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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2023.01.06.) 속속 별강

 

음식의 유령론을 위한 초고

 

유재

 

0.

 

먹기의 행위는, 혹은 먹는 정신은 신체/몸과 정신/마음의 관계를 체현하거나 수행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음식이란 타자, 대상, 혹은 물질이 아니라 정교하게 선별된 개념들이며, 나아가 한 사람의 먹기 행위를 예술작품화할 수 있는 매체들이다.

 

1.

 

먹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현대 과학은 이미 오래 전에 인간의 소화과정을 가시화, 지도화하여, 그것이 입에서부터 시작하여 직장(항문 바로 직전에 위치한 장의 부분)에 이르기까지 음식을 저작, 혼합, 탄서하고 소화, 흡수, 폐기, 배출하는 활동임을 밝혀내었고 진화생물학의 눈부신 발전은 태초에 단 한 번 일어난 공생(symboisis) 혹은 식세포작용(phagocytosis)모든 생명의 기원임을 밝혀내었다. 사회과학은 또 얼마나 많은 것을 알려주었는가? 사회과학적 분석에 따르면, 먹는 것이란 무엇보다 세계경제체제의 시스템, 혹은 국가권력, 혹은 온건하게 말해서 문화집단세력이 집어삼키도록 명령하는 것을 따르는 것/따를 수밖에 없는 것을 말한다(우리는 이를 자각하지 못하거나 이에 공모할 수도 있다). 누구도 나는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싶은대로 먹는다고 말할 수 없다. 개인이 먹는 형식과 먹는 내용 모두 지극히 정치적이며 그에 대한 지식의 접근성 자체도 정치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지적을 덧붙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음식에 관련된 권력관계를 의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권력은 반드시 하나의 억압적인 힘이 아니라 사회적 삶의 모든 차원에서 작동하고 침투하는 하나의 속성으로 고려되어야 한다”(푸코, 54-55). 따라서 먹는다는 것을 다차원의 권력성이 작용하여 복합적으로 구성된 행위로서 보고, 거시적, 결정적으로 그 핵심요인을 가려내기보다는 미시적, 구체적으로 그 현실양태를 분석해내는 것이 낫다. 물론, 베버처럼 덧붙이자면 급진적인 비판구조주의자들은 이에 대해 그것은 권력에 대한 자각/저항의식을 약화시킨다고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2.

 

나의 자리에서 다시 묻는다. 먹는다는 것은 실로 무엇일까? 먹는다는 것은 길고 긴 그림자 혹은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유령을 가진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입이 먹는다고 생각하지만 내 몸이 먹는 것이며, 가장 일상적인 자리에 가장 극단적인 폭력성1)이 내재하는 것이며, 어떤 식의 먹기를 지속함으로써 어떤 식의 시스템을, 그리고 나아가 어떤 식의 정신-물질관계를 지속하는 것이다. 먹는다는 것은 일종의 유령론이다. 우리는 우리가 먹을 때 결코 우리가 먹는다고 생각하는 것을 먹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음식은 모두 그것(eat-it)이 아니다. 우리는 음식을 개념화하여 접()할 뿐이며, 우리가 먹는 모든 것은, 우리의 몸 속에서 일종의 주술에 걸린 상태 혹은 일종의 신들린 상태를 만들어낸다. 과학은 이를 인슐린(in-sul-in, 너무도 이상한 이름이 아닌가?)이라 부른다. 사회학은 흥미롭게도 우리는 우리가 먹는 바로 그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자신이 우리가 먹은 그것에 마치 빙의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어느 여성학자는 고고학 연구를 추수하며 농경의 시작은 농경의 산물, 즉 일년생 초본에 인간이 중독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2) 농업의 시작은 곧 인간이 곡식이라는 주술에 걸린 부류라는 것을 말해준다. 실로 곡식은 인간이 시간을 의식하는 방식(그 거대한 순환)과 공간을 사용하는 방식(정착과 땅의 배려)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이토록 철저히 변형시켰다면 약학적 관점에서의 중독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주술성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현대인이 곡식에 관한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은 대략 다음과 같은 변천 때문인 것 같다: (처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결코 알 수 없지만) 역사적으로 우리는 곡식을 추수물을 기반으로 하는 주식(主食)’과 추수물을 발효시키는 ()’로 구분함으로써 음식의 신들림상태를 분할, 안정화시켰으나, 현대에 와서 술이 단순히 기호물로 됨으로써 음식의 신들림상태도 정서적 효과를 내는 데 그친 것 같다. 술이 단순한 알코올로 서서히 변해가는 과정과 동시에 현대의 음식도 영양학적으로 축소되었고 음식은 그 거대한 위험성과 힘과 신비함을 모두 다 상실하고 영양소들의 집합물이 되었다. 이에 따라 현대인들은 그 음식의 성분 혹은 영양소에 대해 안다면, 음식의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음식의 진짜 역사는 조직적으로 소외되어, 우리는 실제 통합체인 음식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음식은 마치 하나의 추상물처럼 마트(mart)’에서 우리에게 제시된다. 음식은 표면만이 남아 있는 일종의 표상이 되었다. 현대인에게 남아 있는 음식의 신들림 상태의 흔적은 오직 그 정서적차원뿐이다. 그렇다, 음식은 우리를 흔들고 기쁘게 하고 슬프게 하고 웃게 하고 또 위무한다.

