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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회 속속] 결석자의 숙제

1. 자기소개
 
안녕하세요. 서울 목동에 살고 있는 유재입니다. 베트남 여행 일정으로 174회 속속을 결석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전통’을 따라 결석자로서 각 공부 꼭지 별 코멘트를 올립니다. 인터넷 사정이 어떻게 될지 몰라 출국 전에 게시하고자 하니, 부득이 아직 전달받지 못한 <단보곡필>을 제외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다보니 올해 베트남을 두 차례나 방문하게 되었어요. 저희 가족은 일본을 미워하고 베트남을 경애(敬愛)합니다. 동생은 이미 ‘사회학’이란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 서슴없이 일본을 원수(怨讎)라 불렀고 베트남의 역사적 성과를 존경하였다지만-그녀의 베트남 첫 방문은 고2 때였는데, 그 목적은 오직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미국을 패퇴시킨 위대한 호치민의 실제 모습’을 보는 것이었습니다-어머니의 애호(愛好)는 남다른 것이었습니다. 올 봄 처음으로 베트남을 다녀 온 어머니는 자신은 ‘베트남 사람인 것 같다’는 이상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확신은 그 나름대로는 꽤 합리적인 면을 갖고 있기도 했는데, 어머니는 늘 자신의 출생에 관한 수수께끼를 갖고 있었고, 할아버지는 베트남 참전 군인으로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물론 연대상으로 불합리한 면이 있다는 것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아무튼 그곳에서 마치 오랫동안 추적해 온 행복을 찾은 듯한 어머니의 모습은 제 동생에게 어떤 감화를 일으켰고, 동생은 당장 모든 회사 일을 미루고 두 번째 여행 계획을 추진하기에 이르렀지요. 저는 여기에 휘말린 일종의 희생양(?)이랍니다.
 
아직도 저는 여행을 즐길 줄 모르는 무지렁이에 불과하고 여전히 여행을 일종의 낭비로 여기는 고리타분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에든 성실하고자 하는 욕심 탓에 또한 여행에서 무엇이든 배우고자 하고 여행을 통해 저 자신을 조금이라도 바꾸고자 하는 열망이 있습니다. 저는 제가 살고 있는 이 곳에서 무엇보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지만, 살아오면서 <여행>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사실 <여행>이란 무엇인가를 알려주신 분 역시 선생님이십니다. 선생님께 지역의 땅들(districts)을 만나는 법을 배우면서 이 무지렁이며 고리타분한 자가 조금이나마 땅과 그 위에 서 있는 것들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게 되었지요. 그 향토와 지색까지는 구체적으로 모른다 할지라도 그 고유한 존재의 미학을 대우하는 법은 적어도 알게 된 것이지요. 선생님께서는 바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제게 바다를 보여주셨고, 또한 나무를 진정으로 만나본 적이 없는 제게 나무를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저는 아직도 선생님께서 청도의 은행나무 당신(堂神)을 소개해주시던 그 날을, 그리고 군락을 이루며 피어난 호랑가시나무를 소개해주시던 그 날을, 잊지 못합니다(기억력이 끔찍하게 나쁜 저인데도 말이지요). 제게 그것은 앞으로 모든 나무를 다르게 대할 수 있게 한 원형적 체험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나무가 무엇인지, 나무를 통해 무엇을 볼 수 있는지, 그리고 나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알았습니다. (제게 나무는 글과 같았고 인식과 같았고 마침내 형식과 같았습니다.)
 
저는 아직도 선생님께서 무엇을 보시는지 감히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사는 땅에서 스스로 충분했던 H.D.소로와 모든 곳을 편력하며 실로 여행의 정신으로 교양을 이루며 살았던 J.W.V.괴테의 조언을 ‘동시에’ 추수할 만큼의 노고는 기울일 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제가 여행하며 간직하는 글귀를 전하며 자기소개를 마치고자 합니다.
 
