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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처음 본 것은 멍게들이 아니지>
바다를 처음 본 것은
멍게들이 아니지
몸으로 가을 언덕을 넘지 못하면
내일의 바람 맛을 모르고
종복(從僕)의 표정으로 옆자리에 내려앉지 않으면
주인의 비밀을 알 수 없어
인생은 제 덫에 물려
언제나 외눈박이
오해를 삼키면서
소문보다 빠르게
사막을 건넌 자들만이 보는 곳
내 그림자가
영영 쫓아오지 못하는 곳
은원(恩怨)이 가시고 통곡이 멎는 곳
하늘을 맨 먼저 탐닉한 것은
꿩들이 아니지
<선생님 책, 옆방의 부처, 35쪽>
멍게에게 있어 바다는 맹점이 됩니다. 바다에 살기 때문에 바다를 보지 못하는 것이지요. 외눈이 바로 맹점의 출발이 되며 외눈으로는 사이공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멍게와 달리 물까마귀는 겹안을 가지고 있어서, 물가에서 생활하면서 물속에 있는 먹이도 쉽게 건져 올리는, 물 안팎을 안다고 할 수 있는 새입니다.
"자기 밖으로 나와서 자기를 볼 수 있는 겹눈이 있는가"
인간은 탁월한 존재임에도 자기 맹점에 갇혀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지식(知)이 빛을 받아서 지혜(智)가 되는데" 타자와의 만남을 피하는 것은 곧 어리석음이지요. 공부하는 자는 계속 나아가게 되고 이동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이동하여 다른 차원의 세계를 만나게 되면 더이상 멍게로는 살 수 없습니다. '能改能移 不退轉' 이라는 말처럼 다른 세계를 안 이상 돌아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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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든 채 고정된(deadset)게 문제인데, 비록 노예라도 움직이면 중심도 움직이게 되고, 필경 그 중심이 비었다는 사실을 깨치게 된다. 물론 중심이 빈 것을 알아야 주체가 생긴다. 그제야 그 중심(들)이 징검다리였다는 것을, 그저 방편이었다는 것을, 달(月)이 뜨게 만든 그릇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달은 선생이 아니므로 선생이 버림받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므로 중심이 여럿이 되고 또 여럿이 하나가 되는 때, 그때가 곧 학생(學生)이다."
<선생님 책, 봄날은 간다, 299쪽, '학생(學生)이다(1)'>
선생님께서 '중심'에 대한 세 가지 태도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인생에 중심이 되는 것이 있다고 여기는 '신자'의 태도는 중심의 견고함을 요청하고 그 주위를 배회합니다. 이는 자신을 묻지 않고 사건 혹은 사고의 원인을 중심에게 돌립니다. '냉소하는 자'는 중심이 자신의 욕망에 응하지 않으니 환멸을 느끼고 중심을 거부하며 중심이 비었다고 여기는 태도를 보입니다. '신자'와 '냉소하는 자'를 통과한 '학생'은 중심의 변화 혹은 이동을 용납합니다. '학생'은 중심이 빈 것을 알면서 새로운 중심으로 이동을 하며 이웃을 향해 하나의 중심이 됩니다. '신자'는 집착하는 자이지만 '학생'은 집착을 방해물로 여깁니다. 중심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원망대신 성숙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공부로 삼아야 함을, 그리고 중심이 있다/없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가짐, 태도가 중요함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믿었던 중심이 무너지기도 하는데 정신이 가진 놀라운 속성으로 그것을 견딜 수 있는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정신의 자람을 말하는 학인에게는 '신자'나 '냉소하는 자'를 통과하여 '학생'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희망해 볼 수 있겠습니다.
※ 위 글은 25회 장독에서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정리한 글입니다.
"관념론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반드시 정신승리가 아니고 마음이 움직이면 무엇이 달라지는가?(7일. 장독 강의중 선생님 말씀)"라는
물음은 이동하여 변화하는 존재주체로서, 세상에 관여하고 세상과 더불어 변화되는 스스로인지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세상은 이미/언제나 인간의 세상이며, 그 세상 속에서의 인간의 개입은 통시공시적으로 끝이 없다(적은 생활, 작은 철학, 낮은 공부.112쪽)."라고 했듯, 인간의 '마음이 움직'여 가능해진, 돌이킬 수 없는(不退轉) '인간의 세상'이 말해주고 있는 '관념론의 미래'는 어디즈음에 와 있을까요.
"사람이 된 이상, 공부를 하는 이상, 더 이상 멍게가, 꿩이, 못 된다. 더 이상 돌아가지 못한다(7일. 장독 강의중 선생님 말씀)."라고도 배웠습니다. 의식 있는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책임의 공부'가 무겁게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