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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공부의 빛

프로파일 만석꾼 ・ 2022. 9. 25. 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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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여 경(영산성지고 미술교사)

오랫동안 인연을 맺고 섬기던 철학자 김영민 선생의 신간소식을 들었다. <적은 생활, 작은 철학, 낮은 공부>(늘봄, 2022). 독창적인 사유와 글쓰기, 최근에는 ‘시인’으로 등단하셨다. 평생 후학들과 어울려 공부해 오셨고, 지금도 서울과 천안을 오가며 ‘인문학 공동체’이자 ‘대안대학’을 꾸리고 계신 선생의 글을 읽다 보니 오늘날 내 공부와 삶의 자리는 어찌 융통하는지 스스로 묻게 된다.

학교에서 내가 맡고 있는 역할은 크게 네 가지로, 미술교사, 1학년 담임, 여기숙사 사감, 교직원들이 분담하는 담당업무(-올해는 안전/봉사)인데, 개인적으로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교육과정은 저 기능적인 분류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는, ‘대화공동체 만들기’이다.

직업위탁생을 제외하고 50명 남짓한 전교생은, 무지개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넓은 스펙트럼(MBTI 성격유형만 하더라도 16가지가 아닌가!) 속에 각자의 좌표로 존재하며, 거기에 내 인품과 안목이 변수로, 빡빡한 학교 일과가 상수로 작용하니, ‘대화와 만남’이란 인문학적 주제가 학교에서 실현되기란 실로 ‘언 발에 오줌누기’처럼 임시적이거나 일시적일 뿐이다.

그간 나와 가까이 지냈던 미술부원들을 돌이켜보아도, 기질과 성격이 다르고, 세부적인 진로와 관심도 다르며, 무엇보다 ‘대화의 기술’면에서 천차만별인지라, 교사에 대한 기대나 선호하는 교사상 또한 다양했다. 겨우 올해 처음으로, 그것도 금요일 4교시 딱 1시간 동안 허락되는 ‘미술동아리’ 시간을 이용하여, 그동안 구상해 왔던 ‘대화공동체’와 유사한 형식과 내용을 꾸리는데 성공하였다.

최근 장안에 떠돌았던 ‘심심한 사과’ 논란을 두고, 대부분은 젊은 세대의 문해력과 어휘력 부족을, 또는 지나치게 가난한 독서 이력을 문제 삼았고, 혹자는 주로 쓰는 어휘와 관용구마저 상호 소외를 이루고 있는 ‘세대 단절’을 문제 삼았지만, ‘학교’란 장을 매개로 10대를 만나고 있는 나로선, 두 가지를 덧붙여 말하고 싶다. ‘반지성주의’와 ‘생산적 권위의 부재’.

다시 말하자면, 스마트폰이 일상 속으로 들어오고, 소셜미디어가 중요한 소통 양식이 되던 2000년대 후반부터 슬슬 목격되던 ‘반지성주의’의 심화와, ‘도무지 좋아하고 존경할만한 어른이 주변에 없다’는 사실 말이다. ‘진지충’이란 비하가 대표적인데, 어차피 경쟁이 사라지지 않고, 성공의 문은 점점 좁아진 저성장시대라 미래가 밝지도 않으니, 잠깐이라도 즐겁고 유쾌하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태도는, 이해할 수는 있지만 바람직한 것은 아닌데, 이 대목을 환기하는 나는 언제나 ‘꼰대’ 취급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내가 만나는 학생들이 ‘진지함/집중’이란 미덕을 경험하도록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그것이 나의 오랜 고민이었다.

한편, 아이들의 시선에서 필요한 위로와 응원을 해주고, 속 깊은 고민을 나눌 수 있으며, 당장 겪고 있는 문제해결에 적절한 조언을 주는, 그런 어른이 드물다는 것. 단 한 번도 무릎 꿇고 섬길만한 ‘생산적 권위’를 접해보지 못했다는 것. 부모님, 중고등교사, 대학의 선배, 교수, 직장의 상사 중에서도 찾기 어려운 이 생산적 권위의 실종은, 결국 아이들로 하여금 유명한 인플루언서(influencer)나 연예인(celebrities) 말고는 모두 별 볼 일 없는 인생이라는 편협한 인간 이해에서 멀리 가기 어렵게 만든다.

그리하여 ‘요즘 아이들’과 몇 년을 지내며 내가 내린 결론은, “내가 아이들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나를 선택한다”는 소박한 사실이었다. 내가 학생들을 압도할만한 생산적 권위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하고, 그 어떤 학생도 무시하거나 정서적으로 홀대하지 않고 모두를 존중하고자 애쓰다 보니, 가뭄에 콩 나듯, 가만히 곁에 와서 앉아주는 아이들이 생겼다. (물론, 다른 교실에서 버려진 소파를 냉큼 주워다 미술실 내 책상 옆에 놓아둔 ‘장소화 노동’도 한몫하였다)

해마다 ‘요 녀석이 이런 재능이 있어 보이는데 잘 좀 키워 보자’고 나름 의욕이 생기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욕심만큼 따라 주는 경우는 드물었고,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 하고픈 대로 뻗어갈 뿐이었다. 일대일을 넘어선 대화의 장을 만들기는 더욱 요원하였다. 그러니 이 소박한 ‘대화공동체 형성’이란 작은 기적은, 어디까지나 구성원들이 나의 말을 잘 따라주었고, 운 좋게 나를 좋아해 주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없는 셈이다.

