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버윅 vs. 크리스티안센-채터, 혹은 구조와 게임
1. 촘스키(Avram Noam Chomsky)-버윅(Robert C. Berwick)과 크리스티안센(Morten H. Christiansen)-채터(Nick Chater)의 이론적 관계는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와 바흐친(Mikhail Bakhtin) 사이의 그것과 같다: 크리스티한센-채터는 촘스키-버윅과 같은 장(field) 내에서 다른 입장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촘스키-버윅이 보지 않았던 곳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소쉬르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의 자의적 관계를 통해서 랑그를 구조화하고 파롤을 단지 보편적인 것의 예시로 다루었던 것과는 달리, 바흐친은 본래적인 것은 ‘대화적인 것’이라고 보고 기호(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란 매 순간 어느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는 투쟁과 모순의 영원히 가변적인 중심점일 뿐임을 주장했던 것과 유사한 것이다.
2. 촘스키-버윅에게 언어란 구조(주의)적인 것이다. 이들은 소쉬르의 언어에 관한 이론을 컴퓨팅 시스템적으로 확장시켰다. 랑그(langue)가 어휘 차원에서 기호적인 것, 아니 더 추상화시켜서 말하자면 ‘최소 단위’에 관한 이론을 이미 정립시켰으므로 이제 바로 그러한 단위들의 ‘결합’, 그것도 ‘무한하게 생성되는 결합’에 대해서 이야기할 차례가 온 것이다. 촘스키-버윅의 작업은 통사론(syntax)의 랑그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통사적 구조는 오직 언어학자였던 소쉬르에게서와는 다르게 ‘인간에게 언어란 무엇인가’에 관한 답을 내리는 근본토대로서도 작동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3. 한편 크리스티안센-채터에게 언어란 게임이다. 이들에게 언어란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유기체로서 자신의 환경적 적소인 뇌에 적응하여 생존하고자 하는 존재다. 우리가 마치 미생물과 공생관계를 맺은 것처럼 언어는 생존을 위해 우리에게 의존하고, 우리는 언어와 선순환하는 관계를 맺으면서 언어, 뇌, 그리고 문화를 발전시켜 나간다. 다시 말해 인간과 언어는 ‘진화적이고 역사적인 대화’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저자들은 인간이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혹은 보다 부드럽게 말해서 언어와 어떠한 관계를 맺는가’에 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지 언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언어는 우리가 그것을 통해서 게임을 할 때에만 ‘포컬 포인트’에서 잠시 존재할 뿐이다.
4. 촘스키-버윅에게 중요한 문제는 언어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왜 이 질문이 중요한가? 그것은, 이들에게는 이미 언어가 인간을 인간으로서 생성하는 놀랍도록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자기 자신만을 생성하지 않는다. 언어는 인간성의 정수(精髓)다. 그러므로 언어가 무엇인지를, 언어가 어떤 식으로 인간의 진화와 관련되었는지를 밝혀낸다면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구조주의적 야심이다.
5. 크리스티안센-채터에게도 언어는 몹시 중요하다. 그러나 이들의 언어는 완벽하게 내부가 없다. 이들에게 언어는 극도로 피상적이지만 바로 그 피상성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시키고 서로를 이해하고자 하는 절박한 필요 속에서 언어를 사용한다. 우리는 언어를 ‘따라잡으려고 한다.’(크리스티안센-채터에게 무엇이 중대한 문제인지를 보라: “정말로 곤혹스러운 문제는 우리가 언어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뇌가 언어의 맹공을 결코 따라잡을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진화하는 언어』, 67)).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언어가 우리 속에서 살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가 살 만한 곳이 되어 왔다…, 그리고 우리 또한 언어로 인해서 살 만한 것들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관점에서 도대체 이들은 어디로 더 나아갈 수 있을까? 갈 곳이 없다. 이들이 걱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공지능’이 우리처럼 언어를 사용해 우리와 같은 존재가 되어 지구를 지배할 가능성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책의 마지막 장을 바로 이 걱정에 대한 푸닥거리로 마무리한다. 보라. 우리 말고는 아무도 언어를 쓸 수 없을 것이다.)
6. 촘스키와 버윅에게 언어란 무엇인가? “언어의 핵심은 한정된 연산작용체계를 토대로 표현을 무한대로 생성하는 것이다. 이때 생성된 표현들은 각각 의미-화용측면과 감각운동체계에서 명확한 해석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우리만이 언어를 사용하는가: 언어의 진화』, 19-20)
촘스키-버윅의 언어이론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틀은 삼각형이다. 삼각형의 아랫변의 두 꼭지점을 차지하는 것은 다음 두 항이다: 먼저 감각운동체계를 통해 뒷받침되는 <외재화> 부분이 있다. 우리에게는 조음기관인 성도를 비롯해서 언어의 무한성이 최대로 허용될 수 있는 범위를 결정하는 신체기관들이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추론, 해석, 계획화, 행동의 조직화 즉 (이들의 표현에 따르면) ‘비공식적으로’ 사고라고 말할 수 있는 개념체계의 부분이 있다. 이를 <내재화>라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삼각형의 꼭대기를 차지하는 일종의 중앙처리장치가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통사적 구조의 프로그램 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인데, 그래서 통사적 구조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이야기된다: 1) 상하계층구조 2) 상하계층구조는 해석에 영향을 미치도록 되어 있다(구조가 의미단계에서 해석을 고정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상하계층구조의 하위 구조의 깊이에는 한계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정리하자면, 상하계층구조를 갖추면서 무한한 배열형태의 구조를 생성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언어다. 촘스키-버윅의 이론 체계에서는 이러한 생성양식을 수용하는 접근방식을 생물언어학프로그램이라고 부르며, 이러한 언어를 내재언어라 부른다. 내재언어의 이론이 곧 생성문법이며, 보편문법은 특수한 내재언어를 습득,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내적 역량에 해당하는 언어능력의 유전적 부위를 다룬 이론이다. 촘스키는 보편문법을 제어하는 것, 즉 ‘제약들’을 매우 중요하게 보았다. 제약들이란 우리를 제한하지는 않으면서도 ‘무한히 가능한 것들’의 한계를 생물학적으로 지정해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제약이야말로 구조적인 차원에서 생성과 보편을 완벽하게 결합시킨다. 보편문법은 결코 지정될 수 없지만 ‘제약들’로서 존재한다. 보편문법에서 제약이 중요하다는 것은 결국 극도로 간결한 최소주의적 체계를 가정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매우 위태롭고도 흥미로운 이론적 고안물이라고 할 수 있다.