 

3.

 

우리의 음식 개념을 영양()/보상(마음)의 관계에서 나와 음식의 유령론을 통해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은 음식에의 신들림을 다시 되찾자는 것이 아니다. 지금 와 그러한 것은 일종의 신나는 체험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유령을 찾아가야 한다.

우리 언어의 지혜를 빌리자면, ‘먹다는 것은 먹는 것을 소거해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 음식=먹기=먹는 형식을 동시에 의미한다. 먹는 것과 먹는 행위와 먹는 법은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설문해자에서는 ()은 쌀알이 모여 있다는 뜻이다. 혹은 쌀알을 모은 것이라고도 설명한다”(염정삼, 설문해자주 부수자 역해, 234). 이제 우리에게 은 고작 탄수화물이 되었지만 쌀알이 모여 있다는 것은 본래는 다른 의미였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이 말에는 젓가락이라는 도구의 사용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본래 고대의 곡물은 쌀쌀하고 작은 것(기장)이었고, 최초의 도구는 단검 모양의 숟가락”(에드워드 왕, 54-55)이었다. 젓가락은 쌀이 모여야쓸 수 있는 도구였다. 젓가락이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는 알아내기 어렵지만, “전국시대(기원전 475~221)의 다양한 기록들에서 되풀이되는 언급들로 미루어볼 때, 아마도 전국시대였을 것이라는 추정을 합리적으로 할 수 있다”(에드워드 왕, 89). 그리고 이 시기는 이후 곡물들의 또 다른 모임들인 국수의 수요가 점차 늘어나는 한나라 시기와 연속성을 이루며, 다양한 곡물들이 생산되기 시작하는 것과도 맞물려 있다.

설문해자 이전 시기의 한자에 대해 알려주는 갑골문을 보면, 갑골문에 나오는 식()의 자형도는 설문해자에 나오는 식()의 자형도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갑골문 식자의 자형도에 대한 해석은 크게 3가지가 있는데, 1) 음식이 담긴 그릇 위로 뚜껑을 덮은 모습이라는 설, 2) 지붕 아래 음식이 있는 모습이라는 설, 3) 갑골문 ''를 거꾸로 쓴 자형과 음식을 담은 그릇이라는 설이 있다(김정남, ()의 자형 변천과 의미 범주 고찰, 홍익재단연구). 흥미로운 것은 3가지 설 모두에는 음식이 담겨있는 어떤 공간에 대한 암시가 있다는 점이다. 즉 음식이 어떤 것에 의해 담겨져 있다는 것, 이러한 정신과 관념이 자를 주도했던 것이라면, 이는 분명히 음식에 할애한 어떤 시간, 공간, 그릇, 문화 등에 대한 중요성의 자각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리라. 갑골문이 상()의 수도인 은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갑골문에 기록된 고대 한자의 해석은 기원전 1200년에서 기원전 1050년의 생활과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결코 정확히 추정할 수는 없으나 문헌학적 상상력을 보태어 말을 해 보기로 한다면, 갑골문과 설문해자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설문해자의 식에는 이러한 공간적 암시 대신 쌀알이 모인다는 암시가 있는 바, 이는 곧 음식이 어디에 있느냐는 물음이나 음식을 어딘가에 (담아-저장해) 두고 싶다는 주술적 희망 등과는 달리 무엇을 먹는지, 어떻게 먹는지가 음식의 선별과 음식에 관한 예()로 수렴되는 뜻을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젓가락의 사용은 바로 이러한 선별과 예들을 함축적으로 제시한 상징인 동시에 구체적인 매개/도구였던 것이다.