미술동아리 시간에 하는 일은 ‘대화’이다. 단편소설이나 신문 사설, 때로는 노래 가사나 뮤직비디오가 텍스트 구실을 하긴 하나, 그것은 그저 ‘매개’일 뿐이고, 나의 주된 관심은 학생들과의 ‘대화’에 있다.

지난 시간에는, 내가 미리 복사하여 준비한 문학평론가 김명인 교수의 한겨레 칼럼, ‘20세기 선진국과 21세기 선진국’을 5명이 돌아가며 한 문단씩 낭독하였다. 읽은 사람으로 하여금 문단의 요지를 파악하여 말해 보도록 하고, “다 같은 한국어 사용자이지만, 글 쓰고 말하는 수준과 격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도록 안내하였다. 다 읽고 음미한 후에는, 해당 사설의 삽화를 함께 감상하고, ‘이 기사를 읽고 떠오르는 이미지를 검색하여 발표해 보자’고 제안하였다. 손으로 그리거나 표현하는 것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부담스럽기 때문에 휴대폰을 이용한 ‘편집과 색인’이라는 방식을 도입해보았다.

답답한 기숙학교 생활에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K는, 다짜고짜 학교 전경이 찍힌 사진을 들이밀며, ‘여전히 19세기 ~ 20세기에 머물러 있는 우리 학교’라 주장하였고, 남아공 출신 E는, 침대 밑의 악마가 아이를 괴롭히러 왔다가 악몽에 시달리는 아이를 보고는 되려 “She has other monsters to deal with right now”라고 말하는 웹툰의 한 장면을 보여 주었다. 어느 시대/어느 세대나 저마다의 고통과 괴로움이 있으며, 누구도 어느 쪽이 더 무겁다고 쉽게 말할 수 없다는 뜻을 서툰 한국말로 피력하였다. 지극히 포스트모던적인 견해였다. 말수가 극히 적은 1학년 H는, 평소 한국사회에 통용되는 타인에 대한 지나친 오지랖이 늘 스트레스였는지, 관련한 컷 만화를 네이버에서 검색하기도 하였다. 21세기에는 좀, 덜 간섭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표하면서.


20세기에 태어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나는, 내가 교육받은 가치의 무게중심이 그러했으므로, 근대적 가치/모더니즘에 아무래도 친화적일 수밖에 없는데,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간과해도 좋을 개인의 고통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타인의 고통은 애써 배워야 비로소 아는 것이라는 말이 있듯, 그들이 겪는 고통 중 어떤 대목은 어느 세대나 사춘기 시절 겪는 것이지만, 어떤 대목은 분명 이 시대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것임을 조금씩 배워간다. 유행이 돌고 도는 것이라지만, 엄마 옷장 속의 나팔바지를 오늘날 그대로 꺼내 입을 수 없는 것처럼, 어딘가 모르게 나의 경험과 날카롭게 갈라지는 지점이 느껴지는데 그런 대목들은 대화 없이는 결코 헤아릴 수 없는 지점들이다.

이념도, 선배도, 선생도 드물어진 시대에, 자기구원과 이웃돕기라는 인간의 책무는 선명하지만, 도달할 길도 목적의식도 희미해 보이는 이 시대에, 좋은 책을 함께 읽고, 주변을 정돈하여 격을 갖추고, “앎의 권리원천이 삶”(김영민)에 있음을 잊지 않으며 함께 응하여 말했던 여러 좋은 동무와 선생과의 공부는, 오늘도 전남 영광의 한 대안고등학교의 수업시간에 소박한 빛으로 낮게, 짧게 이어지고 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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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찔레신 2022.09.30 08:37
    *사여경씨는 옛 <장주> 시절, 내게 와서 공부하며 갖은 일을 감당했던 학인인데, 지금은 영광 지역에서 특수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원불교 성직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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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30 09:23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으리라는 걸 한문장을 읽어내려 가면서 벌써 알게 되었습니다.
    스마트폰의 등장과 문명의 발달로 쉽고 간단한 것만 추구하는 세상에서 반지성주의에 대한 고뇌를 하는 사여경씨가 안쓰럽기도하고 고맙기도 합니다.

    K선생님의 앎의 권리 원천의 삶의 가르침을 받은 서 선생의 인품이 그 학교의 학생들에게 이모저모로 전달되리라 생각합니다.

  1. <적은 생활...> 서평, 중앙일보 양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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