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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영화보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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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   리   말


한 학기 내내 책 한 권 제대로 독파하지 않는 대학생 선남선녀들도 서편제안 본 것을 마치 부모 상()에 빠지기라도 한 듯 민망해 하는 풍조를 대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섹스조차도 일종의 관성체계이므로 퇴행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영화 보기만큼의 지속적인 유인(誘引)으로 공부할 수 있는 방식만 계발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무릇 공부는 몸을 닦는 것(修身)으로 시작하고, 수신은 공감의 방식이 으뜸인데, 영화만큼 쉬 감동을 주는 소재를 어찌 학인들은 여태껏 제대로 수렴하지 않고 있었더란 말이냐.


*   *   *


중학교 2학년 되던 해의 초겨울, 당시 부산의 보수천변에 있었던 영남 극장에서 청춘물 여고 시절>을 보고 있던 나는 시내 고등학교의 체육교사들로 구성된 '합동단속반'에 붙잡혀 신나게 얻어터지고 명찰까지 뜯기는 수난을 당했다. 까까머리 중학생 놈이 여고 시절에 관심을 가진 대가쯤으로 스스로 내 분함을 삭이고, 근근이 명찰을 되찾아 정학을 면한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했던 기억이 선한데, 결국은 그 아픔이 제대로 씻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세상에 대한 복수심에서 글쓰기의 힘을 추스리는 이들이 있듯이, 나는 내내 복수의 염(念)을 부추겨왔던 듯 하다. '합동단속반'을 이번에는 내가 '합동으로 단속해보고 싶은' 음모 말이다.

 

*   *   *


이 책은 우선 '일상성의 철학'이라는 시론을 어디에서부턴가 출발시켜보고 싶은 욕심에서 비롯되었다. 철학의 일상화니 세속의 철학적 수렴을 거론하는 이들은 적지 않지만, 이 목표를 구체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제재를 영화로 이해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철학자가 눈에 띄지 않았던 것도 내 구미를 당기게 만든 요인 중의 하나였다. 나는 가령 <스포츠 서울한 부나 선데이 서울한 권을 읽고서도 양질의 철학책 한 권을 완성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인데, 영화처럼 이미 상상력이 극대화되고 구성력이 탄탄한 이야기 거리가 주어진다면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급소'가 없어졌다고 다들 법석이고, 그 법석에 재치 있는 치장을 하느라 또 법석인 지금, 선선한 일상의 이야기 거리를 바탕으로 삶과 세상의 이치를 따져보는 것도 뜻이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문화비판을 철학적 탐색의 영역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바람이 또한 이 책의 성격을 어느 정도 설명해줄 것이다.

이제는 명실공히 문화가 전 인류의 인식 및 존재의 범주로 자리를 잡은 것 같고, 특히 영상매체는 인식론의 혁명이라고 불릴만한 영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영화를 소재로 문화 철학의 가능성을 확인해보고자 하는 바람은 단순히 시의적인 선정(煽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어쨌든 삶의 일상성이야말로 여러 학문의 모태인 만큼, 영화등속의 통속한 문화매체를 철학의 장으로 수렴하려는 시도는 매우 자연스러운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삶의 터는 이제 빈 곳이 없을 만큼 문화의 세례를 받고 있으며, 또 넓은 의미의 문화만큼 지속적이고 교묘한 힘도 없으므로,힘비판>을 지향하고자 하는 내 철학의 한 단초가 문화비판의 형식을 띠고 나타나는 것도 자연스럽다고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여전히 우리 인문학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네 번째 첩이 낳은 자식 - 그나마 손발은 졸아들고 머리통만 키운 기형아 - 쯤으로 폄시당하고 있는 이 땅의 인문학은 발붙일 곳도 없어 차마 가출을 서두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너 슬픈 나라 대한민국이여, 호풍환우하는 홍길동도 첩의 서자인 줄 잊었느냐.) 일방적으로 수입된 근대화의 병증, 철학적 혜안이 전무한 정책 입안자들의 근시현상, 그리고 자본의 논리에 휘말려 인간을 잃어버리고 있는 일반 다중(多衆)들이 합의도 없이 공모하여 '쓸모없이 말만 많은' 인문학을 희생제물로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무릇 인문학의 바탕은 인간이니, 하기야 인간 이 죽은 땅에서 제대로 된 인문학이 설 수 있으랴. '영화의 철학'이라는 분야를 정착시켜보고 싶은 내 욕심은 인문학의 무덤에 바치는 한 송이 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 그러나 역사를 아는 자 누가 인문학을 두려워하지 않으랴.

 

*   *   *


영화철학의 서()로서 쓰여진 이 글은 일상성의 철학, 문화 ()비판, 그리고 불우한 이 땅의 인문학에 바치는 헌사로서 읽혀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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