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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1 18:40

남성성과의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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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의식하지 못했던 내가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나도 모르게 하는 행동과 말들이다. 나의 무의식이 내 몸을 통해 드러난다.

난 어느순간부터 남자어른 - 나보다 어느정도 나이가 많고 어떤권위가 있는, 그것이 내가 인정한 권위든 세상이 인정한 권위든-을 지나칠 정도로 어려워하고 몸이 저절로 피하는 것이였다. 한동안 몸담고 있었던 교회 공동체에서도 그랬고 가정에서는 물론 그 어느 모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억은 객관적 진실은 아닐 것이다. 현재의 내가 재해석한 과거의 사건일 것이다. 그럼에도 내 10대를 지배했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가진 상흔은 내 몸에 남아있다.

 그 당시 아버지들이 대부분 그러셨듯이 일제 말기에 태어나셔서 전쟁을 겪고 군부독재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산 증인들이시기에 그들의 시대적 상처와 한계를 이제는 이해한다. 가정형편으로 꿈을 접으시고 시골에 내려와 농사를 지으셔야 했던 아버지는 자식들이 그꿈을 대신 이뤄주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 그것이 어떤 상처이든 기질적 문제셨든지 간에 폭력이라는 방식으로 나타났고 어린 삼 남매와 그 외 가족들은 고스란히 받아내야만 했다. 내가 접한 최초의 폭력은 남성성이었다. 아무리 사랑의 매로 포장한다 해도 그때의 기억은 강자 앞에서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무력한 존재였다. 중학교 때까지도 맞은 기억이 있다. 어머니도 우리의 보호막이 돼주시지는 못하셨다. 어머니 역시 폭력 앞에서 무기력한 존재셨다는 것을 이제는 이해한다. 공부를 그리 잘하지 못했던 나는 언제나 초라했고 존재 자체로 인정받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고등학교 졸업식에 처음으로 아버지가 오셨던 기억이 난다. 난 너무 어려워서 오시지 않기를 바랐는데  어머니가 일을 다니시고 계셔서 그랬던지

아무튼 오셨다.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진 한 장이 남아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아버지 나름의 자식에 대한 최선의 애정 표현이셨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난 언제나 아버지 앞에선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는 변변치 못한 자식이라는 자의식이 떠나질 않았다. 결혼도 나에겐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는 하나의 탈출구였다. 하지만 결혼은 더 적나라한 가부장제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었다. 더 이상 어린아이도 아니고 나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간다 생각했지만 여기서도 내 존재는 소외되었고 딸 둘을 낳았을 때는 깊은 상흔을 남겼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존재자체가 부정되는 현실에서 절망

했다. 결혼 생활 중 두 번정도의 남편의 폭력성을 보아야 했고 시어머니는 그 즈음까지 매 맞는 아내였다. 놀라웠던 건 남편이 그것을 모른체한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다행히 세월이 지나 그 정도의 폭력은 사라졌다.

 내 삶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맞닥뜨린 남성들과의 관계에서 난 상처 입었고 내 깊은 곳에서는 울고 있는 한 아이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생겼고 나이를 먹었다. 이제 그 아이는 더 이상 울지 않으려 한다.

내년이면 어느덧 80이신 아버지는 머리는 다 빠지지고 얼마 안 남은 머리는 희끗희끗하시다. 기운도 많이 약해지신 게 눈에 보인다.

이제는 더 이상 아버지를 어려워하지 않는다. 세월의 힘일 것이다. 그럼에도 내 몸에 남아있는 상흔이 나를 붙잡고 있다. 이제는 그것을 벗어나고 싶다.

더 이상은 과거에 발목이 붙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약자의 자리에 자신을 배치시켜놓고 돌보지 않았던 나의 여성성을 이제는 당당한 주체로써 살아가게 하고 싶다. 그런 후에라야 나는 남성과 대등하게

직면하고 서로의 관계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을 것이다. 상처가 어리석음으로 되는 과정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 중 제일 슬픈 건 약자의 상처다.

특히 여성의 상처다. 상처는 상처일 뿐이다. 그 자체로는 아무 힘도 없고 과거에 함몰될 뿐이다. 남성에게 부여된 사회적 권력에는 여성의 책임도 있다.

여성은 약자로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긴 세월 속에서 나름의 자구책으로 그들의 권력의 그늘에서 숨어 지내며 자족했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본다.

남녀간의 근본적인 불화를 이야기한 라캉의 말을 배웠다. 사랑은 불가능하더라도 더 이상의 원망과 불신은 넘어가고 싶다.

장숙에는 다른 남성들이 존재한다. 여성의 말을 배우려는 남성들이 있다. 여성과의 사이에서 남성이 조금더 손해를 봐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남성들이

있다. 이제 나도 몸을 이동시켜야 한다. 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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