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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emotion)가 자란다

 

    감정을 날씨에 비유한다면 정서는 기후와 같은 것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날씨는 변화하지만 그 변화의 패턴은 기후에 의존한다. 일시적인 감정 발생의 반경과 진폭에 간여하는 힘으로 정서를 주목하게 된 것은 정서가 흔들리며 위축, 경직되었던 경험 그리고 정서가 또 다른 주체인 듯 생활에 행사하는 힘 때문이었다. 문제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감각한 정서는 사념이나 생각과 같은 내용들 보다 더 깊게 몸과 유착된 경향성이었고, 에고처럼 구조화되어 내용에 방향을 부여하는 집요한 틀과 같았다. 공부의 틀을 허무는 정서의 누수, 관계의 형식을 위협하는 정서의 범람, 사태의 인식을 방해하는 정서의 왜곡에 무력하고 무능한 자리가 아직 내게 있다.

  

1. ‘정서(情緖)’에 관해 유통되는 지식을 살펴보기로 한다. 학계는 어떻게 정서를 정의해 왔는가? 먼저 상담학*에서 합의된 정의를 살펴보자. 정서(emotion)주관적 경험, 표출된 행동, 신경화학적 활동이 종합된 신체적 · 생리적 반응을 동반한 지속적인 감정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정서란 생리적 각성, 표현적 행동, 그리고 사고와 감정을 포함한 의식적 경험의 혼합체이며 우리의 생존을 증진시키기 위해 존재하고 인간 내부에서 진행되는 일시적인 혹은 장기적인 느낌이나 감정이라는 것이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정서를 생리적 각성, 표현 행동 그리고 의식 경험을 수반하는 유기체의 반응으로 개념화하고 있다. 이런 중의적인 정의는 공통의 기초를 세워 다음 연구를 예비하는데, 정서 연구자들은 사고(인지)와 감정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신체 각성이 정서적 감정에 앞서 나타나는지 뒤따르는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이론을 제시하였다. 역사적인 정서 이론들은 다음의 5가지로 요약된다. **

 

이론

설명 

윌리엄 제임스-       랑게

각성이 정서에 선행한다.

(나의 공포감이 신체반응에 뒤따른다)

우리가 울기 때문에 슬프고, 때리기 때문에 화가 나며, 떨기 때문에 무서움을 느낀다 

캐넌-바드

 각성과 정서는 동시에 발생한다.

(내가 공포를 경험할 때 심장도 쿵쾅거리기 시작한다. 정서유발 자극은 교감신경계로 전달되어 신체 각성을 유발한다. 이와 동시에 두뇌피질로 전달되어 정서의 주관적 자각으로 이끌어간다)

*오늘날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정서가 인지를 수반한다는 사실에 동의

샥터-싱어

 각성 + 이름 붙이기 = 정서

정서 경험은 두 요인, 즉 일반적 각성과 의식적 인지 평가에 달려있다. 정서유발 자극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름 붙이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정서를 경험할 수 있다.

제이온스,

르두

정서반응은 두 가지 상이한 두뇌 회로를 경유한다.

증오나 사랑과 같이 상대적으로 복잡한 정서는 시상을 거쳐 두뇌피질로 전달되고, 피질에서 자극을 분석하고

이름을 붙인 다음에 반응 명령을 정서 제어 중추인 편도체를 경유하여 신체로 내려 보낸다.

그러나 좋고 싫음, 공포와 같이 단순한 정서는 피질을 우회하는 신경 지름길을 택한다. 피질을 우회하는 신속한 지름길은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반사처럼 일어난다.

리처드

라자루스

우리의 기억과 기대 해석이 감정에 영향을 미치고, 평가할 때 정서가 발생한다. 특히 매우 정서적인 사람은 해석으로 인해서 강렬한 정서를 가지게 된다.


