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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희와 혼불1

 

1. 근원에 대한 그리움

 

저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서 큰집 제사에 가거나, 어머니를 따라서 외가에 갔을 때 궁채 두루마기 편지를 보거나 하면, 강렬한 영감에 사로잡히면서 보이지 않는 분들의 넋이 저와 교감하는 것을 느끼곤 했어요. [. . .] 항상 저는 저 자신의 근원에 대해서 참 궁금하고, 또 그리웠습니다. [. . .] 저의 어머니의 어머니, 아버지의 아버지는 어떤 모습으로 사셨을까,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그런 것들을 그대로 글로 옮겨보고 싶었지요. [. . .] 마한의 옛터에 살던 한 조그마한 딸로서, 백제를 거치고, 견훤의 후백제를 거치고, 여러 왕조를 거쳐서 여기까지 왔[지요]. [저는] 이 땅에서 이루어졌던 모든 역사의 영역을, 저는 다시 한번 제 몸으로 해석해서 여러 사람한테 간절하게 얘기하고 싶은 충동을 참을 길이 없습니다.” (1997, 스튜디오730, 전주MBC 인터뷰 중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dyu6z52fXU4&t=33s)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고래(古來)로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아 온 질문일 것입니다. 최명희는 삶의 갈피마다 이 질문에 사로잡혔고, 내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나를 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로부터 몇 천년을 거슬러 나의 근원을 좇는 그 시선 속에서, 없는 것이란 무엇이고 있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나는 이미 박달나무가 무성히 자란 저 산골짝, 인간이 되기를 간절하게 소망해, 마침내 인간이 되어 환웅과 혼인한 곰할머니의 흔적이기도 하고 아득한 마한과 가련한 백제, 오해받고 찢기워진 후백제와 침탈당하여 멸망한 조선에 살던 온갖 얼굴의 여성들, 혹은 남성들이기도 한데, 그 모두가 그 모두를 부르는 강렬한 쓰기의 부름에 응답하여 내게 올 것이라면, 이미 나는 누구일까. 근원을 찾는 정성스런 쓰기의 몸짓 속에서 내게로 그 모든 것이 우글우글 몰려듭니다. 최명희는 바로 그러한 것의 집산체(集散體)입니다. 그네는 스스로를 사람들의 혼불이 시키는대로 심부름을 하게끔 부름받았다”(전북인인터뷰, 19914월호)고 말합니다. 그네는 근원을 알기 위해 아마도 현대의 자아로서의 자신을 버리고 혼불을 통하여 자신을 수복하였을 것입니다.

 

최명희의 작업은 소설이라는 장르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작가는 무당처럼 굿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도(전북인인터뷰, 19914월호) 했고, 어떤 이는 이로부터 민속학역사학을 염출해내기도 했습니다. (혹은 제 생각에는 사물의 시역사비평이기도 합니다.) 물론 또한 좋은 소설이기도 합니다. 좋은 소설이란 것이 그것을 읽는 경험으로부터 읽는 자의 미학을 감각적인 차원에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분명히 그렇습니다. 혼불9권에서 작가-독자의 화신이자 강태-강모의 인물성이 통합승화된, 강호는 여태껏 아무 관심도 없었고 전혀 몰랐던 그 어떤 존재에 대한 자각이 이토록 깊고 그윽하며 강렬한 것일 줄이야”(84)하고 감탄하는데, 아마도 혼불을 읽은 모든 이는 그곳에서 곡진하게 묘사되고 불려내어진 모든 사물들과 이름들에 대하여 예전과 같은 마음을 갖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미학적 차원에서도 최명희의 혼불은 소설의 서사성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제기합니다. 극적으로 구성되지 않는 이야기, 마치 심청가처럼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바로 그 이야기됨의 아름다움에 이야기성의 정신을 거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도 어떤아름다움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근대 소설의 장르적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이야기를 해나가다가도 신부 건넌방이 보이면 그 삼층장, 의걸이장, 궤와 사방 탁자, ()과 농, 반닫이장, 버선장, 사방 둘레를 돌며 매화, 난초, 국화, 목단, 불로연 들이 수줍은 듯 흐드러진 듯 피어 있는것까지도 곡진하게 묘사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배경이 없고 사건이 없는이 소설, 충분히 아름답지 않습니까.

