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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과 천변을 함께 걸었던 몇몇 동무들에게’
│ 서문 │
비평의 조건, 혹은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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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스(R. Wiliams)나 르페브르, 혹은 베블렌 등이 잘 지적했듯이, 문화비평은 일상의 낮은 자리로 스며든다. 그런 점에서 비평은 그 자체로 공부다. 공부가 아닌 비평은 부레처럼 뜨기 때문이다. 습작이라는 기나긴 발효의 시간, 그리고 그 발효가 마침내 내열(內熱)을 숨기고 차분해졌을 때에 스타일이 생긴다는 고호의 말처럼, 이론의 열정을 묵히고 그 모서리들이 숙진 다음에야 우리는 비평가의 눈으로 문화를 얘기할 수완과 지혜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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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문화비평은 일상의 정치성에 주목한다. 바로 거기에, 일상을 다루되 문학과 갈라지는 지평이 생긴다. 일상이 어떤 삶의 양식이라는 채널을 통해 진지화(陣地化)할지, 혹은 영원한 변화의 영도(零度)로 남을지는 바로 거기에서 결정된다. '신화가 된 자연’(바르트), ‘풍경'이라 는 틀(가라타니 고진), '차이뿐인 차이' (이글턴), ‘심오함의 무정치성’(아도르노), 그리고 '태도로서의 무장소성' (E. 렐프) 등을 비판적으로 넘어서려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런 점에서, 문화비평은 역사학과 사회학이 겹치는 그 첨단의 지점에서부터 오히려 삶의 조직 속으로 가장 깊이 들어가려는 감수성이다. 비평은 공부이면서 공부 이후의 글쓰기일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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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전히 문화비평은 문학적이며, 문학적이어야 한다. 가령, 이것은 ‘표현 인문학'이 표현을 인문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작업에 그칠 것이 아니라 인문학을 표현적으로 재구성해야 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문화비평의 비평적 글쓰기가 그 자신의 신체를 '문화적'으로 재구성하는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이 굳이 '문화' 비평일 필요가 없다. 여기에서 일부 문학 비평가들이 비평문 그 자체의 문학적 가독성을 제고하기 위해 애써 온 노력을 상기해도 좋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가독성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낮은 자리 속에 정박하려는 미래 인문학적 체질변화와 관련된다. 내가 오랫동안 뜻의 학문(기의중심적 관념론)과 글의 학문(기표중심적 물질론)을 지양하는 사잇길을 택해온 것 역시 이 체질변화의 문제다. 가령, 헤겔과 실증주의의 사이에서 그 창의적 긴장을 글쓰기로 개화시킨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 등의 길을 되새겨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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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이 이론 이후의 실천이라는 사실에서, 그리고 비평에서의 금기는 무엇보다도 이론들에 휘둘려 언거번거해지는 것이라는 사실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비평은 곧 타자성의 실천이라는 점이다. 이론들이 흔히 해석의 틀로 기능하고, 해석이 자기차이화의 변증법이자 나르시시즘(동화)의 체계화로 굳어갈 때, 비평은 자신의 몸을 끄-을-며 나아가는 곧 해석 이후의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마르크스의 근본적 문제의식-'해석이 아니라 변화!'-에서 그리 멀지 않은 태도다. 그렇기에, (똑똑한 이들이 무엇보다도 해석의 무한성에 탐닉하고 스스로의 지성을 번득이면서 섹스의 쾌락과 유사한 소급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고 쳤을 때) 비평은 해석과 함께 해석을 넘어서는 실천 속에 그 본령이 있다. 