리처드 라자루스의 설명을 조금 더 따라가 보면, 그는 대부분의 정서가 자동적이고 신속한 아랫길을 통해서 작동하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상황을 평가한다는 것, 미처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평가라는 인지적 작용으로부터 정서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뱀을 보고 반사적으로 공포 정서가 일어날 때 뱀에 대한 공포 기억과 인지적 처리가 이미 그 정서에 간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대상에 대한 () 인지화작업이 정서를 새롭게 구성하고 갈무리하는 매개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과거의 기억과 평가가 정서 경험의 토대가 되는 지점에서, 현재 상황과 자신이 가진 자원을 재() 인지(평가) 하고 대상관계에 반영한다면, 특정 정서(공포)로만 몰 밀려가지 않을뿐더러 사태를 해결하는 적절한 정서 반응을 획득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뱀을 앞에 두고는 약간의 혐오 정서로 회피하여 가볍게 처리하는 것이 적절할 수 있지만, 정서의 누수가 일어나는 일상의 크고 작은 자극에 대한 재() 인지화의 노동은 과거 혹은 몸에 고착된 정서를 얼마간 풀어낼 수 있어 보인다.

다른 것, 변화한 것을 보고도 똑같이 반응하는 무차별화 전략은 응하기의 실천을 훼파할 뿐 아니라, 자신과 대상을 물화(Verdinglichung) 시킨다. 그러니 라자루스의 설명을 참고삼아, “낮은 중심을 축으로한편에서는 과거에 고착된 정서 반응을 유예시키고 다른 한쪽에서는 지금 이곳의 사태에 맞는 정서를 다시금 물을 수 있겠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보는 연극적 실천으로써 일방향 된 정서에 다른 길을 낼 수 있지 않을까. 사고(思考)의 윗길을 통해서 정서가 합리적 현명(賢明)을 얻는 작업, 어느 한 순간이라도 말이다.

 

2. 딸아이가 같은 반 여자 친구에 대해서 말하기를 걔는 툭하면 울어라고 했다. 순간 불편한 정서가 올라오며 그 여자아이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툭하며라는 평가적 표현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했지만, 한편, ‘운다라는 반응 양식을 전수하고 있는 여성의 역사를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작은 독서 모임에서 한 여성이 토로했던 문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남편에게 화가 나거나 기분이 상하는 일이 있을 때 말을 해야 하는데 눈물이 먼저 나온다고 한다. 눈물에 막혀서 말을 못 하는 자신에 대한 우울과 답답함이 있었다. 내게도 어떤 관계 어떤 순간, ‘말을 막는 정서가 있다.

여러 국가에서 반복적으로 수행한 연구들에 의하면, 국가마다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감정에 더 개방적이었다고 한다. ‘여성은 더 자주 우울하고 더 자주 기뻐한다라는 말도 있다. 여성의 정서적 개방성은 그 여자는 감정적이야라는 식으로 사회적 능력 평가에서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친밀성의 전문가’(앤서니 기든스)라는 맥락에서 달리 평가받기도 한다.

짐멜(Georg Simmel)여성문화와 남성문화라는 책에서, 여성적 존재 방식을 ‘fidelity’***라는 단어로 설명한다. ‘fidelity’충실함혹은 신의로 번역되는데, 그에 의하면 전문화/분업화를 요구하는 문화에서 내세우는 분화객관성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 하나의 관심이나 기분, 경험도 인격의 전체성과 무조건으로 결합시키며, 일시적인 관계조차 자신의 존재 전체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경험하는 존재 방식이었다. 반면 남성은 자신의 인격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에너지를 일직선 방향으로 흐르게 하는 기회를 더 많이 갖는다고 한다. 이것은 분화된 행위를 객관적인 입장, 즉 자기의 주관적인 삶과는 분리되는 것으로 경험하기 때문이다. 즉 남성이 처한 관계로부터 자신의 전체 인격을 분리시킬 수 있다면, 여성은 그러한 분리를 단일적인 인격이 희생되는 경험으로 체험한다. 그렇게 여성적 존재 방식은 구체적이고 관계적이며 유기적이고 구성적인 경향으로 기울 수 있고, 아무래도 분리와 분화라는 합리적 정서 처리 기술에 합의하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개인차와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가 있겠지만 짐멜이 설명하고 있는 여성적 존재 방식은, 분절하고 분류하며 추상화하는 정신문화와도 어긋난다또한 다선적으로 에너지가 흐르는 여성의 존재 방식은 전문화/분업화된 문화에서 충분히 대접받지 못한 채 생산성 혹은 효율성의 잣대로 폄하되기도 쉽다. 이 대목, 그러니까 여성적인 존재 방식이 기존의 문화와 어긋나는 지점에서 여성에게 특유한 정서적 버성김이 생겨났다고 헤아려 볼 수 있지 않을까. 한 개인의 기질로만 귀인 할 수 없는 구조적인 어긋남이 여성의 정서와 그 표현 방식을 굴절시킨다. 한편 슬픔이나 서러움, 억울함과 우울, 혐오와 분노 등으로 맺힌 말을 막는 정서라는 것이 얼핏 여성에게 타자였던 언어에 대한 무능 혹은 불신, 저항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기존 질서와 어긋나는 존재가 스스로를 갱신하며 나아가야 할 지점은 어디일까?