“사디는 여행을 다녀도 좋을 사람으로 <철학자들이 이야기했던 대로, 자신의 손으로 근면하게 살림을 꾸려갈 수 있고, 빵 한 조각을 얻게 위해 번번이 자신의 믿음을 걸지 않아도 되는 평범한 직공>을 으뜸으로 쳤다. 잘 일궈진 땅에서도 야생 과일이나 사냥한 고기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여행해도 좋다. 재빠르게 걸으면서 길에서 살림을 꾸려 갈 수 있는 사람은 여행해도 좋다. [...] 제대로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기나긴 단련이 필요하다.” (소로우, 강, 400-402) 


여헹을 떠나는 페터만에게 괴테는 다음 말을 쓴 기념수첩을 전해주었습니다:
“그가 내 앞을 스쳐가시건만 보이지 않고/ 지나가시건만 알아볼 수가 없네.” _욥기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1830년 4월 21일 바이마르에서 괴테(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2, 41)
 
2. 한문 강독 


제가 이번 주에 맡은 부분은 신광수의 <적률> 1연부터 6연까지입니다. 신광수는 이미 우리가 읽은 적이 있는 사람입니다. 남인으로 초기에는 벼슬길이 막혀 향리에서 시작(詩作)에 전념하였고 마침내 늦은 나이에 과거시험을 보았을 때는 <과시(科詩)>의 모범이 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 솜씨에 대한 영조의 대우가 대단했다고 하는데요, 가히, 세상에 쓰이지 않을 때에도 고요하고 차분하게 자신의 공부에 전념하는 학인의 본(model)이 된다 하겠습니다.
 
八月霜欲降 팔월상목강, 8월에 서리가 내리고자 하니
園栗初坼房 원율초탁방, 동산의 밤이 비로소 터져 곳곳에 있네.
昨日半靑者 작일반청자. 어제는 반쯤 푸르던 것이
今日已全黃 금일이전황, 오늘은 이미 다 누렇게 되었네.
山風一微過 산풍일미과, 산 바람이 한 순간 지나가니,
動手拾盈筐 동수습영광, 손을 움직여 주우니, 광주리를 가득 채웠다네.
 
3. 토세명인: ‘현대 의학의 한계에 대하여, 그리고 의료적 개입을 최소화하면서 회복 과정을 촉진할 수 있는 다른 가능성에 대하여’
 
저는 현대의학의 한계를 깊이 인정합니다. 미시적으로는 그것이 병의 본질을 향한 것이 아니라 대증(對症)요법밖에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거시적으로는 그것이 몸이 무엇인가에 관한 너무나도 제한적인 관점만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더구나 의학은 그 실천 자체가 제국주의적입니다. 자신의 방식 외에 다른 모든 방식은 사이비한 것으로 치부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를 살아가는 한 명의 현대인으로서 저는 의학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올 초 아나필락시스 발작을 겪으면서 느낀 것은 만약 이 짧은 발작을 처치해 줄 응급실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는 죽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본질적인 원인을 결코 밝히지 못했지만 아무튼 저를 구했습니다(증상을 제거한 것입니다). 저는, 비록 한 번이지만, 결정적인 도움의 빚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샐리 티스데일의 전체 논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CPR이 자긍심을 해친다는 말 자체에 대해서만 반박하는 것은 어쩐지 편향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그럼에도 저는 반대의 의견입니다. CPR을 통해서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명확한 가능성이 있다면 과연 그것을 받는 것이 자존적인 행동일까요, 아니면 받지 않는 것이 자존적인 행동일까요? 진정으로 자신을 높이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신을 위해서 생명을 연장시키는 삿된 행동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것? 아니면 ‘온전히 내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생명’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을 낮추어 CPR을 받는 것?