4.

 

먹는다는 것과 먹는 것을 일매지게 예로 수렴시키는 것은 음식의 유령론에 대한 하나의 맞이 방식이 될 수 있다. 결론을 대신하여, 그 하나의 예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채식이다. 채식이라는 흥미로운 식이요법은 먹는 내용을 한정지음으로써 먹는 형식을 바꾸고자 하는, 일종의 혁명이다. 마르탱 파주에 따르면, 비거니즘은 문명(civilization) 그 자체에 관한 것이다. 문명의 성립을 파괴하고 다시 세우려는 것, 즉 단순히 동물을 죽이는 것을 그만두자는 것이 아니라, 동물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성립된 문명을 재설계하는 것, 궁극적으로는 문명이 식량을 생산하는 방식에 깃든 도살적 폭력을 중단시키는 것이다. “비거니즘은 자연주의를 추구하는 운동이 아니다. 비거니즘은 진보된 현대다”(파주, 112). 또한 캐롤 애덤스에 따르면, 채식이 바꾸는 형식은 의미의 차원에서 작동한다. 채식은 무엇보다 먹거리라고 하는 비천한 주제에 관한 대화를 시작하게 한다. “지배적 질서에서 무엇이 의미 있는 대화이고 비판인지를 결정하는 이들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다(애덤스, 48).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고기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있는 것, 존재하는 것, 동물과 언어에 대한 가부장제적 통제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146), 다시 말해, ‘고기를 먹는 행위가 곧 언제나 있는 것에 대한 과장된 평가를 이끌어냈고 언제나 있는 것을 있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물과 여성에 대한 중첩된 억압, 혹은 착취되는 약자들 전체에 대한 비가시성, 비인식성 등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채식을, 우리가 과연 잡식동물인가, 채식동물인가 그런 관점에서 접근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본질주의적 접근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우리의 이빨의 형태, 위장의 구조를 파헤치고 역사인류학적 분석을 가하고 유적지를 탐색한다고 해도 정답은 나오지 않는다. 또 건강을 위해 채식을 한다는 것도 답을 내리기 불가능한 주장이다. 한편에는 암의 주범은 동물성 식품임을 증명하는 캠벨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지방과 고기만으로 살아간 사람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웨스턴 프라이스들이 있는 것이다. 더구나 건강해지려면 이러한 것을 먹으라는 말과 같은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것은 그 실제 효과가 어떻든 반드시 몸에 좋지 않다(몸이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공장식 축산의 문제는 반드시 언급되어야 한다. 이 셰게에 진짜로 존재하는 지옥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 끔찍한 착취와 초()효율적인 생산방식과 비용 전가의 형태 말이다. 만약 누군가 정말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나는 공장식 축산에 대해 반대하는 운동(Movement)으로서 채식은 그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채식은 우리가 개념으로서의 음식에 대해 접하고자 한다면 선택할 수 있는 첫 번째 길이며, 그 행위로서 소거되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알 수 있는 길이기도 하며, 먹는 것을 바꾼다면 먹는 행위도 바뀐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길이기도 하다. 물론, 모든 실천은 의도나 목적과는 다른 결과를 내며, 그 동기와도 다른 결과를 내지만 그것은 실천 자체의 또 다른 유령성이기도 한 것이다.