일단 주체화는 자기 동일화(거울 단계)에 침입하는 타자 곧 언어를 통해서 생성된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라캉(Jacques Lacan)의 설명에 의하면 여성도, 남성도, 타자(언어)를 통하여 주체화된다. 그러니 말을 묵히고 기다릴 수는 있어도, 처음부터 언어를 거부하며 주체화하는 길은 없다. 이 사실을 굄돌 삼아 우선 정서를 잘 표현하고, 정서를 키우며, 정서를 이기는 새 말을 배우고 생성시켜야 하지 않을까. 그러한 노동을 피할 수 없다. 일시적으로 자기 정서와 동일시되어 언어 없이 정서만 있는 상태로 퇴행했더라도, 피해자나 약자가 아닌 주체가 되길 원한다면, 압도하는 정서일수록 말을 부여하도록 거듭 애써야 하는 것이다.

 

3. 처음부터 정서라는 말에 주목했던 것은 아니다. 그간의 공부는 마음을 말하지 않는 것으로 감정, 변덕, 호오(好惡)에 대한 경계의 수준에서 이야기되었다. 그러다 사적 정서와 표상 그리고 개념에 대해 공부하며 처음으로 정서(emotion)라는 말을 의식했던 것 같다. 사적 정서(쾌락)에 얹힌 표상적 인식은 개념의 세계와 구별되었는데, 사적 언어와 달리 정신의 길을 내는 개념은 다른 힘이었다. 광활한 개념의 세계를 만날 때면 맺힌 정서가 기꺼이 관심 밖으로 물러났고 어떤 거대한 정신의 운동성에 초대되곤 했다. 또 생활에서 빚어진 몇 순간도 내 사적 정서를 문제시하게 했다. 일상에서 일삼는 짐작이라는 것도 사적 정서에 얹힌 손쉬운 표상일지 모른다. 욕망과 상처, 사적 정서에 얹혀 충실하게 짐작했는데 이 짐작이 완벽한 오해의 구조라는 것이 타자에 의해 개시되었다. 위태로웠지만 타자()의 은총을 입은 순간이었다. 사적 정서는 과거의 경험과 상처의 기억 등을 매개로 형성되기 때문에 사태에 대한 학인다운 접근을 막는다. 일본을 공부할 때도 정서적 저항이 문제시되었다. 미워하고 좋아한다, 가 아니라 배운다의 태도로 낮아지려는 학인은 어떤 정서를 모른 체하기로 옮겨 놓아야 하며, 어떤 정서를 씻고 들어가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정서를 드러내고 부리는 한국적인 태도에 관해서도.

두 번째, 공부는 어떤 감각이 살아나는 과정이기도 해서 사람에 따라 격렬하게 정서를 겪기도 하는 것 같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정서에 휘둘리고 생활이 흔들리며 공부 길에서 정서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질문하게 되었다. 공부한다는 것은 몸에 눈()이 많아지는 것이라고 배웠는데, 몸의 억압이 풀리고 섬세하거나 예민한 감각이 돋아나며 벼려지는 도상에 있는 것이다. 긴절하게 응할 수 있는 섬모가 생기는 일이지만 자칫 섬세해진 감각에 정서가 압도당하거나 함몰될 위기의 순간이 생기기도 한다. 전보다 더 괴롭고 혼란스럽고 배회하고 시름할 수 있다. 그중 어떤 괴로움은 진실에 접근하려는 공부 길에서 필연적으로 치러야 할 정서적 비용으로 이해하고 있다. 증상이나 구조가 허물어질 때 수반되는 신체적, 정신적, 정서적 고통 같은 것 말이다. 이런 비용은 지불해야 하므로, 별수 없이 견딜 수 있는 체력을 평소에 단련해야 한다.

