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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타자· 역사가 있다

(아홉 개의 문장을 통해서 몽양을 말해보다)

 

1. 그 사람의 생애가 압축적으로 시대정신을 잘 보인다. (20251025, 192회속속강의에서)


이날 강의에서, “헤겔에 따르면, 역사를 추동시킬 때 어떤 사람이 등장해서, 그 사람의 생애가 압축적으로 시대정신을 잘 보이는데, 민족사의 내공이나 질곡이나 상처나 분열을 통시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키를 몽양의 생애를 통해서 확인해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하셨다.

 

부족한 대로 몽양의 생애를 읽어나가면서, 나는 이 시대의 시대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독립(獨立)과 융합(融合)”이라는 두 말의 복잡함을 조금이라도 헤아려볼 수 있었습니다. 이씨조선왕조가 막을 내리는 즈음에, 역설적으로 조선의 독립이라는 말이 탄생했습니다. 왕정의 종말과 근대의 도래라는 전혀 새로운 역사의 시작 앞에 맞닿아 있는 시대였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왕정의 종말과 근대적 제도개선을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전술사업으로 떠넘겨버리게 되었고, 그들이 자신들의 야욕에 맞게 사용해버리는 것으로, 주체적으로 성취해야만 하는 근대의 가능성을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조선인들의 이름을 빼앗고 말과 글을 금지하고, 저희들의 말과 글을 사용하게 했으며, 저희들의 신전(神殿)에 참배를 하게 하면서, 이 땅의 정신을 거의 말살시키고 고사시켜나갔습니다. 철길을 놓고(경의선-1896프랑스1904일본/경인선-1896미국일본1898/경원선-일본1904/경부선-일본1898), 전등·전화·전차 (부설권미국1896)가 설치되고, 학교가 생기고 자동차가 다니고, 온갖 근대적인 제도가 만들어지고 씌워지고, 이틀에 한 끼 먹던 형편이 하루 두 끼 먹는 형편으로 변화하였다고 하더라도, 근대는 새로운 주체의 탄생이 불가하다면 근대라 할 수 없는 것이고, 그 주체는 이 땅의 이름과 신명으로 환하게 웃는 얼굴인 것입니다. 현대사상가들의 언어에로의 전회무의식은 언어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문장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말이 소멸되어가는 동아리의 무의식(정신)은 꺼져가는 불꽃이지요, 정신의 불이 가물가물 꺼져가고 있을 때 독립이 완료되었지만, 그것은 논리적으로 성립이 불가능하였습니다. 싸워서 이겨 독립을 쟁취한 주체가 없었고, 그렇게 해서 형성된 주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조선인이 될 수 없었고, 주권이 없으니 한국인도 아니었지만, 조선인이라고도 했고 한국인이라고도 스스로를 칭하고 있었습니다.

 

해방의 공간에서 연합국은 너희들은 신탁통치를 받아야 될 해방된 국가야,라는 생각이었고요, 한국인들은 우린 즉시 독립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이 양자의 인식차이었습니다. (정병준 딴지일보강의에서, 몽양평전의 저자, 역사학자)

 

좌우합작은 어떻게 보면 몽양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느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해방이 되기 직전까지 한국에서 국내에서 움직였던 중요 정치 세력들, 공산주의자를 포함해가지고 우익이건 좌익이건 거의 전부 다 몽양과 연결 되어서 활동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세력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람은 몽양밖에 없다. 해서 몽양과 거의 다 연결이 되어 있었어요. 좌우합작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람도 따지고 보면 여운형을 빼놓고는 없었습니다.

서중석(역사학자, kbs역사저널그날)

 

당시 주권이 없는 이상한 땅이었으므로, 역설적으로 그때 지구상에서 뜨거웠던 모든 이념과 신념과 이데올로기가 거의 다 이 땅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극좌에서 극우까지, 미국과 소련의 이데올로기가, 게다가 일제의 숨은 세력들도 남아 있었겠지요. 이 땅에서 분단과 충돌(전쟁)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융합(融合)뿐이었고, 가장 현실적인 주장이었습니다만, 한국인들은 그곳에 서서 그 말을 하고 있던 몽양을 향해 총을 발사했습니다. 자주적인 민족주권과 통일을 깨뜨렸습니다.