 

가장 한국적인 말의 씨앗으로 춘향전이나 심청전 같은 우리식 고유의 이야기 형태를 살리면서 서구 전래품이 아닌 이 땅의 서술 방식을 소설로 형상화하여, 기승전결의 줄거리 위주가 아니라, 낱낱이 한 단락만으로도 충분히 독립된 작품을 이룰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었어요.” (여성동아 1998년도 1월호http://www.jjhee.com/m20400/?pageid=5&uid=54315&mod=document)

 

최명희는 그네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듯 전북 전주 사람으로 아버지 최성무와 어머니 허묘순의 24녀 중 장녀입니다. 관향은 삭녕이며 본향은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560번지(노봉마을, 삭녕 최씨의 5백년 세거지)이고, 모친은 재야의 학자 허환(許晥)의 장녀로 전남 보성군 득량 출신입니다. 대학 졸업 후 모교인 기전여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지만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쓰러지는 빛으로 등단하고, 이어서 1981년 혼불 1부를 동아일보 장편소설 공모전에 공모하여 당선되자, 오로지 글쓰기에 전념하게 됩니다. 이후 약 8년간은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고 하는데요, 그러나 다시 약 8년간 많은 것을 써 내게 됩니다. 최명희는 19889월부터는 신동아에 연재를 시작하여 만 72개월 동안 혼불 5부를 완성하게 됩니다. 199612, 완간된 혼불이 출판되었으나, 1년 후인 1998, 난소암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이때 나이 51, 평생 독신이었습니다.

 

내 시간 위를 흘러 지나가는 저 봄날의 흙먼지 한 무리처럼, 역사라는 것을 한낱 하잘것없는 잡담으로 치거나 번거로운 바람, 혹은 털어내 청소해 버릴 흔적으로 치부한다면, 그것은 나와 무관하여, 이미 죽어버린 자들의 잠꼬대 같은 기록에 불과한 것이 되겠지만.

티끌같이 작은 일도 내가 온몸을 열어놓고, 오관을 다하여, 마음으로, 느낌으로 받아들인다면, 역사는 바로 그 순간에 나와 한 몸을 이루어 체화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

나로부터 엮어 보는 역사.

[. . .] “내가 누구인가.”

정말 궁금하여 아버지, 아버지가 살던 땅,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살던 시대, 증조부, 고조부, 선세 옷깃을 찾아 오르고 오르면서 드디어 단군 할아버지에 도달하는 길은 절실하고도 구체적이다.

내가 원인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8, 121-22)

 

2. 우리가 쓰면, 그것은 산다.

 

최명희에게 근원을 찾는 길은 모국어로 각인(刻印)되어 있습니다. 그네는 때로는 그저 소박하게 웃으며 모국어를 한 소쿠리 담아내고 싶었어요”(1997, 스튜디오730, 전주MBC 인터뷰), 그러면서 저는 소쿠리란 말을 참 좋아한답니다라고 수줍게 덧붙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모든 사활(死活)을 거기에 건 듯 비장하게 무릇 언어는 정신의 지문이다. 우리는 과연 이 시대의 시간 위에 어떤 지문을 찍는 것일까. 그 무늬는 후손의 얼굴에 덮인다고 말하기도 합니다(http://www.jjhee.com/m20400/?pageid=5&uid=54315&mod=document). 실로 혼불을 읽으려면 우리는 반드시 잊혀진 단어들을 공부해야만 합니다. 11권의 첫 장면인 혼례 장면에서부터 우리는 모국어의 무늬를 만지지 않고는 이 책을 읽어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최명희는 마치 강실이에게 뽕 따는 법을 알려주는 오류골댁처럼, 우리가 자신의 작품으로부터 뽕을 따려면’(무언가를 얻으려면) 누에를 부지런히 먹이고, 뒷그루를 살피면서 새로 무언가 돋아날 수 있도록 모국어를 추수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뽕을 딸 때는, 아무렇게나 손에 잡히는 대로 따지 말고, 뒷그루를 살펴 줘야 헌다. 뒷말에 움이 새로 돋을 자리를 다치면 안되지. 말라버린 가지는 찍어주고, 새 순에서 핀 햇잎을 골라, 뒤로 젖혀서 따라. 뽕잎 하나라도 그것이 다 목숨 있는 것이니 함부로 상허게 허지 마라.” (1, 114)

 

언어는 우리가 쓰지 않으면 그 몸을 잃어버립니다. 그 위기의식을 무섭게 간직해야 합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가 쓰든 안 쓰든 한 번 세워진 그것은 무섭도록 살아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스러지는 것이 아닙니다. 1권에서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통해 이 문제가 보다 구체적으로 논해집니다. 최명희 소설에서 특별히 작가의 견해를 반영하는 인물의 대립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등장인물 모두가 전주사람입니다. 일본사람은 단지 배경일 뿐, 말을 얻지 못합니다), 기표도 옳고 기채도 옳고 청암부인도 옳은 것입니다. 기표는 본질은 간직되므로 이름을 바꾸는 것은 합리화될 수 있다고 봅니다. 기채는 모두가 상투를 자르는 세상 속에서 여전히 망건이나 탕건을 소중히 하듯이 자신의 임무는 근본인 이름을 지키는 데 있다고 봅니다. 청암부인은 시든 콩꼬투리 속에서도 결코 죽지 않는 콩알의 힘을 알고 있습니다.

