訓民正音, 혹은 세종의 고독
1. 한글의 특징을 거론하는 학자들이 ‘받침’(종성자음終聲子音)의 사실에 더 유의하지 않는 게 몹시 유감이다. 내가 경험한 한국어(한글)는 무엇보다도 ‘받침이 많은 말’이다. 그간 배우고 익힌 외국어들(영어, 독일어, 불어, 중국어, 일본어, 라틴어, 스페인어, 그리스어, 베트남어 등)과 비교해 보더라도 한글은 받침이 동뜨게 다잡(多雜)한데, 더구나 소리의 층위에서는 변별조차 어려운 형태론적 구별을 종성에서 고집하는 것은 한글이 유일해 보인다.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 후서>를 집필한 정인지(鄭麟趾)에 따르면, “바람 소리, 학의 울음소리, 닭의 울음소리, 개가 짖는 소리(風聲鶴唳鷄鳴狗吠)”까지 나타낼 수 있는 게 훈민정음이라고 하는데, 실로 의성어, 의태어, 그리고 고유명사 가차음(假借音)의 경우에 한글의 위상과 기능은 독보적이다. 물론 이 장점은 복모음이 발전한 데다가 전술한 것처럼 받침소리가 풍부하고 정확한 것에 기대고 있다. 가령 Sam의 발음은 [sǽm]인데, 한글로 ‘쌤’이라고 옮기면 거의 그 음가가 일치하지만, 일본어로는 サム(사무)이며, 중국어로는 萨姆(sàmǔ)(싸~무우)가 되고 만다.
2. “正音, まさに正しき音, 世宗は音を正さえんとする.”
(野間秀樹, <ハングルの誕生>, 2021, p. 242.)
(“정음. 정녕 올바른 소리. 세종은 소리를 바르게 하고자 한다.”)
흔한 오해의 흔단(釁端)이지만, 세종이 창제하신 훈민정음은 ‘바른 소리(正音)’이지 바른 글자(正字)가 아니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訓民正音)’, 라고 명료하게 밝혀 놓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훈민정음/한글이 문자(文字)가 아닌 게 아니다. 엄연한 글자이며, 제자(制字)의 원리나 그 기능에서 독보적이랄만한 구석이 있다. 어리석은 백성을 연민하여 그 뜻한 바를 글로 옮기지 못하는 사정을 긍휼히 여긴 취지가 <해례본>의 서문에 분명하므로, 당시의 조선어 소리를 (표준적으로) 형태화한 글자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훈민정음이 일종의 발음기호적 속성을 지닌 형태적 부호일 뿐이며 ‘바른 글’이 아닌 데에는 이미 바른 글(漢文)의 존재가 엄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른 소리(正音)’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고 있던 것일까?
세종의 관심은 애초부터 이 바른 글의 음(音)이 문란해진 사정에 깊이 간여하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통용되던 한자(漢字)의 음가는 (복잡한 일본식 한자음과 달리) 당나라(619~907) 장안(長安)의 발음에 기초했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발음을 획정할 기호도 없었을 뿐 아니라 교통과 소통의 사정이 열악했을 15세기의 경우 그 음가가 어지러웠을 것은 당연하다. 이는 20세기 초엽의 제주도 방언과 함경도 방언의 차이만 생각하더라도 충분히 상상가능한 사실이다. 세종의 관심이 이 한자음의 음가를 통일하려는 데 있었다는 것은 재론할 필요조차 없다. 비록 한자음의 표준화라는 과업이 실제 큰 성과를 걷진 못했지만, <동국정운(東國正韻)>(1448)은 이러한 세종의 관심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응당 이 ‘바른소리(正音)’란 당시 이미 문란해져 있던 한자음의 음가를 표준화한다는 뜻만은 아니었다. 이미 문자(한문)를 사용하고 있던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한문음의 표준화가 시급한 당대의 숙제였지만, 한문이 (제대로) 통용되지 못하던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는 그들이 일용(日用)하던 입말의 음가를 표준화하는 게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므로 세종의 애민사상과 그의 천재가 결합해서 생성된 훈민정음은 바른소리(正音)의 사업이었고, 이는 두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는데, 위로는 한자음을 표준화(정음화)하는 것이며 아래로는 백성들의 입말을 표준화(정음화)하는 것이었다. ‘바른소리’의 뜻이란 바로 이것, 즉 한자음과 입말의 표준화를 가리킨다. 당대의 사정을 정확히 느낄 수 없고, 역사를 늘 거슬러 이해하는 탓에 우리는 ‘정음’을 곧장 한글과 등치시키곤 한다. 그러나 정음이 오늘날의 한글이 된 것은 역사적, 진화론적 우연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훈민정음이라는 표준화의 제도가 펼친 양날개(사대부의 한문과 백성의 입말) 중에, 우리는, 우리가 이미 속해 있는 한글시대의 자손으로서 후자(백성의 입말)에 관심을 집중할 수밖에 없지만, 누군들, 그 세종의 그 고독한 영감 속에 번득였을 자의식을 알겠는가?