 

통합은 이데올로기의 힘이다. (10/25속속강의에서)

 

통합(융합)을 위해서는 이데올로기가 필요했습니다. 더 이상 조선인일 수 없는(더이상 일본인일수도 없는), 한국인들이 스스로를 한국인이라고 말할 수 있도록 딛고 설 수 있는 말(이데올로기)기 필요했습니다만, 말의 역사는 삶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때 스스로를 한국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절을 전혀 살지 못한 채였습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으니, 무슨 사상이나 다 들여와야만 하는 형국이었습니다. 1945816,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해방되고 석방된 사상범들과 정치범들과 더불어, 휘문고보까지의 노정에서 모여드는 사람들과 몽양은 스스로가 독립된 한국인이라는 첫 말을 외쳤습니다. 모여 든 사람들과 더불어 그는 건국준비위원장의 자격으로 이 말을 선창했습니다. 말이 해방된 첫 자리였습니다. 말이 살아갈 땅이 해방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몽양은 통합의 첫 번째 발화자였습니다.

 

미국식이나 중국식이 아니라 우리식으로 세계의 모범이 되면서, 앞서가면서, 다같이 조화롭게 갈 수 있는 자신감을 발휘할 수 있는 때가 시작되고 있다.

(2025115, 경주APEC 이후 김민석 총리 인터뷰)

 

정치인 몽양의 첫 말이 있은 지 80년이 지나서야, 정치인 김대중을 지나 정치인 김민석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다시 미국식이나 중국식이 아니라 우리식으로라는 말을 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소련 대신에 중국이 들어와 있습니다. 80년 동안 미국식이나 소련식이 아니라 우리식으로라는 정치노선은 억압되어 있었고, 이 말은 때론 사람들로 하여금 히스테리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며칠 전, 정치인이자 고위관료인 김민석이 다시 차분하고 자신감 있으면서 단호하게 발화하였고, 우리는 이렇게 몽양을 다시 공부하고 있습니다. 길게 에둘러, 우리 민족은 이제 막 스스로가 누구인가 말할 수 있는 정신적이면서 육체적인 힘이 생겼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여운형을 아는 것은 역사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이다. 이것은 무의식이다. 억압되어 있는 것이다. 민족사가 바뀌게 된 역정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로서 이해한다. 이만한 인물, 세종이나 이순신 못지않다. 북한에서 김원봉을 남한에서 여운형을 죽인 것이 민족사의 비극이다.

(1025일 속속강의에서)

 

2. 완전한 한국인이었습니다. (김대중, 16)

 

이 문장이 제게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평온한 느낌을 주었는데, 이 느낌이 낯설고 이상했습니다. 이 문장은 김대중의 말이기 때문에 나는 신뢰를 합니다. 나는 이 문장에서 소박한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 한국인이라는 말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물스럽지가 않았습니다. 몽양의 생애가 그가 산 시대의 시대정신을 드러내면서도, 몽양은 완전한 한국인이라고 말해진 것입니다. 몽양을 통해서 한국인은 어떤 사람이고자 하는가, 한국인은 어떤 정신인가, 그 정신은 어떻게 나아가고자 하는가 말해볼 수 있다는 문장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분을 어떠한 틀에 맞추려는 것은 헛된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정식51-52)

 

사람들이 몽양에게 들이댄 틀을 나열해보면 한이 없습니다. 김용옥은 여운형 사상을 보면 완벽하게 동학입니다.”하고 말합니다. 동학뿐만 아니라, 유학자, 레닌주의자 스탈린주의자 공산주의자, 고려공산당원이었으며 승동교회 전도사였던 사람, 진보적인 민족주의자, 반제국주의자, 독립운동가, 기회주의자, 체육인, 좌익, 우익, 야심가, 친미주의자, 부르주아 민주주의자, 중국혁명운동에 참가했던 사람………

 

여운형은 독립운동의 중심세력이 건국의 중심세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운형의 생각은 연합군은 손님이니까 손님은 잘 대우해서 보내고 주인인 우리가 문제를 해결한다, 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굉장히 주관적이지만 주체적이고, 현실적이지만 이상주의적인 생각이죠. 그분의 사고와 논리가 그렇습니다.

(정병준)

 

아래, 1945815일 여운형-엔도 회담에서의 5개 합의사항과, 좌우합작 7개 원칙을 살펴보면, 몽양의 현실주의적이며 실용주의적인 면모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 가장 현실화되기 어렵다는 정세가 이 현실성을 이상적이라고 여기게 만들고 있습니다.

