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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 지구, 그리고 달

 

사과나무는 '돌이킬 수 없이', 그리고 충실히 사과를 맺으며 그 시절인연을 소중히 하는 법이고, 가령 일단 소크라테스를 만난 사람은 돌이킬 수 없이그의 자장(磁場)에 휩쓸려 들 수밖에 없다.”1)

 

13일 이었다. 우리는 다가오는 5아내의 생일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념일에 둔감했던 나는 (그동안 기념일 마다 애써주고 정성을 다해주었던 아내의 노력을 잊은 채) 대화과정에서 그녀를 서운하게 했다. 서운함을 느낀 아내와 당시에는 그 서운함을 받아주지 못했던 나,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평행선을 이루게 되었다. 심장이 죄어 왔다. 이윽고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의 안전한 공간으로 헤어졌다

 

침대에 누었다. 그리고 자버렸다. 한 시간에서 두 시간이 지났을까. 잠에서 깨어났다. 이러한 도피가 나를 회복시켜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장숙(藏孰)에서 공부하며 알게 되었기에 옷을 따뜻하게 입고 한강으로 산책을 나섰다. 몸은 씩씩대며 화를 내고 있었고 호흡 또한 흠흠 거리며 들숨과 날숨의 주기가 굉장히 짧아져 있었다. 이것이 인지되는 순간 의식적으로 숫자 8까지, 1부터 천천히 세면서 들숨과 날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시간이 지나자 조금 안정되었다. 이번에는 발걸음에 맞추어 숫자 4를 세면서 들숨과 날숨의 사이클을 반복했다. 한강에 도착했을 무렵 길게 뻗어있는 나무들을 바라보는데 어떤 상쾌함이 찾아왔다. 얼어붙은 한강은 주변에 빛들을 희미하게 되돌려 주고 있었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었는데 이때, 문득 경계가 보이지 않는 노을의 끝을 더듬거리게 되었다. 저 멀리 능선으로 사라져 가는 붉은 빛은 지구에게 건네는 태양의 저녁 인사처럼 느껴졌다. 나는 내가 서있는 자리를 잊은 채 그들의 관계에 대해, 그 신뢰 관계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과나무는 '돌이킬 수 없이', 그리고 충실히 사과를 맺으며 그 시절인연을 소중히 하는 법이고, 가령 일단 소크라테스를 만난 사람은 돌이킬 수 없이그의 자장(磁場)에 휩쓸려 들 수밖에 없다.”는 말씀처럼 태양의 자장에 휩쓸려 공전(公轉)하고 있는 지구를 느끼며 그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이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해는, 그리고 붉은 빛은 사라져 갔고 어두워진 밤하늘이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눈이 시리고 눈물이 흘렀다. 콧물도 나오기 시작했다. 할 수 없이 바람을 등졌다. 아뿔싸. 지구에 자장에 휩쓸려 공전하는 달이 낮을 밝힌 태양을 대신해 밤을 지켜주고 있었다.2)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과 감탄을 표현하는 몸의 탄식... 그리고 잠시 후 이러한 질문이 찾아왔다. 신뢰란 무엇인가? 나는 감히 이들의 신뢰관계를 상상해도 되는 것인가? 이 땅에 태어난 지 35년 밖에 안 된 먼지 같은 한 인간이 존재들 앞에서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존재들 앞에서 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 마음을 안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지금은 알 수 없는 어떤 인사를 드렸다.

 

연강(硏講)을 준비하기 위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사후적으로 그때의 기억을 반추해 사건을 재구성하여 설명하고 있다. 양선규는 글쓰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쓰려고 하는지 그것은 결국 손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자신이 아는 것을 믿는 게 아니라 손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믿고 있는 것3)이라고. 이어서 그는 의식과 무의식의 재료들을 충분하게 활용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 부분은 알면서 모른 체하며 정성을 다하는 의식에 만족하는 편이 낫다고 배웠다. 하여 글쓰기에 관해서 부족한 손을 믿으면서도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더 큰 나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생산적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의 사건을 재구성하면서 나는 지금 이 지()점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강 시간에 나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무엇에 대해 글을 써야 하는지, 현재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를 고민하고 돌아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앞에서 느낀 것을 가지고 신뢰에 대한 소견을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그것은 먼 미래에 논할 수 있는 주제였다. 따라서 현재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조금 욕심을 내본다면, 지금의 나보다 조금 더 큰 나를 상상해 보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그리고 해야 하는 것은 배운 대로 낮은 중심의 채널에 주파수를 맞추고 오가는 기미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이다. 그저 빈중심을 배돌며 방법은 迂回(벤야민)’라는 말씀을 잊지 않아, 세속이 빈 통 속으로 삼투당할 만할 때를 기다리며 하아얀 의욕을 가지고 한 발로는 내 삶을 밟고, 다른 한 발로는 길 없는 길 선생님께서 먼저 걸으시고 선배 숙인들과 동학들이 걷는 그 길위에서 반걸음을 내딛는 실천이, 그 행함이 필요할 것이다.

 

飛上에서 步行으로4)라는 글에서 선생님께서는 미시마 유키오, <가면의 고백>의 문장을 인용하셨다. “살에까지 파고든 가면, 살집이 달린 가면만이 고백을 할 수 있다. 고백의 본질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는 고백의 으로 나아가기 위해 나보다 더 큰 나라는 수잔(邃潺)의 가면을 쓰려한다. 나의 꼴에 대한 맹성(猛省)을 계속 이어가 수잔이라는 가면이 살에까지 파고들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그 가면이 나인 것처럼, 아득하고 캄캄한 그날에 살에까지 파고든 가면이 이제는 조건이 되어 다시 새로운 가면을 얻을 수 있게 되는, 한계가 조건으로 바뀌는 그 순간을 꿈꾸어 본다.

 

글을 마칠 때가 된 것 같다. 아직은 신뢰를 이야기하는 것이, 상상해 보는 것이 이르다고 생각한다. 꿈은 꿈대로 두고 이 부족함을 동력 삼아 오래된 미래의 공부가 가리키는, 제도적 진보가 청산해 버린 특정한 시간()5)을 향해 나아가려 한다. 이제, 다시 시선을 낮추고(足下) 규보(蹞步) 해야 할 때가 됐다.

 

한 발이 쳐지면서 다른 한 발이 앞으로 나아가는 바로 그 순간을 향해.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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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선생님, 공부론, 샘터, p23

2) 뮤지컬 영웅의 노래 중 <동양평화> 가사의 일부분

3) 양선규, 글쓰기 인문학 10, 소소담담, 2021, p5

4) 내게 찾아온 은총, 한국기독교연구소, 2012, p41

5) k선생님, 봄날은 간다, 글항아리, 2012, p273

6) k선생님, 집중과 영혼, 2017, p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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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0253.JPG

  • ?
    수잔 2023.02.05 12:08

    어제 숙인들과의 대화 속에서 어떠한 반성이 있었습니다.

    그 감사함을 잊기 전에 실천에 옮겼습니다. 

    글쓰기의 윤리적인 부분에 대한 반성인데요,
    처음에 등장하는 아내에게 이 글을 보여주고 동의를 구하지 않았던 점,
    그리고 등장했던 아내와의 이야기를 끝맺음 하지 않고 소외시켰던 점들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사과했습니다.
    앞부분의 내용을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뒷이야기,
    1월 3일의 경험이 있은 후, 저의 둔감했던 부분들을 반성하여
    1월 5일 아내의 생일날 강원도 강릉에서 화해의 대화를 나누고
    기쁜 시간들을 함께 누릴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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