-2025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R-2025는, 다수의 똑같은 모양과 성능으로 생산 된 제품의 모델명 이다. 침팬지를 사랑하여, 차마, 침팬지에게 실험체 번호를 붙일 수 없었다던 어느 동물행동학 박사처럼, 그만의 이름으로 불러주지는 않았지만, 그 ‘복사기’를 만지고 다루며, 문제가 생길 때 마다 속까지 열어 보았던 관계인지라, ‘복사기’라 명명 되던 그 사물은, 여타의 복사기와는 사뭇, ‘의미’가 달랐다.
2. ‘그 사물’이 옆에 있음으로, 가능해 지는 미래가 있었다. 이런 비유가 적정한지는 모르겠으나, 그 자리에 그가 있음으로, 알게 되는 미래. 인간의 손길과 눈길이 미치는 개입의 윤리가 시간의 온통을 아울러 삶을, (재)구성하지만, 그 되어져 감의 여정에 인간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자기 옆의 한 존재가 사라짐으로 알게 되는, 잃어버린 것들의 흔적만큼이나 자명하다. 지척의 이웃이 함께 만들어 가는 자기自己가 있다.
(물론 대개의 경우, 인간이 가장 큰 영향을 주겠지만)
3. 자연 상태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와, 복잡하게 가공되어, 쓰임에 한정限定이 생긴 사물이 돌아가게 될 곳은 어디일까. 또, 그와 관계 맺었던 탓으로 생긴 책임의 윤리가 작동될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 일까. 맺어진 관계에서, 눈 돌리고, 등 돌리면서 생기는 탁함은, 왜 가라앉아 다시 맑아지지 않는 것일까. 삶의 장면 장면이 분절되어, 마침내, 삶에서 죽음까지 삭제 시킬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내는 이별은, 왜 아름답지 못할까.
4. 얼마 전 흙에 묻어준 고양이가 다시 무엇인가로 돌아가고 있듯, 사람의 손길과 눈길이 마지막까지 배웅 한 헤어짐에는, 여기 남은 것도 없고, 거기에 묻혀 따라가는 것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더불어 맺힌 것 없이 맑아질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