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매개로 동학들과 어울렸던 그 하아얀 자리는, 이상스러우리만치, 후기 속에 다 표현되지가 않네요. 12회 청이음 모임에서는 ‘신성한 집중(divine attentiveness)’의 시간으로 채워지는 습관이 ‘밝은 생활이나 저 하아얀 행복(bright life or that white happiness)’을 기약한다는 메리 올리버의 산문을 읽으며, 자유의 무내용과 그러하기에 형식으로 몸을 묶어 정한대로 한다는 K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잠깐, 메리 올리버가 K선생님의 가르침을 받는 한 명의 숙인으로 느껴진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주체화는 정신의 기획이 아니며, 자유로써 주체화할 수는 없는 법이다. 오직 하나의 생활양식 속에, 하나의 윤리 속에, 그리고 하나의 복종 속에서 주체는 갱신되며 부활한다.
『적은 생활, 작은 철학, 낮은 공부』, K 선생님, 118쪽
Men and women of faith who pray-that is, who come to a certain assigned place, at definite times, and are not abashed to
go down on their knees-will not tarry for the cup of coffee or the newsbreak or the end of the movie when the moment
arrives. The habit, then, has become their life. What some might call the restrictions of the daily office they find to be an
opportunity to foster the inner life...And if you have no ceremony, no habits, which may be opulent or may be simple but
are exact and rigorous and familiar, how can you reach toward the actuality of faith, or even a moral life?
『Long Life』, Mary Oliver, 10~11 pages
신앙심 깊은 사람들은-정해진 시간에 어떤 정해진 장소로 와서, 무릎을 꿇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영화의 끝을 마저 보거나, 뉴스를 듣거나, 커피 한 잔을
위해 기도 시간을 지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경우 습관이 그들의 삶이 되었다. 누군가는 일상적인 일들의 제한이라고 부를지도 모르는 습관이 그들에게는
내면의 삶을 가꾸는 기회가 된다... 만약 당신에게 화려하거나, 소박하지만 정확하고 엄격하고 친숙한, 의례나 습관이 없다면 당신은 어떻게 신앙의 실제성이나
도덕적 삶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니체는 허무주의의 도래를 예측하며 오로지 개인의 안녕과 행복만을 찾는 인간들을 ‘최후의 인간’이라 말한다. 니체의 말대로 개인의 욕망과 소유, 쾌락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 가치 상실의 시대에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개인들은 우울하거나 불만과 화를 반복한다.
출구없는 삶속에서 무엇이 구원할 수 있을까? 특별한 마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의 생활양식 속에, 하나의 윤리 속에, 그리고 하나의 복종 속에서 주체는 갱신되며 부활한다.(k님)"
정해진 대로의 생활 속에서 문득 피어오른 ‘실제성’이 우리를 허무에서 구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