 

1945815일 여운형-엔도 회담 5개 합의사항

 

(1). 정치경제범 즉시 석방(정치범석방)

(2). 8-103개월 식량확보(식량확보)

(3). 치안유지와 건설사업 구속, 간섭 말라(치안유지확보)

(4). 학생훈련과 청년조직 간섭 말라(집회결사의 자유)

(5). 각사업장 노동자의 건설사업 협력

 

좌우합작 7원칙

 

(1).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

(2). ·소 공동위원회 속개 요청

(3).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 배급, 중요 산업 국유화

(4). 친일파, 민족 반역자 처리 조례 제안

(5). 남북 좌우의 테러 행동을 제지

(6). 입법 기구 운영은 합작 위원회에서 작성 실행

(7). 언론 집회 결사 출판의 자유 보장

 

한국인의 일상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현실적이면서 정직한 관념과 이상은, 그것을 실현시켜나갈 조직과 권위를 창설하는 데 안팎에서 끊임없는 방해를 받았습니다. 성군이 되어 선정을 베풀고자 했던 왕도정치나, 자신의 공부를 현실을 개선하는 데 써야한다는 선비정신이 그때까지의 한국적 정치사상이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까요? 몽양은 정확하게 정세를 판단하고 현실을 개척해나갈 관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권력을 잡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있는 정부를 한반도에 세워두려 했고, 몽양은 그들과 주체적으로 협상하면서 독자적인 정부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스스로 타협하지 못하는 지점입니다. 변명하면서 권세를 얻는 대신에, 스스로가 옳다고 여긴 정신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변절하지 않았으며 포섭당하지 않았습니다.

 

한반도는 오랫동안 길목이었습니다. 인문학은 지리학이기도 하지요, 사람의 기질은 이런 식으로 지리적인 여건으로부터 설명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대륙에서 힘이 뻗어 내려올 때마다 길을 열어라라고 요구했고, 일제는 대륙으로 향하도록 길을 내어라고 요구했겠지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목 같은 곳이었습니다. 국경은 매번 바뀌었고, 왕도 매번 바뀌었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도 매번 바뀌었으며, 느닷없이 다른 깃발을 들고 들어서는 통치자들이 있었으며, 한 가지 종교를 가진 땅도 아니어서, 종교분쟁 따위 없이 온갖 종교들이 다 들어와 살 수 있었으며, 지나가다가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사람들도 살았습니다. 잔혹했던 연산군이나 이승만이나 전두환도 죽이지 못했지만, 전두환을 석방하는 김대중 또한 몽양처럼 차마 잔인할 수 없었던 정치인이라고 변호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연산군이나 이승만을 쫓아내기만 할뿐, 차마 죽이지 못하는 비정치적인 선량함이 있습니다. 굽히지 않으면서도, 잔혹한 자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깊은 내공(고통)이 있지요. 약탈이 극심하면 수레가 다닐 수 있는 길을 아예 만들지 않았습니다. 땅길이 없으면 물길로 약탈자가 들어왔으므로, 물길이 닿지 않은 곳으로까지 밀려나가 살았습니다. 오솔길 사이사이에는 삶이 있었고, 가느다란 신명이 살아내고 있었습니다.

 

공동체의 신명은 그들의 음악과 춤과 노래를 따라서 피어납니다. 아직 남아 있는 전통음악과 무가舞歌에는 단순한 특징이 있습니다. 시나위는 몇 개의 기본 장단이 있을 뿐이고, 나머지는 함께 모여 앉은 악사들이 자신들 멋대로 악기를 연주하며 어울립니다. 기가 막히게 어울립니다. 악기도 정해진 게 아니라 그때그때 거기 있는 악기들이 어울립니다. 악기가 없으면 목소리로도 어울립니다. 풍물이나 사물(四物) 또한 그렇습니다. 몇 가지 정한 가락이 있지만 세부적인 소리는 각자가 알아서 기교를 부립니다. 춤도 그렇습니다. 제례의 일무(佾舞)외 여러 사람이 한 가지 동작으로 추는 춤은 아예 없습니다. 집단과 권위를 웃어버리는 해학이 있지요. 여고를 다닐 때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 이라는 노래에 맞추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짧은 붉은 반바지를 입고 태극기를 휘두르며 춤도 아니고 체조도 아닌 매스게임을 했었습니다. 춤의 신명을 거세하는 교육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노래는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노래는 신물이 납니다만, 아직도 머릿속에서 쟁쟁 울리고 있습니다.