3. 세종에 의해 창제된 훈민정음이 공식 문서 등에서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은 연산군 치세(1494~1506)까지의 약 반세기였다. 그후 언문(諺文)이라는 이름으로 민간에 낮게 파고든 게 거의 400년, 마침내 그 훈민정음이 공식적으로 다시 기지개를 키게 된 것은 갑오경장(甲午更張, 1894)을 통해서였다. 우리의 논의와 관련해서 중요한 사실은, 훈민정음-한글의 운명은 결국 중화(주의)-한문근본주의와 길항하는 중에 구성된다는 데 있다. 훈민정음ㆍ한글의 운명이 바뀌는 갑오개혁의 때는 곧 청일전쟁(1894)의 시기와 겹친다. (비유하자면, 일본어와 한문이 우리 땅에서 싸우는 게 바로 청일전쟁이며, 한글은 이같은 비극적 상황의 틈바구니에서 새롭게 조성되기 시작한다.) 8월 초에 전쟁이 공식화했고, 일주일도 못되어 영국과 러시아는 지정학적 저울질 속에서 재빨리 중립을 선언한다. 조선의 운명이 중국의 번봉제후국(藩封諸侯國)에서 일본의 식민지로 차츰 내리달음질하는 순간이다. 자생적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군국주의적 제국주의로 나아가는 도정에서 피할 수 없는 과제인 정한론(征韓論)을 꾀/재바르게 수행하는데, 그 첫 수순이 강화도조약(1876)이다. 그런데 이 조약의 첫 항목이 의미심장하다. “조선국은 자주국이며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문장에서 앞대목은 숨은 진실이며, 뒷대목은 드러난 거짓말이다. 이미 이 땅에서 전쟁을 벌이기 20년 전에 일본의 흉엄(凶嚴)한 계략이 그 첫 흔적을 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어리석고 무능했으며 급변하는 세계정세에서 한심할만치 처졌고 요량이 없었다. 8월 중순 경 일본군은 평양에서 청군을 격파하면서 전쟁에서 승리했다. 이 전승의 결과,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와 리홍장(李鴻章)이 전권대리한 시모노세키 조약(1885)이 체결되는데, 그 항목은 강화도 조약의 첫 항목에서 한 걸음 (돌이킬 수 없이) 깊이 들어간 것이다. “청은 조선이 완결 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하며 무릇 조선의 독립 자주 체제를 훼손하는 일체의 것, 예를 들면 조선이 청에 납부하는 공헌, 전례 등은 이 이후에 모두 폐지하는 것으로 한다.” 개항 후 19세기의 후반을 관통하는 한중일의 관계는 이처럼 명료하다. 일본은 대륙진출의 교두보로서 한반도를 편입하려는 야욕에 치밀했고, 이를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서 중국을 조선으로부터 떼어놓아야 했던 것이다. 강화도조약(1976)-청일전쟁(1894)-시모노세키조약(1895)-을사늑약(乙巳勒約, 1905)의 전개과정은, 소중화주의의 헛된 형이상학적 최면 속에서 민생의 요구와 시세의 흐름을 외면하였던 왕조로서는 자업자득이었다. 도적 일본의 위세 아래 중화(中華)의 꿈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왕(高宗)은 이제사 말한다. “모든 공문은 국문(諺文)으로 본을 삼으라.”(高宗의 勅令, 甲午改革, 1984년 12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