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162회 속속 발제문
유재
공연히, 좀 더 생각해보기: 한자를 정확히 ‘발음한다’는 것은 왜 그토록 중요했을까?
일본한자음에는 오음(吳音), 한음(漢音), 당음(唐音) 세 종류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 .] 오음은 5~6세기경부터 사용된 가장 오래된 한자음이다. (270) [. . .] 남조를 중심으로 한 중국어 음이 일본에 유입된 것을 오음이라고 한다. [수와 당의 수도였던] 장안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신세대들이 들여온 것이 바로 한음이다. ‘한’은 중국을 가리킨다. 새로운 한자음을 배운 사람들은 이전의 한자음을 오음이라 하여 업신여겼다. 749년, 교토로 천도하고 헤이안 시대(794~1185)를 연 간무천황은 한음을 장려하는 칙령까지 내린다. 그러나 일본의 한자음 전체가 한음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고 구세대의 오음과 신세대의 한음이 공존하게 되었다. 불교겅전은 대부분 전통적인 오음이 중심이 되고 경전 이외의 한문 서적을 읽는 데에는 개진파(改進派)의 한음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271) [. . .] [당음은 1127년 건국한 남송의 한자음을] 가마쿠라 시대(1185~1333)와 무로마치 시대(1336~1573) 승려들이 [들여온 것이다]. [그러나] 당송음은 오음, 한음처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하였다. (272)
The large number of homophones in Sino-Japanese morphemes and words resulted from the fact that when the Japanese imported Chinese characters, they could not retain tones. As a result, some syllables ought to be simplified to reflect the Japanese syllable structures (e.g., {県}, {権}, {件}, {験}, {圏}, {研}, {券}, and {謙} are pronounced as /ken/). (중국-일본간의 형태소와 단어에 동음어가 많은 것은, 일본인이 한자를 수입할 때, 그 음조를 유지할 수 없었다는 사실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그 결과로, 일부 음절들은 일본 음절 구조를 반영하기 위해 단순화되어야만 했다.) (Chinese, Japanese, and Korean Writing Systems: All East-Asian but Different Scripts, H. K. Pae, https://doi.org/10.1007/978-3-030-55152-0_5)
일본어에는 약 100음절이, 중국어에는 성조를 제외하면 약 400음절, 포함하면 약 1,300음절이 있는 한편, 우리나라에는 11,000음절이 있다(!) 그리고 일본어는 다수의 음절을 더 적은 수의 음절을 매개로 가져오는 과정에서 다수의 훈 읽기와 다중 스크립트를 발현시켰고, 한국어는 풍성한 음절을 매개로 더 적은 수의 음절을 가져오는 과정에서 하나의 음 읽기와 형태소적 성격을 띤 알파벳을 발현시켰다. 한국 한자음은 “당대 장안음이라는 기초 위에 근세의 음적(音的)층이 곳곳에 덮여 있다”(273). 하나의 음으로써 여러 시대의 음을 함축한 것이다(혹은 함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자음의 문란>은 세종이 식별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세종은 전래한자음―15세기 한국에서 사용되던 한자음―을 본래의 한자음으로 바로잡고자 했다. [. . .] [그리고] 정말 편리하게도 <정음>은 <반절>과 같은 간접적인 표기방법으로써가 아니라 직접 <정음>으로 한자음을 표기할 수가 있다. 아니, <정음>을 창제할 당시에 이런 문제까지 염두에 두고 창제하였음이 틀림없다. 『훈민정음』언해본을 보면 조선어 음뿐만 아니라, 조선어용 자모로는 표기할 수 없는 중국어 음까지 표기할 수 있도록 중국어 표기를 위한 자모를 따로 마련해 두었다.” (275)
노마 히데키는 한자음이 다르면 ‘시(詩)’를 지을 수 없었을 것이고 시를 지을 수 없다면 교류하고 외교하고 체면을 지킬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세종은 운서(韻書, 한자음을 정리한 자전(字典))를 바로잡고자 발표한 『동국정운』에서 다음과 같이 한자음을 살피는 중요성을 언급한다. “소리를 살피어 음을 알고, 음을 살피어 음악을 알고, 음악을 살피어 정사를 알게 된다(審聲하여 以之音하고 審音하여 以之樂하며 審樂하여 以之政하니라).”(279)
세종의 명을 받아 수양대군이 지은『석보상절』(한문원문-정음언해)과 이를 읽고 세종이 지은『월인천강지곡』(정음원문-한자어번역)의 ‘혼용’은 매우 흥미로운 사건이다. 왜냐하면 『용비어천가』에서는 한자어에 한글로 ‘한자음’이 달리지 않았지만, 『월인천강지곡』의 한자어에는 한글로 ‘정음’이 달렸기 때문이다. 노마 히데키는 경서, 민중교화서적, 한시가 <언해>됨으로써 어떻게 <정음>으로 읽힐 수 있었는가를 설명해주는데 이는 곧 한자음을 정음화하는 작업이었을 뿐 아니라, “한문적 요소를 한국어의 <문장체=글말>에 흡수하는 중요한 도체가 되었을 것”(303-4)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 가운데 시조(時調)가 성행하고 정음 에크리튀르 소설(국문소설)이 탄생하고 또한 판소리의 문예가 빛나기 시작한다. 이를 한자음을 바르게/하나로 읽었던 것의 <효과>가 쓰기를 위한 <어휘체계>를 세우는 작업을 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까? (또는 이렇게 지적하는 학자도 있는데, “The invention of Hangul was the point of departure from the history of cultural and linguistic dependence on Chinese. Had it not been for Hangul, the Koreans might have been in the continuation of the past under immense Chinese influences.” (한글의 발명은 중국어에 대한 문화적, 언어적 의존의 역사로부터 떠나는 지점이었다. 한글이 없었더라면 한국인은 중국의 엄청난 영향을 받으며 과거의 연속 속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말에 일리가 있다고 하면, 중국어의 음을 바로잡는 과정에서 중국으로부터 바로잡아진 것이다.)
한문을 ‘정음화’하자 한자어가 ‘우리 어휘’가 되었다. ‘한자어라는 의식조차 흐릿하지만 무거운 한자 한문의 전통을 등에 메었다’고 노마 히데키가 설명하는 ‘혹시’와 같은 어휘(306)가 우리 말에는 참 많다. 어쩌면 정음화의 실천은 중국어 어휘를 탈환한 것이나 다름 없는데, 어휘를 이런 식으로 우리 문법 속에 정음을 통해 흡수함으로써 아마도 한자어는 우리 고유의 사유 속도로 운동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분명 “형태소는 음소로 해체하면 의미를 실현하지 못하게 되는 것인데(山을 s, a, n으로 해체하면 그것은 이미 <지>가 아니다)”(245) 정음의 마지막 층은 ‘형태음운론’(210-11)으로 음절인 동시에 형태소일 수 있는 가능성 속에서 어휘를 대하는 정음/한글만의 독특한 방식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자연의 글이 있다.” (247) 정인지의 후서 첫문장은 오히려 ‘글자’에는 ‘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넘어, ‘음’이 있으면 ‘글자’가 있어야 한다는 형식을 내보인다. 물론 이 말은 ‘자연의 소리’, ‘천지만물의 소리’, 혹은 오노마토페적인 것, 혹은 그간 쓰여지지 못했던 <말해진 언어>만의 고유한 소리에 한정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만약 그것만이 아니라 정음이 더 넓어져 한문까지도 덮는 것이었다면 정말 “정음은 깊다”(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