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둘째 아이 말투에 신경이 갔다. 비꼬거나 약을 올리는 말투를 사용하고 있었다. 두어 번 아이를 붙잡고 지적했던 것 같다. 별 변화가 없었고 습관으로 굳어질까 염려되었다.
그날도 동생에게 하는 말이 딱 그러해서 마음먹고 아이를 세웠다. 말투의 문제점을 지적했고 네 말이 너다, 약 올리고 비꼬듯이 말을 하면 네 마음에 그런 길을 생긴다, 등등 훈계며 설명인 말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아이가 컸는지. 잘못했다는 표정이 아니다. 잔뜩 억울한 표정이다. 언니가 어떻고 동생이 어떻고 밖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니 집에서라도 그러면 안 되냐고 외려 따진다. 무엇 때문일까. 아이의 억울함이 거세졌다. 꼼짝 않는 아이를 나무라다가 타이르다가 요지부동 변치 않는 태도에 급기야 호소를 했다. 네 '엄마'인데, 엄마 말을 안 들으면 어떡하느냐고. 서로에게 닿지 못한 채 허탈과 침묵만 흘렀다. 지금은 대화하기 어려운 것 같으니 다른 날 다시 얘기하자고 했고 시간이 늦었으니 그만 씻으라고 했다. 그제서야 감정 가득 힘주어 “네에” 하며 자리를 박차는 아이.
‘말투’를 고쳐주려던 의도는 의도 밖으로 외출하지 못했다.* 가까스로, 다른 사람의 말을 받지 못하는 태도를 문제 삼았는데, 강고하게 말할 수도 없었다. 아이를 보고 있자니 딱 나인 것. 자신을 향해서만 굽이치는 방향성과 폐쇄성이 그렇다. 아이에게서 인(仁)의 씨앗을 보기도 하지만, 내가 질기게 만들고 있는 집요한 질곡(桎梏)도 보이는 것 같다. 부디, 잘, 돕고 싶다. 너도 나도.
마지못해 선 아이의 머리카락을 말려주었다.
이틀 뒤. 인후통이 있어 등교하지 않는 아이를 데리고 외식을 하러 갔다. 둘째 아이는 입이 짧은데 ‘양념 갈비’를 좋아하고 드물게 잘 먹는다. 모처럼 식당에 마주 앉았다.
-서현아, 엄마가 서현이 말투에 대해 했던 말 생각해 봤어?
끄덕끄덕.
-서현이 다른 생각이 있어?
-없어요,
-그럼, 엄마 말을 인정할 수 있어?
-네,
아이 눈에서 눈물이 뚝.
-서현이는 누구보다도 스스로 알아서 잘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인데, 잘못했다고 바로 세워서 지적한 것이 마음에 걸려. 무안하지 않을 때에, 조금 더 부드럽게 얘기할게
딸아이가 운다. 나도 운다.
이 일이 있은 후 전에 없이 아이가 밝아졌다. 그러고보니 언제부터인가 곁에 잘 안 왔었는데, 기대고 안기고 장난을 친다. 혼자 방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길래 커서 변한 것이겠거니 했다. 아니었나 보다. 서현이의 마음에 무엇이 맺혀있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무언가 조금 풀린 것은 분명하다. 비꼬고 약 올리던 말투는 없어졌다.
11살 서현이와의 관계에 내 공부가 있다. 어디 서현이와의 관계뿐일까. 관계를 딛고, 그도 나도 모르게 무언가에서 풀려나는 순간이 있다. 존재 깊이 四隣**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것. 관계(四隣)와 일(事)과 공부(功扶)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나아가는 것만 같다.
가만히, '신뢰'***가 궁금하다. 마침내 세상에 없는 관계가 형성 될 때, 맞물려 나아가게 될 곳과 풀려나게 될 것은 무엇일까. 아득히 저 먼 곳에서 자꾸만 손짓하는 것 같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외출하지 못하는 의도”, 『동무론』, 최측의 농간, 2018, 169쪽
**“존재의 개입과 신생의 윤리”, 『동무론』, 최측의 농간, 2018, 540쪽
***"마지막은, 四隣으로부터의 신뢰입니다. 물론 신뢰의 관계는 '방법'이 아니라 성취이긴 하지만, 이는 그 과정(생활양식)과 성취가 서로 면밀히 되먹히는 점에서 그 이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도량-깜냥'의 완결은 신뢰를 통해서 구체화됩니다. 나는 여기에서 '인생의 비밀을 봅니다. 시계가 나를 신뢰하고, 고라니가 나를 신뢰하고, 네가 나를 신뢰하고, 신(들)이 나를 신뢰하시는 중에, 한 인생의 가능성은 아름답게 맺힙니다.", 『차마, 깨칠뻔하였다』, 늘봄, 2018, 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