 

곧이곧대로 일편단심은 지켰을망정 본질을 망치고서야 무슨 의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태산 같은 바위가 앞에 있으면 돌아서 가야 합니다. 그것은 변절이 아니라 뒷날을 보존하기 위한 합리올시다.” (1, 203)

 

사람들은 나라가 망했다, 망했다 하지만, 내가 망하지 않는 한 결코 나라는 망하지 않는 것이다. 가령 비유하자면 나라와 백성의 관계는 콩꼬투리와 콩알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비록 콩껍질이 말라서 비틀어져 시든다 해도, 그 속에 콩알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콩은 잠시 어둠 속에 떨어져 새 숨을 기르다가, 다시 싹터 무수한 열매를 조롱조롱 콩밭 가득 맺게 하나니.”

백성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누가 감히 남의 나라를, 망하였다, 할 수 있단 말이냐. (1, 155)

 

전주는 여전히 망한 나라의 이름 완산을 통해 자신을 부르며 백제는 후백제속에 다시 피어납니다. 실로 조선은 곰할머니를 데리러 가는 전주의 재행(再行)이며 만주로의 이주는 비록 환난이 가득할지언정 발해의 향을 품고 있습니다. 특히 9권 전체에서는 사천왕(四天王)이 지극히 묘사되면서 어떻게 단 하나 남은 흔적을 모두어 그 표현형식과 내용들을 재생시킬 수 있는지가 실감납니다. 언어는 한없이 연약하지만 또한 몹시 위엄있는 것입니다. 최명희는 언어의 이 같은 형상을 마음과 몸을 통해, 혼불과 사람을 통해, 정신과 사물을 통해, 나라와 백성을 통해 되풀이해서 보여 줍니다. 그래서 이름이 남아 있고, 그 이름을 쓰는 사람이 남아 있다면, 그 몸을, 그 사람을, 그 사물을, 그 백성을 통해 (본디 거기에 있어왔던) 마음이, 혼불이, 정신이, 나라가 제 얼굴 알아봐 준 것을 기뻐하며 다시 찬란하게 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 또한 넋의 뿌리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근원에서 물었던 것이, 이제는 언어의 몸을 통해 후대를 향합니다. 나는 미래에 누구입니까?

 

체리암(滯離巖).

이라고 새겨넣는 저 문자향(文字香)의 은근 지극함이라니.

조선 강토 산천초목, 흔하고 흔한 풍경 속에 무심한 바윗돌, 저 무정물(無情物)하나. 그냥 두면 세월 가서 부스러져 흔적도 없을 것을. 마음 담아 글자로 스미어서 현신(現身)하시고. 죽어서도 살아서 후손을 만나시니. 만나는 가슴마다 따뜻한 바위 하나씩을 노나 주신다. 당신 몸을 심어 주신다. 이름 없는 길거리의 돌멩이 하나에도 정신이 깃들어 넋의 뿌리가 되는 당신.

아아, 당신은 어떠하신 용모의, 어떠하신 성품의, 어떠하신 목소리에, 어떠하신 정신을 가지신 어른이셨을까요.

그리고 당신의 후손인 나는?

나는 과연 내 생의 그 어느 길목에, 무엇이 되어, 무엇이라 새겨 놓고 떠나가서, 저 먼훗날의 그 어느 후손에게 이런 그리움을 만지게 해줄 수가 있을까요.

이토록 참혹하고 암울한 시대에, 갈갈이 찢기고 짓밟힌 것들로만 기워 붙인 이 만신창이 몸뚱이와, 이 뿔뿔이 흩어진 정신에 무엇이 살아서, 세월이 가도 마모되지 않고 바위에 남을 한 획을 얻을 수가 있을까요.” (9, 55-56)

 

3. 신부들, 혹은 최명희의 꽃심

 