저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은 온전히 제 것이 아니며 제가 거절할 수 없습니다. 일단 생명을 받았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그것을 지키려고 해야 합니다. 그 생명은 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지켜야 할, 저라는 장소 경계의 무엇입니다. 저는 일종의 생명의 장수(將帥)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의료적 개입을 통해 생명을 지탱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의료적 개입자’를 ‘신뢰’하고자 하는 길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처럼 완벽하게 산업화된 의료절차 속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절실한 사실이기도 하지만, 저는 여전히 ‘실력 있는 의사’와 그와의 관계를 통해 어떤 형식으로 ‘최소화’되는 의료절차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가령 CPR에도 ‘실력’이 있다는 것을 저는 응급실 간호사들을 통해 알았습니다. 어느 ‘실력 좋은 간호사’는 자존감이 해치지 않도록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또한 ‘의사’의 믿음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 살아났다고 하는 장수(!)했던 한 노인 학자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괴테는 이렇게 말하고선 ‘회복해냅니다’: “‘내가 건강을 회복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야.’ 하고 그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나에 대해 적지 않게 기적을 일구어 낸 의사 여러분들의 명예를 손상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게야.’”(괴테와의 대화2, 16) 괴테는 마치 그 명예에 대한 신뢰를 위해서인것처럼 회복되는 것입니다.) 


4. 교재 공부 [한 편 글로 갈음합니다. 지린 선배님, 책 너무도 재미있게, 즐겁게, 또한 유익하게 잘 읽었습니다.] 
 
4.0. 하나의 독법 

아마도 우리는 이 세 편의 작품을 아이-인물들이 어떻게 욕망의 대상을 포기할 수 있게 되는가에 관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새 아빠」의 현우는 (정신분석학적으로 말해 아마도 모든 인간의 원초적 욕망의 대상일) ‘엄마’를 추구하는 것을 유예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언니가 좋아요」의 진률은 자신의 욕망의 대상이었던 ‘머리핀’을 포기할 수 있게 된다. 「하나와 하비」의 하나는 ‘언어가 없는 대상의 세계’를 포기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결코 ‘그 대상’이 가치가 없어졌으므로 포기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포기한 욕망의 ‘대상 자체’보다 그들이 포기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아이-인물들이 ‘어떻게’ 욕망의 대상을 포기하는가를 탐구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포기할 수 있는 능력’에 관한 하나의 서사를 제공해준다: 그러니까, 그것은―동화이기에 ‘능력’이 될 수 있는 그러한 것으로서의―‘능력’이었던 것이다. 

4.1. 「나는 언니가 좋아요」의 경우 

언니의 “초록색 별 달린 머리핀”(나는 언니가 좋아요, 11)은 너무나도 예뻤다. 그것은 “싫증이 나지 않”는 것, 늘 “새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욕망할 만했던 것은,  “언니의 바구니”에 있는 것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작가가 드러내는 ‘나의 욕망’에 관한 진실은 곧 그것이 ‘타자에 의해 중개된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인 것이다. ‘진정한 나의 욕망’이란 것은 없다. 이것은 이 이야기의 <소설적 진실>(르네 지라르)이다: 우리는 이미 타자의 욕망을 모방하고 있으며(언니의 욕망), 대상을 타자에 의하여 욕망되는 것으로 만들고자 하고(보름이의 욕망*), 마침내 ‘나를 욕망하도록 만든 바로 그 타자’를 나와 욕망의 대상 ‘사이의 장애물’로 전화(轉化)시키고자 한다(즉 처음에 ‘나’는 언니로 인하여 머리핀을 욕망하였지만, 이야기가 진전되면서 점점 언니는 ‘나’와 ‘머리핀’ 사이에 놓인 장애물로 변화하는 것이다).

여기에 이른 이야기는 마침내 이 같은 모방욕망의 게임 사이에 놓인 중요한 질문을 던지기에 이른다. 과연 ‘언니’가 나와 머리핀 사이에 놓인 장애물인가? 아니면 ‘머리핀’이 나와 언니 사이에 놓인 장애물인가? 나는 머리핀 때문에 언니에게 다가가지 못한다(“그런데 지갑을 걸고 있으니 왠지 언니에게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18)). 혹은 언니 때문에 나는 머리핀을 온전히 향유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해 욕망의 대상과 욕망의 중계자는 구분 불가능하다.