세 번째는 불천노(不遷怒)’라는 말로부터 생긴 관심이었다. 이 명제는 옮기고 전염되는 모방적 조건을 드러낸다. ‘화를 옮기지 않는다.(不遷怒)’ 그러나 우리는 화뿐 아니라 웃음에서부터 하품, 우울과 기쁨까지 쉬 전염되고 모방하는 존재들이다. 그런 인간성으로 번져나가는 정서의 연대와 가깝게 있었다. 존재를 보호하고 돕는 연대가 있지만 그와 반대로 흐르는 정서의 연대도 있다. 르네 지라르는 대화의 기회를 박탈하고 지목하는 갈등 해결의 구조가 문화의 초석이라고 했고 그 현상은 흔하고 집요하다. 그는 희생양에 가담하는 어떤 웃음, ‘웃은 죄를 가파르게 캐치하기도 한다. 그렇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희생시키고 지목하려는 내가 속한 어떤 진실을 마주하며, ‘희생양에게 분노하는 정서(박해자)’박해자를 원망하는 정서(희생양)’를 꺾고, 할 수 있다면 가담하지 않는 정서(개종자)’를 배우고 싶었다. 전염되는 원망, 분노, 혼돈과 오해를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은 정서에 대한 다른 배치를 요구한다.


매사 실력(實力)을 키우는 게 시작이다. 생활은 제 실력으로 충실해지는 것이다.

실력으로 충실해지는 실존의 어떤 깊이 속에서는 자유의 길까지 길어낼 수 있다.” (선생님 블로그 글)



    이번 글을 통해서 나는 여성으로, 학인으로, ‘정서가 문제시된 지점을 살피고자 했다. 합의된 정의나 정서 이론을 살폈던 것은 주관적인 경험을 보완할 객관화된 기반을 얻고 싶어서였다. 인지적 사고 과정이 정서에 개입한다는 설명을 접하며 정서의 경직과 고착을 풀어낼 작은 틈을 생각해 보기도 했다. 한편, ‘여성적 존재 양식으로 여성적 정서 경험의 특수성을 이해하고자 했다. 합리적 의사소통을 막는 정서의 범람과 어떤 울음의 연합은 여성적 반응이기는 하다. 그러나 기질로만 귀인 될 수 없는 정서의 굴절을 헤아리고 싶었고 스스로 문제화 하고 싶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간 공부하며 주목하게 된 정서의 문제와 변화의 요청을 되짚어 보았다.

정서가 자란다.” 지난 보속 공부 중에 선생님께서 알려주셨다. 자라나는 정신, 자라나는 깜냥, 언어가 자라고 존재가 자라는 공부의 활동을 알지만, 정서도, 자란다. 반갑고 기쁜 소식이다. 과연 인류의 성인들은 어떤 정서를 갖고 있었을까? 공자가 말하는 와 싯다르타나 예수의 는 어떤 형태로 드러났을까? 실력으로 정화된 시간()을 입고 익어() 결실된 정서란 어떤 것일까? 상처의 기억이나 에고의 자기중심성과 절연한 내면은 어떤 시선, 어떤 표정으로 표현될까? 성인(聖人)들이 열어낸 정신 혹은 정서의 도약과 변환을 바라볼 수라도있는 베이스캠프(base camp), 차마 도달할 수 있을까?

시간을 붙안고 길게 걷는 걸음 속에서 차츰 존재를 키우는 새 버릇과 말을 얻고, 조금씩 나아지고 조금씩 자라날 것을 믿는다. 정서가 자란다!

 

 

*김춘경 공저, 『상담학 사전』, 학지사, 2016.

**Myers, DeWall, 마이어스의 심리학 개론11, 신현정 김비아, 시그마프레스, 2016, 254.

***게오르그 짐멜, 여성문화와 남성문화』, 김희, 이화문고, 1993,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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