1권의 핵심 내용은 무엇보다 혼인일 것입니다. 혼인하는 예식절차와 그에 소용되는 갖가지 사물들과 양식들이 주요하게 서술되지만 최명희가 그리는 신부의 초상이 또한 중요합니다. 효원은 이제 막 다리속곳, 속속곳, 단속곳, 고쟁이, 너른 바지, 대슘치마, 무지기로 겹겹이 싸인 후 다홍치마를 입어 낸 신부입니다. 청암부인은 흰 덩이 가마를 타고 소복 입은 신부로 매안에 왔습니다. 재취, 삼취, 보쌈의 여인들이 처덕이 없다는 청암부인의 시부의 이지러질듯한 흐릿함 가운데 또렷합니다. 매안 마을 어귀 동구에는 열녀비가 서 있어 망부(亡夫)의 뒤를 따름으로써 절개를 지켰다는 문씨부인을 기억하게 해 줍니다. 평순네, 옹구네, 곰배네는 거들치마와 두루치를 입은 밭의 신부들입니다(우리는 이어질 혼불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더 듣게 될 것입니다).

 

신부의 유일한 바깥이자 지주(支柱)인 신랑들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부재합니다. 효원의 강모는 첫날 밤 효원을 그 겹겹의 감옥 속에 남겨두고 화관과 큰 댕기만을 벗겨줍니다. 강모의 마음은 강실이로, 연두로 물들어 있고, 효원은 공방살의 수모 속에 홀로 남겨져 있습니다. 청암부인은 실로 모든 것을 잃고 매안 이씨 문중으로 왔습니다. 단명한 시부의 첫 부인은 숨막히는 한기 속에 떠났으며 재취, 삼취의 부인들은 시들어 버린 주인의 마음 속에서 제 나름의 비극을 겪었을 것입니다. 이 비극 속에 신부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이렇게 질문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씨부인은 어떻게 열녀가 되었으며, 그녀의 낡은 편지는 어찌 그리도 강한 청암부인으로 하여금 앞섶이 다 젖게 체읍하게 합니까? 낭군을 잃어서야 절개를 세울 수 있습니다.

 

남성들이 부재하는 가운데, 혹은 부재하기 때문에 여성들은 그 고통 속에서 자웅동체의 존재로 성립합니다. 효원의 체모나 태도는 완연 가부장적인 위엄이 있고, 이미 가부장인 청암부인은 집안을 제 뼈로 일으키고 마을에는 어른이 되어 호()를 만들 만큼 능동적입니다. 자미성군의 수양조 기러기는 혼인으로 맺어진 부부의 인연을 상징하지만, 짝을 잃은 기러기로서 효원과 청안의 유신(有信)함은 마치 연()처럼 하늘을 향해 다가갑니다. 연 또한 혼불전권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상징인데요, 연은 빈 것을 통해서 비행합니다.

 

네가 나를 어찌 알고…… 나를. [. . .] 가슴이 퍼엉 뚫리면서 그 한가운데로 음습한 바람이 지나가는 것도 역력히 느껴진다. 뚫린 자리는 동굴처럼 어둡고 깊었다. (1권, 41)

 

처연하리만큼 아득히 높이 뜬 연들은, 하나같이 가슴 한복판이 둥그렇게 뚫려 있었다.

가슴을 도려 내 버린 그 자리에는 메마른 연달만이 가슴에 걸린 가시처럼 드러나 있고, 그 구멍으로는 하늘이 그대로 푸르게 비치는 것이었다. 애도 창자도 없이 비어 버린 연의 가슴을 푸른 하늘이 대신 채워주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빈 집을 아무 뜻없이 통과하는 바람처럼 하늘은 비치는 것일까.

[. . .] “비어야 상하좌우, 자유 자재로 날 수 있는 것이다.” (5, 225)

 

혼인은 옛 시대 여성들의 가장 중요한 매듭이었을 것입니다. 여성은 혼인을 위해 준비되고 혼인을 기점으로 진정으로 재생됩니다. 친분이 있는 가문들끼리 혼인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더라도 여성은 바깥으로 나가 바깥을 끌어 안고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한 혼인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러한 혼인을 겪는 여성은 어떤 존재였는지, 우리는 효원과 청암이라는 극()을 통해서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신부의 아름다움은 수난 속에서 빛납니다. 수난을 겪어서야 신부는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일까요? 저는 최명희를 통해서는 그렇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수난을 겪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최명희는 그러한 아름다움을 꽃심으로 개념화하도 했는데, 꽃은, 지기 때문에 찬연히 아름답지만, 아름답기 위하여 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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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재 2024.03.22 09:22
    조금 늦게 올려서, 프린트는 제가 일괄적으로 해 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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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찔레신 2024.03.22 10:36
    *유재는 발제 시간을 20분으로 잡고 준비하도록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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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재 2024.03.22 11:50
    넵, 선생님, 20분을 넘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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