이야기는 ‘내’가 ‘욕망의 중계자’로서의 언니를 위하여 마침내 ‘욕망의 대상’을 버리는 것으로 종결된다. ‘욕망의 대상’은 아마도―언니로 인하여―얼마든지 증식(增殖)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머리핀을 연못에 던져넣자마자 언니는 (쇠도끼를 던져넣고 은도끼와 금도끼를 얻는 원형적인 동화 속 유형처럼) 새로운 욕망의 풍경으로 이를 보상해준다. ‘나’는 요정이 살고 있는 방(연꽃)을 일별한다. 그리고 ‘나’는 이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색동지갑”까지도 버릴 수 있게 된다. 욕망의 대상들은 아마도 무수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욕망의 절대적 성격을 고수하지 않고 타자에게로 향하는 한, 우리에게는 욕망의 대상이 무수한 만큼 ‘욕망의 대상을 포기할 능력’ 또한 무한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감추지만(“나는 목에 걸고 있던 지갑에 머리핀을 쏙 넣었습니다”(14)―“지갑은 푹신푹신한 천으로 만들어져 동전을 넣고 뛰어다녀도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15)), “단짝 친구 보름이”와 함께 있을 때 그것은 (마치 의도되지 않은 것처럼) “튀어” 나온다(15). 마치 보름이의 욕망의 시선을 얻기 위한 것처럼. 

4.2. 「새 아빠」의 경우 

‘엄마’란 실로 시원적인 욕망의 대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최초의 진정한 욕망의 대상은 가질 수 없다. 「새 아빠」에서 ‘엄마’는, 현우가 이미 아버지와 대결해보기도 전에, 아버지가 금지하기 전에 이미 거기에 없는 대상이 되어버린다.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엄마’는 영원히 유예된 것이다. 하지만 현우는 일단 엄마라는 대상을 ‘되찾은’ 후 다시 그것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동화의 제목은 ‘새 엄마’가 아닌 것이다). 현우는 이왕 나간 엄마는 기꺼이 유예한다(“엄마는 집을 나갔으니 어쩔 수 없다”(84)). 대신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드라마를 써 가려고 한다. “현우에게 중요한 말을 해 줄 수 있는 사람”(76-77)을 그는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는 밤에는 쫓기는 꿈을 꾸고 낮에는 어른들에게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쫓기는 꿈에 관한 괴로움도, 거짓말에 관한 무거움도, ‘철학교수’에 의해 어떤 식으로 승화된다.** 그리고 그 승화 속에서 그는 엄마의 유예를 보다 깊은 차원으로 수용한다. 그것은 어떤 사실적 진실의 이야기 속에서 다시 충족될 수 있는 무엇으로 연기된다. 진화란 것이 자신의 욕망을 연기할 수 있는 ‘차분해짐’에 관한 것(김영민 선생님)이라면, 그런 의미에서 현우는 엄마를 향한 욕망을 ‘차분화’시킨 것이다. “‘지구는 둥그니까.’ 현우가 혼잣말을 했습니다. 지구는 둥그니까 한쪽 방향으로 계속 달리다보면 같은 자리에 오게 되어 있다고 배웠습니다. 엄마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91)

현우는 이렇게 엄마를 포기할 수 있게 되는데, 사실 이러한 포기에는 저자의 작품 전체를 추동하는 더 깊은 내적 모티프가 있다. 그것은 일종의 ‘아버지와의 자매(姉妹)맺기’이다. 철학교수가 제시한 것―네가 아버지를 돌보라는 것―은 그가 현우에게 준 그림책의 제목―우리, 함께 걸을까?―과 함께 현우로 하여금 아빠와의 연대의 가능성을 생각하도록 해 준다. 다시 말해 아버지와의 연대는, 아버지가 포함된 세계의 또 다른 대타자를 통하여, 꿈꿀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작품의 장면만으로는 그 승화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판단할 수 없다: 어쩌면 그 승화는 불충분하며 위선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사회’가 아이를 보살펴야 한다고 말했던 교수는 ‘아이’가 아버지의 역할을 하라고, 아이더러 ‘어른을 보살피라’고 말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어쩌면 교수는 이미 그 아이가 처해 있으며 탈출할 수 없는 사태에 대한 적절한 중화제를 제공한 것인지도 모른다. 현우는 적어도 “중요한 말을 들은 것처럼 뿌듯하고 가슴 깊이 만족스러워”(87)했기 때문이다. 