 

융합의 이데올로기는, 결코 쉽게 통합되지 않은 한국인들을, 왜 늘 당파지어 다투는가? 왜 늘 쏠려다닌는가? 라며 집단적으로 싸잡지 않고, 오히려 통합되지 않는 기질과 그 역사를 풍요롭게 말할 수 있으면서 가능해질 것입니다. 몽양은 한국인의 기질을 내보이는 삶을 살았습니다.

 

당시의 객관적인 정세를 놓고 보면, 이 객관적 정세 속에서 한국을 통일 독립시키기 위한 가장 이상적인 현실적인 요소는 미소남북좌우의 협력합작노선입니다. 가장 현실적인 노선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것을 한국현대사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느냐, 가장 이상주의적 실현 가능성이 없는 노선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정병준)

 

3. 나는 모스크바에서 레닌을 만났다. (여운형, 1930京城지방법원 검사국 調書에서)


평심하게, 고르게 들을 수 있으면 그제야 응해서 말하게 된다.(조각난지혜184)

여운형은 소통을 했던 정치인이다. 적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었다. 미국뿐 아니라 소련하고도 이야기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것이 정치고 그것을 안 하면 전쟁이 납니다. (박태균)

국가간 갈등은 필연적인 것이다.(2025년 경주APEC에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 모두 발언에서 시진핑)

 

몽양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남이 하는 모든 말은 어리석은 게 없다.(10/25속속강의에서)”를 헤아리고 견지(見地)하고 응할 수 있는 실력이 있었습니다. 만나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말을 나눈다는 것은, 무의식의 교류에 다름 아닐 터이므로, 정신의 교류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조선이 무너지면서 역설적으로 조선인들은 조선의 정신을 이끌고 전혀 다른 정신을 만나기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타자를 만나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그러므로, “사건이라고도 말해지고 있습니다. 몽양은, 갈등의 접선으로 나아가 평심하게 말을 나누면서 재바르게 배워나갔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전선을 그으면서 만남을 차단하지 않았으며, 필연적인 갈등의 접점으로 나아가 대화를 하고자 했던 정치인이었습니다.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여운형은 2회에 걸쳐 레닌을 회견했는데 후일 그 소감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나는 모스크바에서 레닌을 만났다. 그를 만나기 전에는 러시아가 한국에 공산주의를 그대로 선전하려 하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 그러나 만나보니 나의 의구심은 사라졌다. 레닌은 현재의 한국을 농업국가로서 계급의식이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선 민족주의를 실천해야 한다고 말했다. 레닌의 이 같은 주장은 내가 전부터 가지고 있던 정치이념과 완전히 일치했다.” (67-68)

 

몽양과 레닌의 만남에 대한 짧은 기록을 보더라도, 몽양이 그 대화를 통해 무엇을 얻고 배웠는가 파악할 수 있습니다. 레닌은 자신의 공산혁명이론을 몽양에게 설파했겠으나, 몽양은 레닌의 사상을 들으며 민족이라는, 조선인에게는 없던 새로운 개념을 얻습니다. 한국인을 융합시켜낼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을 만난 것입니다.

 

 