주1) 1967년 처음으로 복잡한 세포가 진화한 방식은 일반적인자연선택이 아니라 광란의 연합이라는 것을 밝혀낸 린 마굴리스는 공생(symbiosis) 개념을 쓴다. 이는 식세포작용개념과는 그 뉘앙스가 다르다. 그녀는 공생 개념을 활용하여 연속적 세포내 공생설(serial endosymbiosis theroy)을 이론화하고, 말년에는 제임스 러브록과 함께 이를 전체 생명체의 협동관계로까지 확장하여 가이아이론을 주창해내는데 이른다. 우리는 이 개념의 뉘앙스 차이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여기에 그러면 몸속으로 들어간 세포의 입장에서도 공생이겠느냐는 식의 감상적 언급을 덧붙이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생물학에 폭력이란 개념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우리 스스로 만약 폭력이라는 개념을 비인격적으로 쓸 수 있다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포에 대한 세포의 폭력은 아니다. 문제는 공생의 대가로 반드시 죽음이 지불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포들이 무리를 짓기 시작한 순간에도 있었고(‘세포자살현상), 세포가 온전히 진핵생물로 진화하는 데 성공한 순간에도 있었다(진핵생물은 반드시 불멸하는 생식세포를 갖고 개체 자신은 죽기로 한다). 한편, 가스파르 제켈리(Gáspár Jékely)는 단순한 연접이 공생이 될 수 있으려면 이미 식세포작용이 일어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본다. “미토콘드리아 조상과의 공생은 알파프로테오박테리아 먹이가 음식 액포에서 소화를 우회하기 위해 섭취 후 방어 메커니즘을 개발함에 따라 식균 영양 후에 진화했다”(1).


주2) 리어 키스는 고고학자 더글라스 프라이스와 아네 게바우네르의 농업의 기원에 관한 연구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왜 인간은 농업을 시작했을까? 왜 인간은 완벽에 가까운 건강과 여유로운 생활을 포기하고 등이 휠 정도로 고된 노동을 하고도 질 나쁜 영양밖에 얻지 못하는 생활을 선택한 것일까? 수렵채집인은 1주일에 평균 17시간을 일했다. . . 농경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해도 다 못하는 일들이 남아 있다. . . [널리 알려진 바와 달리] 재배사육의 초기단계에서는 인구로 인한 직접적인 압박은 없었던 것 같다. . . 재배되는 일년생 초본에는 엑소핀(exorphin)이라 부르는 약리학적 물질이 들어 있다. 이는 아편과 비슷한 작용을 하는 합성 진통제인 오피오이드(opioid)의 일종으로, 인간의 뇌에 아편과 비슷한 영향을 끼친다. 물론 중독성이 있다. . 농업을 시작한 것은 인간이 농업의 산물에 중독됐기 때문이다. (69-72)

 

인용문헌(인용된 순서대로)

 

Foucault, M., Truth and Power, P.Rabinow(ed), The Foucault Reader, New York: Pantheon, pp. 51-75, 데버러 럽턴, 음식과 먹기의 사회학: 음식, , 자아, 박형신 옮김, 한울아카데미, 2015, 29에서 재인용

Gáspár J., Origin of phagotrophic eukaryotes as social cheaters in microbial biofilms, Biology Direct volume 2, Article number: 3 (2007)

DOI : https://doi.org/10.1186/1745-6150-2-3

키스, 리어, 채식의 배신, 김희정 옮김, 부키, 2013.

염정삼, 설문해자주 부수자 역해,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7,

에드워드 왕, Q., 젓가락:동아시아 5000년 음식문화를 집어 올린 도구, 김병순 옮김, 도서출판 따비, 2017.

김정남, ()의 자형 변천과 의미 범주 고찰, 홍익재단연구
http://hongikf.org/sub/sub09_02.php?boardid=eduvedio3&mode=view&idx=24&sk=&sw=e1&offset=&category=&p_idx=

파주, 마르탱., 왜 고기를 안 먹기로 한거야?:관대하고 흥미로운 지적혁명, 비거니즘, 배영란 옮김, 도서출판 황소걸음, 2019.

애덤스, 캐롤., 육식의 성정치, 류현 옮김, 이매진,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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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재 2023.01.07 00:19
    숙장이 3시경 언질했는데 일이 이제 끝나서 수정이 늦었습니다. 첨부파일 형식으로 올리면 안 되는지 몰랐어요 ^^;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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