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茶山과 신독愼獨
혹은 그의 천주上帝에 관한 짧은 정리적·상상적 글쓰기
不信降監者 必無以愼其獨矣
내려와 감찰하시는 이를 믿지 못하면 필히 그 홀로 있음에 삼갈 수 없다.
『中庸自箴』 茶山 丁若鏞
1. 不信降監者, 必無以愼其獨矣
‘전 세계 해역에서 노닐고 있어야 할 범고래 떼를 시베리아 한복판 설원에서 본 것 마냥 황망했다’ 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혹은 요즘 유행하는 가삿말처럼 ‘네가 왜 거기서나와~?!’하는 식의 뜬금없음이랄까?! 不信降監者, 必無以愼其獨矣(불신강감자 필무이신기독의)라는 한 문장을 처음 알게 된 당시의 감상이 그러했다. 그리고 그 감상에 터해 다산 정약용이라는 인물을 더 돌아보게 되었고, 그의 신독愼獨이 못내 궁금해졌다. 그 동안 유교라는 것을 배우고 독서하며 알게 된 바에 따르면, 신독愼獨은 유교라는 ‘형식 안에서 만들어진’ 차분함과 닮은 몸·마음의 상태였다. 이것을 다시 말하자면 유교라는 이념 틀이 생활로 내려앉았기에 생성된 집중의 한 형식이라고 말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신독의 필수조건으로 강감降監하시는 신, 즉 ‘내려와 감찰하시는 이를 믿지 못하면 그 홀로 있음에 삼갈 수 없다‘라고 하니 어리둥절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바, ‘삶도 다 알지 못하는 데 어찌 죽음을 아는가(未知生焉知死)’ 혹는 ‘귀신은 공경하되 멀리하라(敬而遠之)’고 하신 것처럼, 인륜의 밖에 있는 것에 대해 말하길 삼갔던 유교사회의 유학자 입에서 강감하시는 신이 나왔다. 그것도 모든 것의 ‘근본’을 효제孝弟로 봤던 다산 정약용에게서 나온 말이다.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바야흐로 조선 계몽의 시대, 그 문을 함께 열어가던 임금의 신의信義 에 충忠으로서 응하고, 효제를 핵심개념으로 공부했던 유학자 정약용의 삶에서, 한 평생 그가 놓을 수 없었던 또 하나의 축, 천주교를 다시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지점이었다.
2. 다산의 활약 시기와 다산
다산이 활약하던 시기는 조선의 르네상스라 말해지는 계몽군주 정조(재위1776~1800)의 시대였다. 1583년 예수회 신부였던 마테오리치가 선교를 목적으로 명나라에 들어가 천주실의天主實義(1603)를 집필한지 170여년이 흐른 후였고, 정조 즉위 이래 ‘서양 과학기술 수용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면서, 젊은 그룹 사이에서 서학 공부가 유행처럼 번져갔던1)’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는 연행길에 자제군관으로 합류할 기회가 많았던 젊은 노론 층을 중심으로 폐관소품체와 같은 사소설적 문체들이 들어와 이전과는 다른 문체의 조류를 만들어냈는가 하면, 남인들 역시 청을 통해 서학을 배웠고 더 나아가 서교로 번져나가기도 하던 시대였다. 초정 박제가(1750~1805)는 서사西士를 초빙해 서학西學을 배워야한다는 주장을 했다고도 하니, 그 시대 지성들의 동향을 상상 할 수 있다(그가 요즘말로 치자면 극좌파 쯤 되는 사람이라 손 치더라도). 한편, 조정에서는 정조의 이열치열 탕평책으로 기존 기득세력인 노론과, 그 노론을 견제하면서 권력의 또 다른 한 축으로 떠오른 남인세력간의 권력다툼이 첨예하게 대립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 역사의 한 복판에서 다산은 성균관 유생시절부터 정조의 총애를 담뿍 받던 신하이자 남인의 행동대장 이었으며, 세례 받은 천주교인이었다.