몽양은 19191221일 일본으로 가서 일본의 척식(拓植)장관 고가(古賀㾾造)를 만났다古賀㾾造(고가 렌조오):……일한합병에 대하여는 나 개인은 이에 반대하였소. 그러나 양 정부가 이미 합병한 이상에는 나 의 의견은 소멸된 것이오. 그러나 조선의 실력이 충분해진 뒤에 일본과 정치를 같이 하기를 바라지 않거나 자치를 요구하거나 함에 대하여는 나의 의견이 미칠 수 없는 바이외다. 요컨대 오늘에 있어서 조선을 부강케 하는 것만이 최선의 요건으로 생각합니다.……夢陽:……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통치하는 데는 자연히 정치상 또는 경제상 충돌로 인하여 서로 용납하지 못함은 역사적 사회학적 경제학적으로 중명된바 분명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과거 10년 동안만 하여도 자유발전에 대한 손실이 적지 않았소.……일한합병의 형식을 유지하고자 하는 동안 두 민족의 상쟁은 물론이거니와 중국(지나)의 일본배척(排日)이 끊일 날이 없을 것은 자명하오.……중국은 일본과 마관조약으로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였는데 일본은 중국에 대하여도 사기하지 않았습니까? 이러므로 일한합병은 동양평화의 파괴의 근원이 되었소. 그러므로 조선독립은 동양평화의 보장이 되는 것입니다. ……동양 자체의 평화를 위하여 세계 대세의 균형을 확보하기 위하여 또 동양이 단결하여 세계문화에 공헌하기 위하여 하루바삐 조선은 독립하여야 할 것이오. ……외교로 말하면 우리는 침략을 하려는 야심은 없고 다만 정의와 인도주의에 굳게 서서 세계평화의 선봉이 되어 문화로써 세계에 웅비하고자 하는 욕심밖에는 아무것도 없으므로 시기를 받지 않을 것이요 또 지리적 전략적으로 보아도 한국의 독립은 동양평화와 세계평화의 요새가 되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의 존중과 옹호가 있을 것이며, 또 그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예의를 존중히 여기고 외국인을 공경하여 친절히 대우하는 특성이 있으므로, 정치상의 외교는 그만두고 국민외교로만도 넉넉합니다.

(189~202쪽 선별 인용, 상해에서 발행되던 임정의 독립신문, 1920111일자와 23일자 재인용


 몽양과 일제관료와의 대화록을 읽어보면서저는 영국관리를 만나 당신들 부끄럽지 않게 인도를 인도인들에게 내주라고 차분하게 말했던 간디를 떠올렸습니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일제식민지의 정당화 논리를 전복해내는 논리가 몽양에게 있었습니다. 이것은 슬로건이나 외침이나 호소나 분노가 아니라 논리였습니다.


4. 한국이 독립한 후라야 동양이 참으로 단결할 수가 있다. (여운형, 동경제국호텔연설에서)


네 번째 문장은 순전히, 당시 일본의 조선합방에 대응하는 논리가 우리에게 없었던 안타까움과, 당시 일본의 논리에 다 순응하고 스스로를 변명하기 위해 친일에 앞장섰던 조선의 지성을 안타깝게 여기며 적어보았습니다. 그리고서도 당시의 조선합방 논리가 지금까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적어보았습니다. 그 논리의 배후에는 가난한 땅과 동포와 부모와 형제를 하대하는 가슴 아픈 달변의 혀가 숨어 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네 번째 문장은 지금도 충분하게 살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입니다.

 

5. 이기적인 근본적 실용성이 필요합니다. (191회 속속 강의에서)

 

여운형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관으로 중국의 민족문제를 풀어나간 모택동보다 중국의 민족문제의 해결에 필요한 범위 내에서 공산주의,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했던 손문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최상용 69-70)

 

그러나 그는 상이한 세계관을 갖고 상이한 계급적 입장에서 출발하면서도 반일제 민족독립의 투쟁에서는 언제나 공산주의자와 제휴했다. 이 점은 좌파세력과의 연합전선을 명백히 거부한 이승만, 김구 등의 입장, 그리고 일관되게 친소 공산주의자의 전략 · 전술로 민족문제를 해결하려던 이동휘 등의 입장과 구별된다. (최상용 70)

 

몽양은 근본실용주의자라고 말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의 근본은 우선, 양반/유학자/선비였습니다. 유학의 근본은 공부하여서, 중도를 창조하는 실력으로, 사람살이를 더 낫게 만들어내는 데 그 방향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몽양은 널리 다니면서, 당대 첨예했던 사상과 종교를 만나고 배우면서도, 어느 한 곳에 정박하면서 신념주의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독립한 주체로 협상할 수 있을지언정, 실용주의 치세를 변명삼아 일제와 소련과 미국에게 포섭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근본실용주의는, 뿌리까지 쓸모가 있어야 마땅하다 배웠는데, 저는 이 뿌리까지는 다름 아닌 관념과 정신까지라고 이해했습니다.