그러므로 비평적 진실은 지성(Intelligenz)과 생활의 지혜(Lebensweisheit)의 사잇길을 타는 노릇을 깨치며 그것을 부단히 실천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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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리야르처럼, 주체를 개인이 아니라 기호의 질서 속에 기입하는 것, 욕구를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차이 그 자체에 대한 것으로서 결국 생산체계에 물려 들어간 생활양식의 일종으로 여기는 태도, 그리고 체제를 개인의 실존적 내용에 대해서 완벽히 무관심한 형식으로 보는 것은 명백한 과장이며, 영리하고 진보적인 지식인이 체계와 마찰하면서 얻는 고급한 냉소주의쯤으로 보인다. 한편 이것은 새로운 물신주의와 '정신상태로서의 키치'(A. 몰르)의 시대에 적절한 분석처럼 보이기도 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국내 상황에 대한 현 단계의 분석에서, 개인을 체계 속에 완전히 함몰시키는 짓은 개인을 역사의 출발점으로 삼는 전통 부르주아 철학만큼이나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어쩌면 개인과 체계 사이의 구조적 인과, 그 겹의 간접화와 그 결과적 다양성을 비평의 다족(多足)으로 주무르는 것은 해석에 탐닉하는 지식인들에게는 오히려 너무나 상식적이다. 비평은 칸트식의 비판도 아니지만 초기 로크(J. Locke)식의 경험주의적 단편들도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도 전혀 별스럽지 않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북친(Mumay Bookchin)이 통속화시켜 표적으로 삼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차이지상주의도 아니고, 개인들의 상호작용을 체계의 단말기로 흡수해버리는 체계기능주의(니클라스 루만)도 아니어야 한다. 실은, 차이성과 체계성이 서로 구조적으로 연동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며, 따라서 차이-체계의 분법을 전제하는 논의의 근본적 한계, 나아가 그 자가당착을 따져야 한다. 오히려 문제는 체계 속의 차이들이 만드는(만든다고 믿는) 다양성의 허위의식이다. 말하자면, 차이들의 수렴처(收斂處)를 애초부터 식민화한 체계가 그 체계의 변명으로 내세우는 다양성은 적실한 변명이 아니라 결국 체계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다양성은 외부성의 환각을 안겨 주며, 차이들은 결국 그 다양성의 나르시스로 기능할 뿐이다. 가령, 바디우(Alain Badiou)가 ‘인권의 정치'와 '차이의 정치'를 비판하면서 주체의 충실성에 근거한 '진리들의 윤리학'에 천착하는 것에는 그 나름의 맥락과 이치가 있다. 지라르의 표현을 빌리면, 외부성을 향한 그 제스처는 ‘낭만적 거짓'에 지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인류학적 관습의 다양성과 그 제의적 성스러움을 묘사하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관습의 희생자의 편에 서야한다는 그의 지론은 체계 속에서 외부로 나아가는 틈새-비평에 대한 좋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현단계의 비평은 차이-체계의 사이비 분법이 전제하는 이데올로기적 환각에 복무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비평은 차이가 체계의 알리바이가 되고 체계가 차이를 관용적으로 재생산하는 순환적 공모의 진실을 비판적으로 응시하고 대면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물론 그것은 다양성이 아닌 외부성을 가리킨다. 언어를 인지주의적 사용에 제한할 수 없는 것처럼 비평은 어떤 생활의 양식과 연동하며, 필경 다양성의 환각이 무너지는 곳으로 몸을 끄-을-고 나아가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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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은 다족류(多足類)의 자기탐닉적 해석이 아니다. 이해는 ‘필연적으로 해석'(가다머)이지만, 해석이 그 자체로 이해인 것은 아니다. 해석은 그 해석의 통일적 자기완결성을 넘어서려는 실존의 수행적 반복 속에서야 비로소 그 해석의 일리(一理)를 사후적으로 추인하게 될 뿐이다. 인식의 오연(傲然)과 해석의 태탕(駘蕩)은 사비돈제(事非頓際)의 준령을 넘어서며 등허리가 휘고 온 몸에 땀이 비오듯 하는 체험 속에서야 비로소 비평적 지평이라는 타자를 만난다. 가령, "모든 이론은 그것을 개진한 이론가가 자기, 그리고 그를 둘러싼 세계와 어떻게 싸웠는가 하는 싸움의 기록”이라고 할 때의 이론이란 곧 비평을 가리킨다.
그래서 비평은 쓴다기보다 오히려 걷는 일이다. 그러므로 홍길동식 환신술에 의탁한 동시다발적 해석의 복제가 비평의 능사가 아니다. 욕망과 돈의 기분에 따라 갈팡질팡, 언거번거해지는 시대, 비평은 제 나름의 세계관을 지닌 채 '세속’의 길을 거슬러 걷는 일관된 태도가 중요하다. 그리고(한나 아렌트가 잘 예시했듯이) 그 버티기에 드는 비용을 충실하게 치르면서 얻는 주체화의 과정은 여전히 소중하다. 가령, 지원이행방(知圓而行方)이라고 했을 때, 비평은 '지원'도 ‘행방'도 아니다.