3. 조선의 천주교와 정약용 : 『파란』2)을 주로 하여 정리 요약
천주교사에서 조선은 ‘자연발생지’라는 조금 특이하고 특별한 위치를 점한다. 당시 조선은 천주교 불모지였던 바, 가르침 받을 스승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복음을 전할 선교사가 있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천주교가 일어났기에 나온 말이었다. 다만, 책으로써 서학을 접한 이들이 있었고, 그들이 텍스트 안의 신上帝을 만나는 지경을 이루었으며, 그것이 곧 조선 안의 천주교가 자생하는 시작점이 되었다. 그 처음은 1779년 눈 내리던 겨울, 경기도 양주의 한 절간이었다. 한 장소를 정해 두고 여러 날 강학하는 전통을 가진 성호학파의 학인들이 모여 한창 강학모임을 하고 있었다. 권철신이 이끈 모임으로 이벽, 정약전, 이승훈 등이 함께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를 비롯해 초보적 천주교 교리가 포함 된 과학서적도 함께 읽었다. 남인학자들의 첫 서학공부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783년 12월에는 이승훈이 자제군관으로써 베이징으로 연행을 가게 되었는데, 이 때 이벽은 이승훈에게 베이징의 북천주당에 꼭 들러 서양에서 온 선교사를 만날 것을 당부하였다. 그리고 이벽의 말을 따른 이승훈은 북천주당으로 갔고, 선교사를 만나면서 조선인 최초의 세례받은 자가 되었다. 이승훈은 다음해에 연경에서 돌아와 이벽에게 세례 한다. 이로써 선교사 없는 선교의 시작이 된 것이다.
이 해 4월, 다산 형제는 돌아가신 큰 형수의 장례를 치르고 서울로 돌아가던 배 안에서 이벽에게 처음 서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승훈이 정약용 누나의 남편이었다면, 이벽은 큰 형수의 동생이었다. 모두 정약용의 집안과 연관 된 인물들이다. 정약용의 성균관 시절, 정조는 정약용에게 중용에 관한 70조목의 의제를 내주며 다음날까지 풀어오라고 명한다. 고심하던 정약용은 이벽에게 도움을 청하고 서학의 관점이 접목 된 답안을 내놓아 정조에게 칭찬을 받는다.3) 정약용이 조선에 천주교를 이식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이벽에게 영향 받았음직한 답안이었다. 1785년 3월에는, 지금의 명동성당 자리인 명례동에 있는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설법교회를 열 다 의금부에 발각(秋曹摘發事件)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일로, 이벽의 집안에서는 아버지가 대들보에 목을 매는 소동이 벌어졌고, 이벽은 단식을 했으며 정신착란증세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 7월 초 죽었다(전염병에 의해 죽었다는 설이 있다). 이승훈은 공식적으로 배교를 하였고, 정약용의 집안 또한 난리가 난 것은 마찬가지였다. 당시 양인이었던 김범우만이 유배를 가다 죽었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사히 풀려났다지만 이 일로 서학이 사학邪學으로 지목되면서 논란의 중심으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이후, 같은 남인이었던 정약용과 이기경이 서학을 공격하는 공서파(남인벽파)와 서학을 믿는 신서파로 나뉘게 되는 반회사건(1787년)4)을 거쳐, 1790년 10월에는 천주교 밀사 윤유일이 중국에 있는 프란치스코회 출신의 구베아 주교에게 조선의 천주교 상황을 알리는 한편, 조선천주교인들의 물음에 대한 답변을 받아 돌아온다. 그 답신 중에는 ‘신주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것은 우상숭배이니 이를 지키지 않으면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는 답이 함께 왔는데, 하필 제사와 신주 모시는 일을 문화로 대했던 예수회 선교사5)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대신한 프란치스코회 출신의 주교에게 답변을 받아와 생긴 일이었다. 이 일의 여파일까, 1791년 진산사건이 터졌다. 이른 바 신해사옥으로, 정약용 형제가 전도 한 천주교인 윤지충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제사를 폐하고 신주단지를 불태워버렸다. 부모에 대한 공경을 살아계셨을 때와 같게 하는 것이 도리이기에, 제사로서 예禮를 다하던 유교사회에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해 12월 윤지충과 윤지충을 두둔했던 권상연을 효시하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 되었다. 앞으로의 천주교인에 대한 처우를 결정하는 중요한 사건이자 신유사옥의 전조였다. 