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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적 삶의 진실

內而

 

속속은 내 생활의 지표다. 때로는 그 지침을 모른 체하고 게으름을 피우며 저항하기도 하지만, 격주마다 돌아오는 속속은 헐거워진 생활을 다시금 다잡아주는 구심점이 된다. 이런 속속에 남모를 쾌락이 하나 있다. 속속의 일과가 끝난 후 찾아오는 차담 시간이 그것이다. 차담 시간에는 속속과는 다른 긴장이 흐른다. 자유로운 대화가 오가는 듯하지만, 잡담으로 흐르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모두 말하지 않으며, 대화를 독점하지 않는다. 소소한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개인적인 경험이나 소회에 머무르지 않고, 이론을 접목해 말함으로써 또 다른 배움과 자득의 계기를 마련해준다. 숙인 각자의 실력이 드러나는 자리이자 응해서 말하기의 현장인 것이다.

지난 속속의 차담 시간은 지린 선배의 판소리 교습 이야기로 시작했다. 지린 선배의 판소리 선생은 판소리를 전공하는 현직 대학생이다. 선생이라고는 하나 아직 어린 학생이었기에, 변덕스러운 심사에 언죽번죽한 태도까지 지린 선배가 신경 써야 할 부분은 배움만이 아니었다. 배움에는 (돈이든, 시간이든, 노력이든) 비용이 들기 마련이지만, 이런 것은 왠지 선생을 잘못 만난 탓에 생긴 가외 비용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가 비극으로 귀결되는 듯하다, 지린 선배의 다음 이야기에 귀가 쏠렸다. 선배의 판소리 선생은, 완창까지 몇 시간에 이르는 길고 긴 심청전을 완벽하게 외우지만, 정작 내용에 해당하는 한문 사설(어려운 한자, 고사, 경전 등)은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내용을 모른 채 어떻게 판소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내용을 모르고 어떻게 애달픈 사연을 전할 수 있단 말인가? 득음의 경지는 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생각에 딸의 눈까지 멀게 한 비정한 판소리꾼의 영화, ‘서편제가 떠오르며, 인지부조화의 상태에 빠져들었다. 한 서린 판소리를 부르는 송화(서편제 여주인공)와 내용도 모른 채 앵무새처럼 따라 외우는 송화를 도무지 같은 사람으로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헤아릴 수 없는 대화가 미궁으로 빠져들 때, 선생님의 질문이 수잔으로 향했다. 선생님께서는 수잔에게 연기할 때 감정을 어떻게 전달하는지 물으셨다. 수잔은 지난 대학로 연극에서 있었던 특별한 경험을 이야기했다. 수백 번 연습으로 외우고 익힌 대사와 연기였지만, 그날의 연기는 좀 달랐다고 했다. 이전과 다른 몰입도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와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고 했다. 상대 배우도 전과 다른 수잔의 연기를 알아채고 인상적이었다는 평을 해주었다고 한다. 한 번의 경험을 정형화하여 말하기는 어렵지만,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신묘한 경험이었다고 했다.

드니 디드로의 배우론으로 수잔의 체득을 설명해볼 수 있다. 디드로는 그의 저서, ‘배우에 관한 역설에서 훌륭한 배우의 자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위대한 배우가 되려면 무엇보다 자기감정에서 벗어나 감각의 지속적인 관찰자가 되고, 역사나 상상력으로부터 자신이 맡은 역할에 대한 이상적 모델을 만들어 그것을 제대로 모방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한다. 결국 자연스러운 연기란 바로 인위적인 기교와 계산이 절정에 달했을 때 나온다.”1)

상황에 대한 이해와 배경지식은 연기에 앞서 필수적인 요소다. 하지만 이러한 앎은 자기감정을 고무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자기감정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한 기제로 삼아야 한다. (‘진실하다여긴) 감정에서 벗어나 알면서 모른 체하는 연극적 실천을 통해 새로운 감정을 개화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배우에게 필요한 자질이라 할 수 있다.

작가 김영하는 그의 산문집, ‘보다에서 진심은 진심으로 전달되지 않는다2)고 주장한다. 진심은 잘 설계된 우회로3), 즉 설득력 있는 서사 구조를 필요로 하고, 이것이 바로 작가가 필요한 이유4)라 말한다. 정신분석을 매개 삼아 이 주장을 좀 더 세밀히 밀고 나가면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다. ‘진심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 설계된 우회로는 진심을 변심시키고 처음 의도와는 다른 진심을 드러낸다.’ 이 주장이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이치는 진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회적인(연극적) 실천이 진심을 만든다는 점이다.

사람을 뜻하는 ‘person’은 가면을 의미하는 ‘persona’에 그 기원을 둔다. 개별화된 현대사회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단독자(individual)’로서의 개인을 인간의 특성으로 삼는 분위기지만, 사람은 본디 사회, 그 관계에 어울리는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자다. 일반적으로 가면은 거짓을 의미하지만, 체화된 가면은 진실일 수 있다. 가면이 피부가 되어, 더 이상 벗을 수 없는 가면이 된 얼굴을 상상해 본다. 내가 쓴 가면이 가 되는 경지, 모방의 대상이 내가 되는 궁극의 연극적 삶은 가장 숭고한 삶의 한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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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드니 디드로, 배우에 관한 역설, 주미사 역, (문학과지성사, 2010), p.8.

2) 김영하, 보다, (문학동네, 2014), p.115.

3) ibid., p.115.

4) ibid., p.116.

  • ?
    지린 2022.09.30 23:27
    나의 첫 소리 선생은 소리를 참 잘했어요.
    그는 그 소리 한 마디, 한 마디가 어디에, 어떻게, "있어"야 하는가를 내게 가르쳐주려고 애를 썼죠,
    (못난 나는 짧은 한문과 한시 실력을 내세우면서, 내용을 공부하는 것으로 한눈을 팔았지요,)
    그 선생의 소리는 십수년을 훈련하여서 그 자리에 가 있게 된 그런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가 흐르는 곳을 내 소리는 쉽게 뒤따라 흐를 수 없었습니다.
    어쩌다 그 선생의 소리가 있는 곳에 내 소리가 한 두 마디 닿는 몇 점의 순간을 경험하였는데,
    몸이 온통 개운했습니다. 기쁨과 환희를 느꼈습니다.
    나는 그렇게 어렵사리, 한 두 번, 그 선생의 소리에 내 소리를 가 닿게 하면서 통기되었어요.
    (나는 지금도 그 경험을 그리워합니다.)
    (나는 자꾸만 내용으로 한눈을 파는 내내 못난 학생이었습니다.)

  1. <적은 생활...> 서평, 중앙일보 양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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