7. 크리스티안센-채터에게 이론적으로 명확화되어야 할 것은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즉 제스처 게임을 하는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 언어와 관계를 맺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제스처 게임을 할 수 있으려면 다음 두 가지의 지점을 거점화해야 한다. 먼저, ‘지금 아니면 사라질 병목지점Now-or-Never bottleneck’을 어떻게든 처리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포컬 포인트focal point’로 가야 한다. 우리는 병목지점은 청킹과 적시생산전략을 통해 돌파한다. (도대체 청킹이 왜 가능한지, 적시생산은 어떻게 가능한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C-학습 및 협력적 과제인 의사소통을 통해 포컬 포인트에 도달하게 되는데, 물론 포컬 포인트는 어떤 정해진 장소는 아니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제스처 게임은 영원히 존재하는 ‘의사소통 빙산’에서 벌어진다. 병목지점과 포컬 포인트는 끊임없이 변하고 흔들리지만 바로 이 빙산 위에서 움직이며, 이 빙산은 어디로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 크리스티안센-채터에게 있어서 이 세 가지의 장소는 우리가 언어와 관계를 맺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장소들이다.
이들에게 언어의 체계는 ‘자생적 자기조직화’를 통해 생기며(생물학은 아니지만 마치 생물과 같다), 언어의 의미는 무한하며 풍부하며 복잡하며 피상적이고 축적적이다. 매번의 협력을 통해 의미는 구성된다. 언어를 말하는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다른 의미와 체계의 ‘새로운 언어들’이 생긴다. 촘스키에게는 “모든 언어가 결국은 같은 것”이라면, 이들에게는 모든 “언어는 개인 언어들idiolects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위의 책, 330).
8. 촘스키-버윅의 이론은 전형적인 구조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진정한 물 자체는 ‘구조’다. 구조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달리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언어가 진정으로 규명해 줄 인간이라는 존재는,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언어를 통해서 알 수 있게 되는데) 가장 간결한 구조를 통해서 무한에 다가가는 존재이지만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인간이란 언어라는 조건과 한계 속에서만 필경 피어나는 존재인 것이다.
한편, 크리스티안센-채터의 이데올로기는 언어에 내부가 없다고 보는 데 있다. 왜냐하면 언어는 제스처 게임 참가자들에게 ‘그냥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들의 책에는 하나의 원형적 몽타주(montage)가 존재하는데, 정말로 영화와 같은 편집이다. 책의 첫 장면은 1769년 굿 석세스만에서 인데버 호의 제임스 쿡 선장과 선원들이 하우시족과 대화하는 것이다. (누구도 하우시족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우리는 검고 벌거벗은 하우시족‘을’ 만나고 있다.) 책의 마지막 장면은 2023년 첨단의 과학 기술 발달을 통해 빠르게 성장하는, 빅 데이터로 무장했으며 인류를 지구의 지배자 자리에서 내몰지도 모르는 인공지능들의 위협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 몽타주에서 전달되는 메시지는 한 가지다: 우리만이 언어를 쓸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제스처게임을 통해서 사용하고 있는 바로 그러한 형태의 언어의 세례를 받았다. 우리는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으며, 그 어떤 존재도 쓸 수 없는 언어를 쓸 수 있는 존재다.
9. 테리 이글턴은 구조주의의 이데올로기란 주체를 효과적으로 숙청하여 비인격적 구조의 기능으로 축소한 데 있다고 지적하면서 결국 주체란 체계 자체가 된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이러한 형태의 구조란 결국 주체의 얼굴들과 내용들을 비롯하여 구조가 틀 속에서 회집하고 있는 사회순응적인 이데올로기의 내용들을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을 과학적이라고 믿는 가운데 스스로를 소외시키기도 할 것이다. 구조주의는 신자유주의적인 후기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성공적으로 부합한다.
마찬가지로 이글턴의 논점을 빌려 말하자면, 크리스티안센-채터는 주체에게 언어라는 권력을 지닌 존재성을 되돌려 주었지만 그 주체가 활동하는 공간은 제스처 ‘게임’의 공간이지, 언어가 실제로 게임의 참여도와 깊이와 가시성 자체를 달리 만들고 있는 그 울퉁불퉁한 공간은 아니다. 실로 크리스티안센-채터의 몽타주는 ‘제스처 게임이 일어나는 공간’을 확보했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공간 역시도 신자유주의적인 후기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합치한다.
2024-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