한 번씩 사건이 터질 때마다 천주교세가 위축되는 듯 했던 조선에, 1794년 주문모 신부가 입국했다. (조선에 파견 된 최초의 신부였는데, 당시 4000여명이었던 신도가 1799년에는 1만명까지 늘어났다.) 입국 후 배교자의 밀고로 은신해야 했던 주문모를 조선 천주교 최초의 여신도회장인 강완숙이 도왔고, 이 과정에 정약용이 개입했다는 정황이 있다. 진산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효에 대한 입장이 완고했던 정약용이 배교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난무하지만 여전히 천주교를 버리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6) (덧붙여, 강완숙은 신앙을 이유로 남편에게 절연 당하자 시어머니와 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살던 이였다, 경희궁으로 주문모신부를 직접모시고 들어가 은언군恩彦君의 부인과 며느리를 전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날이 왔다. 1800년. 오회연교 이후 6월, 정조가 승하하셨다. 정학正學이 바로서면 교화 될 것이라는 명분 아래, 혹는 이열치열 탕평책의 일환으로써 노론을 견제하도록 남인세력을 비호하던 정조가 스러진 것이다. 천주교를 빌미로, 노론벽파와 남인공서파가 합세하여 남인 신서파를 향한 반격을 본격화하였다. 그리고 1801년, 신유사옥이 일어났다. 이승훈, 주문모, 강완숙, 정약종 등을 비롯하여 천주교인 300여명이 처형당했고, 이와 함께 조선 계몽의 등불을 밝혀 나가던 정약용을 포함한 신서파 내의 쟁쟁한 인물들 또한 서교를 빌미로 모조리 숙청 혹은 잘려나갔다. 노론을 위시한 정순왕후의 대리청정이 시작되었고, 이는 곧 정조의 죽음이 본격적인 천주교 박해사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조선 계몽의 불꽃을 완전히 꺼뜨리는 조선 추락사가 되기도 하였다는 것을 의미했다. 관련한 모든 것들이 비참하고 초라하게 나동그라졌으니 정약용의 삶 또한 중앙으로부터 내쳐져 언제 목숨이 끊길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으로 떨어졌다.
4. 다산 사상 : 공부 정리
다산의 사상을 말하기에 앞서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천주실의는 선교를 목적으로 중국에 들어간 예수회 신부 마테오리치가 쓴 책으로, 그가 교우하던 이들과의 담화를 옮긴 책이다. 이 책에서 마테오리치는 중국의 경서에 나오는 상제上帝라는, 무엇이라 정의되지 않은 ‘하늘님’을 인격신이자 유일신인 天主로 해석하였다. 상제를 천주교의 하느님과 같은 존재로 상정하면서7) 유교를 보유補遺하는 보유론적 저술을 한 것이다. 이 책이 조선으로 넘어가 실학자들에게 읽혔다. 1779년 남인들의 주어사 강학모임에도 천주실의가 있었다. ‘현지문화를 존중하고 내재적으로 접근8)’하면서 유교를 보유하는 서교라면, 받아들이는 것에 큰 저항감이 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더욱이 당시 남인의 학풍이 고문을 중시하여 주자 이전 공맹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창하던 시기였다는 점을 봤을 때 ‘이미 관념화, 권세화 되어 실생활에 도움을 주기 어렵다고 판단되었던 당대의 성리학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뒷받침하는 논리로써 사용하기에도 적절9)’했을 것이다. 중용강독에서 쓰인 답안과 같이 다산 정약용은 천주실의의 논리를 받아들인다. 이에 다산의 경학사상은 당시 조선에서 성리학으로 꽃피워 열매를 맺은 주자의 신유학에 대한 싸움으로도 이어진다. 천즉리天則理를 말하는 주자와 달리 다산은 천즉상제天則上宰라고 한다. 천에 대한 인식부터가 전면적으로 다르다. 주자가 천을 인격 없는 리로 봤다면, 다산은 인격이 부여 된 상제로 본 것이다. 또한 理가 인간에 전화된 性에 이미 사덕四德(仁義禮智)이 들어 있어 四端이 그 단서라고 말하는 주자를 반박하는데, 인간에겐 사단四端만이 있어 공부를 열심히 하여 이를 갈고 닦았을 때, 마침내 사덕四德이 생겨난다라는 것으로, 주자학(송명리학)이 모든 사물(인간을 포함하여)을 리로써 설명하였다면 다산은 ‘인간의 실존적 노력’을 인정하면서 다른 사물(동물)과 인간을 차별화한 것이다.10)
다만, 한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서학에서 더 나아가 서교를 받아들이고, 이를 이용해 기존 성리학과 차별화 된 사상을 말하기도 한 다산이지만, 효孝에 대한 입장은 천주교와 합류하기 어려웠던 듯 싶다. 그가 효제를 근본으로 공부하던 이였다는 점과 저술한 책의 상당부분이 제례에 관한 책이었다는 점에서도, 어느모로 보나 다산에게서 유학자로서의 운신을 빼앗을 수는 없어 보인다.
