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현상'과 한국적 교양의 실패'의 강연, 그리고 그 후
윤석열 사태는 권력 엘리트층의 민낯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윤석열 현상과 한국적 교양의 실패'라는 주제 아래, 어떤 지성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지, 산업화 민주화의 성과가 아닌 교양, 인품, 정의감 등 삶의 질적 행복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법고창신의 근대화가 아닌 청산주의 근대화를 이룬 한국은 과거와의 단절로, 교양적 인격층이 부재합니다. 역사를 만나고, 타자를 만난 후 자기로의 재귀환으로 이어질 때 교양과 철학적 지혜의 알속인 '자기이해'가 돋습니다. 정신 분석이나 철학의 최종적인 목적인 자기 이해에 실패하는 것은 곧 교양의 실패이며 그것이 우리 사회의 현주소입니다.
'박학(博學)의 계몽과 합리적 소통, 토론과 내적 성숙에 진지하게 박진하려는 애씀에 이르지 못하는', '자본제적 경쟁 사회에서 잠시나마 놓여 나는 이완의 느낌', 그 느낌과 경험마저도 상품으로 배치되는 인문학 열풍을 되돌아보며 선생님께서는 느낌 대신 누림을 제시하셨습니다. 느낌이 물질적이고 순간적인 것이라면, 누림은 정신적인 것으로 자신의 오래된 생활 양식과 연동된 것입니다. 삶의 자리에 누림이 들어서면서 제 몸과 세계가 만나는 접점을 찾아가며 '국가가 실패한 자리에 학인 개인이 다르게 개입'하는 실천이 됩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은 오직 대조(對照)에서만 강렬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고, 상태에서는 거의 즐거움을 얻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고 말합니다. 그런 심리 구조 때문에 행복해질 가능성이 제한되어 있기에 인간은 변화를 위해서 새로운 관계, 새로운 상품을 추구합니다. 누림에 박진하려면 반복되는 변화를 추구할 것이 아니라 제 정신이 도달한 상태, 제 몸으로 일구어낸 상태에 만족해야 합니다.
결국에는 생활만이 남고, 그 위에 건축이 가능합니다. 삶의 ‘결’과 조직을 바꾸어가는, 자기 삶을 위한 공부, 즉 '근본적인 실용성', 생활 속의 실용적인 변화가 공부의 실효임을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셨습니다.
강연 그 이후, 선생님의 생활 가운데 자리한 누림의 양식을 소개해주셨습니다. 그 전문을 옮겨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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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십년 간 경행(經行)에 애쓴 덕으로 걸어도 남과 다르게 걷고 앉아도 남다르고, 호흡이 몸을 지나는 방식이 남과 달라, 이를 일러 ‘누림’이라고 한다. 수십년 간 겉모습의 패턴(pattern智)을 읽어 그 속을 훔치는 길을 알고자 애썼고, 이로써 너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 속이 저절로 떠오르는데, 이를 일러 ‘누림’이라고 한다. 나는 수십년 간 ‘알면서 모른 체하기’의 기별에 접속하고자 애쓴 덕에 이제 때론 꿈의 정교함이 현실을 넘어가는데, 이를 일러 ‘느낌이 아닌 누림’이라고 하는 것이다.
(출처: 선생님 블로그https://blog.naver.com/kdkgkei/223885497671, '느낌에서 누림으로 ')
선생님의 생활 양식과 연동된 누림은 그것의 개념을 좀 더 분명하게 재정립하게 합니다.
누림은 자신의 준비된 개입 그리고 실력 가운데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새깁니다.
※ 위의 글은 2025년 5월 31일 장강에서 선생님께서 하신 강연과 선생님의 원고를 바탕으로 제가 임의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 강연 사진 - 는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