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회 속속에서는 闇然以章 11-20번을 복습하였습니다. K 선생님이 주시는 문장들의 의미를 톺아보는 것이 의미가 있기도 하고,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라는 4개 국어로 문장을 발화하며 끝내는 암송하는 노력을 통해 몸에 외국어를 새기는 연습의 시간이 쌓여 점점 더 외국어 발성이 자연스러워지고 편안해지는 동학들의 암송을 들으며 蹞步不休跛鼈千里가 빈 말이 아님을 실감하였습니다(그리고 이 열심의 현장에 진지하게 참여하지 못한 채 배돌고 있는 저의 게으름과 무능을 반성합니다).
외국어 공부는 말이 전하려는 의미를 자동화시켜 이해하지 않고, 문장을 구성하는 단어들을 낯설게 보며 그 섬세한 뉘앙스까지를 헤아려 의미에 다가서는 노력을 하는 순간이라는 점에서 타자성을 극진히 체험하는 순간과 닮아있는 듯합니다. 쉽게 번역된 우리말본보다 쉽진 않아도 사전을 찾아가며 영어 원서를 볼 때, 문장들의 의미가 더 선명히 다가오듯, 아는 것만을 고집하며 그 아는 것을 통해 나를 구성해 나가기보다, 낯선 세계로 나를 기꺼이 던져 그 세계의 ‘다름’과 부딪히며 ‘변화되는(이동하는) 나’가 주체의 이동이자 재구성일 것입니다.
외국어 공부를 통해 또 하나의 ‘마음의 길’을 만들어 나간다는 K 선생님의 말씀처럼, 진득한 외국어 공부가 가져올 마음의 길이 생성시킬 ‘다중주체’의 폭넓음을 향해, 오늘도 산책 길에서, 혹은 책상 앞에서, 闇然以章을 마주하는 동학들을 응원합니다. 저도 더 이상 모국어의 알껍질 속에서 웅크리고 있지 않고 알을 깨고 나와 다른 마음의 길에 접속하려는 바지런한 시도를 이어가겠습니다. 갑자기 두 개의 언어는 쉽지 않기에 일본어에서만이라도 소소한 성취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진하겠습니다.
알다시피 인간의 정신/마음은 우선 언어적인 것이다. 인간 존재와 언어성(sprachlichkeit)간의 연루를 주장하거나 시사하는 글이란 차고 넘친다. 해석학자들의 말처럼 인간의 이해도 단순히 활동이 아니라 ‘존재사건(Seinsgeschehen)’이 된다. 그래서 마음의 길을 새로 내려는 사람은 주로 ‘언어적인’ 노력을 경주하게 되는 법이다. 대략 인류의 화용이 100만 년 전에 시작된 사건이라고 하면 이로부터 인간은 본능의 일차원적 고속도로에서 벗어나 복잡미묘한 마음의 골목길들을 열어간 셈이다. 그중에서도 언어, 혹은 외국어의 학습은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외국어를 익히는 일을 기술적인 작업, 처세술적인 행위, 혹은 정치외교적인 가교술쯤으로 이해하는 것은, 언어의 뜻, 나아가서는 인간의 뜻과 가치를 놓치는 것이다. 물론,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긴 해도, 외국어 학습의 진정한 의미는 그 인문학적 가능성에 있는 것이다.
『적은 생활, 작은 철학, 낮은 공부』, K 선생님, 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