5. 다시, 不信降監者, 必無以愼其獨矣로
‘不信降監者 必無以愼其獨矣’가 쓰여 있는 중용자잠中庸自箴이 나온 연도는 1814년경(정약용_54세)이다. 그가 유배지에서 생활한지 10여년을 훌쩍 넘긴 해였다. 군신의 연을 맺은 정조가 승하하시고, 가족과 떨어져 지낸 세월이 그만큼이었다. 사방의 인륜이 사라진 유배지. 그곳에서 홀로 일상을 보내야 했던 다산에게 어쩌면 강감하시는 신은 그의 신독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라는 식으로 쉽게 사유가 흐른다. 하지만 단박 이해되는 듯 하다가도 이렇게 내려질 결론은 아니었다. 책을 통해 만난 다산 정약용, 혹은 다산의 공부는 그렇게 만만하게 말 해질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중용자잠이 중용을 해석하여 스스로 경계삼아 수행할 목적으로 쓰여졌다는 것과 더불어, 다산이 마테오리치의 내재적, 보유론적 입장을 매개로 하여 천주학을 접했다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공부하는 정신이 정약용이였다는 사실을 간과했을 때에나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다산이 말한 강감하신 신과 그에 따른 신독의 차원은 어떤 지경이었을까?? ‘지상에 유배된 천사의 날개짓11)’라고도 하는 상상력을 한껏 부풀려 풀어놔 보아도 다산이 닿은 곳이 어디쯤일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하지만 배움이란 것이 ‘사실과 사물을 추상적으로 포장한 명사들을 주워 담는 것이 아니라 만남 속에 계시되는 무한한 가능성에 내 몸을 던져 엉켜 보는 것12)’이라는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다산을 배워 알고자 하기에, 짧은 자신의 공부를 탓하기 보다는 정약용과의 만남 속에 계시 된 무한한 가능성의 경우를 살펴 상상해 본다.
정약용은 유교라는 학문을 바탕으로 수신修身하는 공부를 한 이였다. 그리고 이를 보완하는 새로운 신학新學/神學을 수용한 이 이기도 하였고,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중앙으로부터 밀려난 이 이기도 하였다. 이 세 지점을 살펴 생각이 고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려 본다. 수신하는 공부를 한 정약용은, 자신의 공부하는 몸, 혹은 공부를 이룬 몸으로 신학을 받아들였기에 더 멀리, 더 길게 걸어 나아간 인물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꼬리를 문다. 또한, 중앙으로부터 밀려난 상황 덕분으로, 더욱 흐릿해진 이데올로기와 차꼬 같던 권력의 저울추로부터 해방되어 지원행방智圓行方하는 정신의 도야를 이룬 인물이 아니었을까 개연성을 따져본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 다시 말해본다면, 정약용의 이 말(신독)은 자신을 키워낸 토대(유교)를 허물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길(유교+서교)을 냈기에 가능한 경우境遇가 아니었을까? 라고도 물을 수 있을 듯 싶다. 또 다시 말해본다면, 유교와 서교를 대척점으로 배치하지 않았기에 이미 정신과 영혼을 둘로 보지 않는 지경으로 나아갈 수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라고 할 수도 있을 듯 싶다.
지척에 있는 타자를 아는 것에도 한계가 있고, 그 닿음에 어긋남이 있기 마련이다. 하물며, 지금으로부터 기백년 전의 남성이 개화시킨 정신의 장場에 가 닿아 잠시, 함께, 걸을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자명한 명사적 사실들을 들추어 상황을 유추하고 가장 탁월한 정신의 매개로서 정신을 응집시켜 놓은 그의 텍스트에 접속을 시도할 뿐이다.
큰 정신은 다투지 않는다. ‘통합하고 화和하게 만드는 것이 정신의 특이점’이라고도 배웠다. ‘가을이 깊으면 열매가 떨어지고, 물이 흐르면 도랑이 이루어짐은 그 이치가 그러한 것이다.13)’라고 했듯, 일상이 곧 공부였던 다산이기에 빚어낼 수 있었던 말 ‘不信降監者, 必無以愼其獨矣’을 가만히 응시함으로 그가 이룬 정신의 결절에 다가서 본다. (홀로 있음에 삼갔을 정약용의 신독愼獨을 못내 궁금해 하면서.)
