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랙탈과 생명이 지닌 미(美)의 차이는 ‘자기 유사성’을 넘어서는 ‘변환 가능성’에 있다. 다양성과 외부성의 차이라고 해도 괜찮겠다. 변환 가능성은 외부라는 차원의 개창에 있는 셈인데 외부라는 바깥은 돈오(頓悟)가 아닌 ‘점오(点悟)’(k 선생님)로 생성되는 특성을 지닌다. 물리학의 초공간 이론을 원용해 설명하자면 하위 차원을 통할하면서 상위 차원이 생성된다고 할 수 있겠다. 프랙탈은 개입의 방식이 ‘수학적 축중’으로 고정돼 적절함(의 필요성)이 부재한다. 프랙탈과 생명이 지닌 미의 차이는 ‘적절한(reasonable)’(k 선생님) 응하기를 담고 있는 ‘역사화된 축중’에 있다. 변환 가능성은 필연적으로 ‘외부’라는 ‘여분의 차원’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정신의 개입을 부르는 매개는 몸(물질의 패턴)이라는 역사와 뗄 수 없다. 적절함은 물질과 정신의 상호 개입에서 비롯한다. 생명의 역사인 게놈에는 적절함의 진액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역사화된 축중’에는 정신이라는 여분의 차원이 개입한다. 정신이 3차원 공간을 구성하는 물질의 패턴을 담아낸 외부라면, ‘약속’(k 선생님)은 정신과 물질의 상호 개입에서 창발되는 시간성(언어성)이 부여한 ‘지금 여기’의 외부다. 마찬가지로 ‘산책’(k 선생님)은 자본의 역사와 메커니즘을 두루 섭렵한 후 개창된 외부이고, ‘동무’(k 선생님)는 자본을 구성하는 인간 관계인 친구와 연인과 가족과 신자의 외부이며, ‘알면서 모른 체하기’(k 선생님)는 의식화(정신적 표현)의 외부인 셈이다.
생명과 인간이 지닌 미(美)라는 적절함은 새로운 외부성을 개창하며 갈라진다. 개체의 역사로써 계통의 역사를 넘어서며 외부에 설 수 있는 변환 가능성이 이를 매개한다. 인간의 정신은 변환 가능성을 계통 너머 개체로 확장시킨 것이다. 인간의 아름다움이 ‘느낌’을 지나 ‘누림’(k 선생님)으로 도약할 수 있다면 그 뒷배는 타자와 맞물린 정신에서 찾아야 한다. 응하기에서 ‘에고로 기우는 이기심을 비우고 타자의 정신을 내재화할 수 있는 이타성(‘나보다 더 큰 나’)으로 변침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 되겠다. 링크한 내 오래된 컬러링인 노리플라이의 노래처럼 ‘조금씩, 천천히, 너에게’ 다가가는 ‘조심성’과 ‘시간성’과 ‘타자성’의 삼합에 의해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물질의 패턴)은 재구성되며 자라기 때문이다.
약속을 ‘지금 여기’의 ‘외부’로 설명한 대목이 흥미롭군요. ‘미(美)라는 적절함이 새로운 외부성을 개창’ 한다는 해석도요.
독하의 글을 읽으며 '자기 중심성'의 바깥으로 향하는 길들을 생각하게 되고, 우리가 어울려 공부하며 서로의 말을 향하여, 위하여, 응하여 따라가는 행위도 ‘외부’를 초대하는 행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약속, 산책, 동무, 알면서 모른 체하기와 더불어, 하고 싶은 말로(에고로) 기우는 이기심의 외부로 ‘대화’라는 공동의 노동도 등록이 가능할까요.
한편, ‘조금씩, 천천히, 너에게’ 다가가는 독하에게,
느닷없이,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을 흔들며 찾아오는 타자적 경험도 이입하게 되어요.
이렇게 저렇게 재구성의 기회를 만들어 가는 우리의 지향에 연대감이 생겨납니다.
독하, 글 잘 읽었어요. ‘살다, 쓰다’에 오랜만에 게시된 글이라 더욱 반가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