4.3. 「하나와 하비」의 경우 

하나가 ‘나비’를 ‘하비’라고 부르는 장면은 언어와 욕망이 결정적으로 서로의 불충분함을 수용하게 되는 인간의 장면을 상징한다. ‘나비’라는 대상은 우리가 ‘나비’라고 그것을 포착하자마자 존재총체성의 광휘를 잃는다. 물론 이름이란 대상의 물성을 온전히 수용할 수 없는 인간의 빛과 어둠을 동시에 나타낸다. 이름이라는 빛은, 우리가 이름 없이 ‘만났던’ 그 찬란한 존재의 어둠을 ‘몰아내고’ 또 어둠으로 ‘배제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않았다. “하나는 다섯 살이 되었는데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그래서 “엄마의 걱정은 태산 같았”던 것이다(39). 하지만 하나는 ‘나비’를 ‘하비’라고 부르는 과정을 통해 마침내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게 된다. 하나는 ‘하비라는 호명’을 통해 그리고 하비라는 호명의 어둠에 숨은 그 ‘이야기’를 통해 ‘불러주는 인간의 일’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엄마는 하비가 온전히 이 ‘호명의 통로’를 통과한 것에 감사한다(“하나야, 엄마라고 불러줘서 고맙다.”(60)).

그런데 하나가 ‘하비’를 호명하게 되는 과정을 유심히 살펴 보면, 그것은 엄마가 부재한 곳에서 돌출한 ‘자매를 향한 욕망’임을 알 수 있다. 하나가 “버스를 돌아보았”을 때, “버스 안에서 진아와 진서가 이쪽을 보고 있었”고, 둘은 자매였다. “둘은 나란히 앉아서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35). 부재한 엄마의 자리를 채운 것이 바로 막 변신하고 있던 나비 한 마리였다. 하비는 하나에게 마치 동생과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하나는 자신 이름의 한 자(字)를 따 이름 지은 것이며 그렇게 말 없는 자의 명명(命名)은 가능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비는 하나의 동생이 되었습니다.”(38)

‘하비’라는 기이한 자매를 통하여 하나는 그녀는 ‘말 없는 것들’을 향한 욕망을 포기하게 된다. 말 없는 것은 총체적이긴 하지만 인간과 연대를 맺을 수는 없다. 하지만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명명은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는 <춤>이라는 몸의 형식을 통해 하비의 날개를 닮아가고자 하며 우할머니의 <역사-이야기>와 <노래-시(꽃들의 자장가)>(54쪽 참고)를 통해 하비의 세계를 정초하고자 한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는 ‘하비’라는 실제 존재가 폭풍과 비의 시간을 지나 멀리, “보이지 않”는 곳까지 날아가는 것을 통해 명명하고자 한다(60).

이 연대에서 중요한 것은 어머니보다 <할머니>다. <할머니>는 마치 작가와 같다. 독자로 하여금 이 모든 이야기를 듣도록 함으로써 마침내 어떤 폭력적이지 않은 호명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제공하는 것 같다. 사실 다른 작품 속에서도 할머니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다. 우할머니는 하나가 없는 곳에서, 하나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그 명명된 것의 자리를 돌보는 어둠의 중요한 참여자다. 우할머니라는 존재가 없다면 하나-엄마의 호명은 동화적으로 씌어질 수 없다. 언어와 욕망은 불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부르기와 ‘할머니적인 이야기하기’의 보충을 통해 세계를 그런대로 헤쳐나가는 셈이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한 ‘허락’, 즉 일종의 타자와의 이야기적 연대를 통해, 마침내 하나는 ‘말 없는 대상’을 향한 자신의 욕망을 포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실로 이 모든 것에서 타자를 통한 작가의 ‘욕망의 포기’가 숭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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