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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말 배우기' (k 선생님)

소싯적 명절이나 제사 때면 부엌에서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먹을 것이 충분하지 못했던 때라 부엌은 진귀한 음식으로 가득찬 보물 창고로 보여 자주 드나든 기억이 있습니다. 가까이서 듣게 된 어머니를 위시한 크고 작은 어머니들(어머니들의 크고 작음마저 남성의 위계를 따릅니다)의 웃음꽃은 조금은 경박하고 천박해 보일 정도로 가장된 연극성이 도드라졌습니다. 어린 나이에는 그 '연극적 정동'의 가치를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남성조로서 식사를 준비하며 나름의 비용을 들이다 보니 ‘부엌의 수다’가 피어올린 웃음꽃의 가치를 조금 겹쳐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자리에 서서’ 배운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부장제는 수컷과 암컷이라는 일차원적 동물성을 제도로서 위장하며 남성과 여성으로 살짝 바꿔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가부장제라는 체계 속 며느리들은 일차원적 폭력성에 노출된 여성(性)이라는 약자인 동시에 씨족 사회로 구성된 공동체에서 소수의 성(姓)을 지닌 방외자로서 약자이기도 합니다. 

가부장의 성씨와는 ‘다른’ 제각기의 성을 지닌 여성들이 남성의 체계가 부여한 부조리한 틀 속에 ‘웃음꽃’이라는 연극적 정동을 매개로 사회적 연대를 공고히 해왔습니다. ‘부엌의 수다’를 유심히 그렇기에 무심히 살피면 적의가 부재합니다. 해하려는 마음이 없기에 일을 매끄럽게 흘러가도록 돕는 매개가 되고 서로의 노고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말들로 그득찹니다. 공치사(功致辭)가 공치사(空致辭)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엌의 수다는 우열을 가리기 위한 말도 아니고 진위를 가리기 위한 말도 아니며 선악을 구분하기 위한 말도 아닙니다. 약자로서 가부장이라는 사회가 부여한 틀을 우회하는 방편으로 연대를 위한 겹침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공동체의 근간이 되는 '공동의 노동'을 매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공부를 하기 전에는 여성의 일방적 노동이라는 부조리한 대물림을 끊어 보겠다며 부엌에 기웃거리는 것을 거쳐 명절과 제사의 불참을 선언해 아버지와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별 요령 없는 남성의 말은 의도와 다르게 중간에 처한 여성을 곤란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여성의 말을 배우지 못해 우회할 수 있는 꾀와 수완이 부재했기 때문입니다. 남성조로서 식사 준비를 통해 피할 수 없는 체계라는 부조리한 틀을 유연하고 부드럽게 우회하는 ‘여성의 말’을 배우는 시간을 갖습니다. 타자의 자리에 서보는 기회는 흔치 않은 귀한 일입니다. 물론, 그 결실은 시혜성 이벤트가 아닌 일상에 내려앉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언어로써 그 결실을 굳이 표현해 보자면 ’장숙을 만나 우리 남편(아버지, 아들)이 달라졌어요‘ 즘 된다고 할까요. 남성조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부족한 초행길에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준 동학들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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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인 2025.08.17 12:41
    밥 한 그릇 잘 준비하고, 밥 한 그릇 잘 먹을 줄 알면 공부는 다 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동학들이 잘 먹는 모습에서 왜 엄마는 내가 맛 있게 먹는 모습을 환한 얼굴로 보고 있었던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족보 없는 음식이지만 좋았다는 선생님의 격려 말씀은 하면 된다는 자신을 심어주었습니다.
    족보 없는 음식으로 길 없는 길을 개창하려는 4조 남성팀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