비평의 지평은 지원과 행방이 바로 그 비평자의 생활양식을 통해 통합되는 지경을 가리키는 것이다.
2
한국의 현대철학은 상처의 문제를 체계적으로 회피하거나 억압한 자리이며, 구미(歐美)의 음성들을 청종하는 방식, 그 지르되지만 언거번거한 방식의 아류들이었다. 이것은 지난 10여 년 내가 이 땅에서 철학자와 인문학자로서 사유하고 운신할 때 1순위로 참고한 문제의식이다. 그러나 제방이 무너지면 이미 물고기의 종류를 문제삼을 일이 아니다. 이제 모든 것은 자본주의다.
내가 말하는 '산책'은 이 전일화한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을 배경으로 해서만 성립하는 어떤 태도와 실천을 뜻한다. 그 '걷는 주체'는 자본제적 셈평의 교환 속에서 우선적으로 '상처받은 사람'을 가리킨다. 산책은, 내가 '세속' 이라는 표현으로 표상한 자본주의적 체계와의 마찰로 인한 상처의 각성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내 주변에는 얼씬거리지 않는 편이긴 해도, 나는 그간 여러 기회를 통해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가 좋아 죽겠다!’는 이들을 실로 여럿 보았다. 더 나아가, 기능주의화한 요약과 통일화한 언어의 프리즘 속에서 체제와 일체화한 일차원적 존재는 이제 우리 모두의 환경이 되고 말았다. 원칙상 이들에게는 산책이 불가능한데, 산책은 무엇보다도 '자본제와 창의적으로 불화하는 어떤 삶의 양식'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걷는 주체는 상처를 다독이는 리듬과 템포를 저절로 배우면서 자본제적 도시의 인력으로부터 몸을 끄-을 며 나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탈세간의 근본주의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산책은 현장을 지키며(on) 그 현장을 거슬러 걷는(against) 삶의 양식을 상징하며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산책은 단지 부재(不在)와 무욕의 소실점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특정한 종류의 창의성과 생산성을 가리킨다. 그렇기에 산책은 혼잣걸음이기 이전에 '동무' 들과 더불어 연대하는 삶의 방식이며 그 메타포인 것이다. 세속이라는 상처를 깊이 각성한 이들, 그리고 그 상처보다 빠르게 운신하려는 지혜의 공부길에 나선 이들은 자본주의적 체계와 창의적으로 불화하는 방식으로서 동무들과 나란히, 혹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몸을 끄-을-며 걸어 나간다; 산책이라는 어떤 삶의 양식을 통해 걷고 연대하며, 배우며 바꾼다.
그 외에도, 산책은 의도(意圖), 혹은 자기-생각과 싸우는 실천의 방식으로 주목해야 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의 의도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짓에 이드거니 대항하는 삶의 방식을 통해서만 타자들의 세계는 드러난다는 것, 그리고 마찬가지로 생각은 도무지 공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공부가 에고적 관성과의 싸움이라는 낡디 낡은 명제는, 그 어떤 첨단의 이론들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지점이다.
굳이 한 가지만 더 짚자면, 산책은 산(散)-책이니, 그것은 인문(人紋)에 고유한 부재와 정적의 상징적 가치를 실천적으로 되새기는 방식이다. 산책은 어떤 빈터의 체험이기도 한데, 우리는 그 빈터의 황막(荒漠)을 겸허하게 대접하는 방식을 통해서야 소유와 욕망의 나르시시즘을 어리석고 슬픈 과거처럼 기억하기 시작한다. ‘동무'라는 없는 관계는 산책의 소실점 속에서, 부재의 사치가 발생하는 그 존재론적 겸허함 속에서 발아(發芽)하고, 그 부재 속에서 번득였던 삶의 진실에 지며리 충실하는 삶의 양식으로써 수확한다.
산책은 무엇일까? 글쎄, 그것은 아직, 여전히, 아무것도 아닌데, 바로 그 까닭에 그것은 자본제적 삶의 양식과 생산적으로 불화하는 부사적(副詞的) 사이공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