1) 정민, 『파란』, 천년의 상상, 2019, 172쪽
2) 정민, 『파란』, 천년의 상상, 2019, 1,2권
3) 정조가 『중용』에 대해 내린 일흔 가지 질문 중 두 번째는 이와 기의 선후에 대한 율곡과 퇴계의 주장을 짧게 인용한 뒤, 어느 것이 맞는지 적확한 의론을 듣고 싶다는 것이었다. 다산의 대답은 이랬다. 조금 풀어서 옮긴다. ‘신은 사단을 이에 넣고, 칠정을 기에 두는 이분법적 사고에 오래 의문을 품어왔습니다. 만약 이런저런 주장에 얽매지 않고 선입견 없이 본다면 쉽게 따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기란 자유지물自有之物, 즉 제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고, 이란 의부지품依附之品, 곧 실재에 기대어서만 드러나는 개념적인 것입니다. 의부지품은 반드시 자유지물에 기대야만 합니다. 실재가 있은 뒤에 개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하지만 다산의 이 생각은 바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천주실의에서 마테오리치는 ‘대저 사물의 종류에는 두 가지가 있지요. 자립하는 것自立者과 기대는 것依賴者이 그것입니다. 천지와 사람, 조수鳥獸와 초목 등 다른 것에 힘입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자립지품自立之品이고, 다른 물건에 의탁하여 개념을 이루는 오상五常이나 칠정 같은 것은 의뢰지품依賴之品이 됩니다’(정민, 『파란』, 천년의 상상, 2019, 1권, 164 ~165쪽)
4) 반회사건은 이승훈·정약용 등이 과거공부를 핑계로 성균관 근처 마을 반촌에서 천주교 서적을 공부하다 같은 남인인 유생 이기경(李基慶)에게 발각·폭로된 사건이다(이만채 편 1984)이 사건으로 서학은 어전회의 등 주요한 공론장의 중심적인 문제로 다루어지게 되었다. 당시 이기경은 이승훈·정약용과의 개인적 감정과 천주교의 제사폐지 문제에 대한 충격 등으로 이 사실을 고변하였다.(박현모, 『정치가 정조』, 푸른역사, 2005, 192쪽)
5) 예수회 선교사가 동양의 제례를 문화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마테오리치의 영향이 컸다. 처음 중국에 천주교를 선교한 예수회 신부 마테오리치는 “중국인의 제조祭祖와 경공敬孔은 같은 맥락이다. 제례는 그들의 은혜에 대한 존경의 염을 표시하는 것이며 생전처럼 그들을 기념하는 것뿐이다. 이것은 민간 예전禮典일 뿐이지 종교적 차원에서의 우상숭배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중국사회가 갖는 하나의 예절로서 기독교는 응당 허용을 하여야 한다. (서방에서 온 현자, 빈센트 크로닌 235p)”는 입장이었다.
6) 『파란』의 저자 정민은 책의 139쪽에서 다산이 쓴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 쓰인 ‘용역문지 鏞亦聞之’라는 말을 ‘한영익이 이석에게 고발하는 내용을 자신도 같은 자리에서 함께 들었다는 말이다. 이석은 다산의 큰형님 정약현의 처남이었다. 화급한 상황에서 교회 측에 주 신부를 빨리 피신시키라고 알려준 것은 정황상 다산일 수밖에 없다’라고 말한다.
7) 상제가 천주가 되는 예를 천주실의에서 찾아보자면 이렇다. “第三十二, 「表記」, 913쪽 또 「탕고」湯誥에서 말했습니다. 위대한 하느님(上帝)께서는 이 땅의 백성들에게 올바른 마음을 내려 주셨고 언제나 변치 않을 사람의 본성을 다르게 하였다.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법도를 제정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임금이다.” 「금등」金滕에서 주공周公이 말했습니다. “무왕은 마침내 하느님(상제)의 조정에서 명을 받아 천하의 백성을 다스리고 돌보았다.” 하느님(상제)께서 조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곧 ‘푸른 하늘’蒼天을 하느님(상제)이라고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옛날 경서들을 살펴보면, 하느님(上帝)과 천주는 단지 이름만 다를 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천주실의 마테오리치, 서울대학교출판부 102~103쪽)
8) 박현모, 『정치가 정조』, 푸른역사, 2001, 205쪽)』
9) 2020년 11월 14일 89회 속속 중. 케이선생님
10)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것은 행동과 일로써 이를 실천한 후에야 비로소 그 본뜻을 찾을 수 있으며, 측은(惻隱)이나 수오(羞惡)하는 마음도 안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理)를 말하는 사람이 인의예지를 각각 낱개로 떼어놓고 이것들이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다고 하는데 이건 틀린 것이다. 마음속에 있는 것은 다만 측은이나 수오의 근본일 뿐이니 이것을 인의예지라고 불러서는 안된다.(정약용,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박석무편역, 창비114~115>
11) 케이선생님, 『철학과 상상력』, 시간과 공간사, 1996, 34쪽
12) 케이선생님, 『철학과 상상력』, 시간과 공간사, 1996, 100쪽
13) 정약용,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창비, 2016, 29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