 

6. 연암(燕巖)은 운동을 하지 않았으나 (192회 속속 강연에서)

 

지난 192회 속속에서 여일이 몽양이 연암을 닮은 것 같다고 말하자, 선생님께서 연암은 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응하셨습니다. 몽양은 스포츠와 체육을 잘했고, 장려하고, 행사를 주최했던 체육인이기도 했습니다. 몽양은 1947년 런던올림픽 참가를 위한 조선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며 조선체육회장이었습니다. 연암은 운동을 하지 않았다는 말씀을 들으면서, 연암이 만났던 언어와 타자와 역사가 몽양이 만났던 언어와 타자와 역사와 어떻게 다른가를 헤아려보았습니다. 이 차이만으로도 튼튼한 체력이 요구되었겠구나 했습니다. 새로운 시간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체력을 길러야만 했습니다.

 

(일곱 번째 테러 ) 인왕산 웃대태견을 청년시절부터 단련해온 결과 기본품 활갯짓으로 비탈길 경사면을 깊었고 그만큼 몸의 충격을 완화할 수 있었는데……(조영건85)

 

살아남기 위해서도 운동을 해야만 했습니다.

 

7. 몽양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20251025일 속속 강의에서)

 

사람(사린) 관계의 최상급은 "신뢰"이며, 최종 하한선이 "잔인하지 않기"라고 배웠습니다. 정치인을 판단할 때, “그 사람이 잔인했는가?”를 반드시 물어야 하는데, 몽양은 늘 투쟁의 전면에 있으면서도 구김이 없고 정치가라기보다 인문주의자의 풍모와 명랑함이 있었습니다.

 

8. 몽양은 널리 인정받았다

 

1945선구12월호, ‘정치 지도자에 대한 여론 조사에서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여운형 33%, 이승만 21%, 김구 18%, 박헌영 16% 였습니다. 같은 조사에서 생존 인물 중 최고의 혁명가로 여운형 20%, 이승만 18%, 박헌영 17% 김구 16%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인류의 4대 성인 주위에는, 늘 그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그의 말을 들으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인정하는 사람을 찾아가 말을 듣습니다. 사람들은 말을 찾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인 몽양 주위로는 그런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일인들도 몽양을 인정합니다.

 

그 품격에 있어서나 그 식견에 있어서 나는 드물게 보는 존경할만한 인격을 그에게서 발견했다.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여운형은 극단적인 반일주의자요, 만약 한국이 정치적 힘이 있다면, 그가 한국 지도자로서 적합한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우가키 가즈시케宇垣一成(6대총독)

 

내가 아는 한 그는 한국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일본은 그를 중요한 직책에 앉히고 싶어 했지만, 그는 일본 총독부의 얘기를 듣지 않았어요.

엔도 류사쿠遠藤柳作(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미군정도 자신들의 정책적 입지에서 몽양을 인정합니다.

 

……몽양이 통일된 조선의 초대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조영건 47)

 

이승만이 정권을 잡을 것이 분명하며, 미국의 문제는 단지 시작될 뿐이다. 미국은 한국에서 친기업적이고 상식이 통하는 정부를 만들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절대로 그러한 정부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상식적인 사람이 정권을 잡는다면 어려움은 최소화될 것이다.(김규식, 1948317, 버치문서 Box5

이 얘기는 김규식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버치의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 그는 이승만이 결코 친기업적이지 않으며, 상식도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박태균, 버치문서와 해방정국258

 

김규식과 여운형 두 사람을 동시에 내세우는 방법을 고려해야 한다. (중략) 이러한 조치는 합작위원회에 기회를 줄 수 있을 것이다.[번스가 웨커링(Weckerling)준장에게 보낸 편지, 남조선 과도정부 수반 문제, 1947329일 버치문서 Box3]

박태균, 버치문서와 해방정국260

 

김일성과 여운형은 다섯 차례 비밀회동을 하였습니다.

스탈린(김일성)으로부터도 회동 주체로서 인정받았다고 말해볼 수 있겠습니다.

선인 출판사의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에 기록된 회담 일자는 아래와 같습니다.

1차 회동 (1946210일-11)

2차 회동 (1946417일-25)

3차 회동 (1946731)

4차 회동 (1946923일 -30)

5차 회동 (19461228일 -1947110)

 

제 기억으로는, 서울 시내 전체가 제가 알기로는 그런 예가 없었습니다. 전부가 흰 빛으로 애도하는 그런 물결이었습니다. 혹 나라에서 아무리 큰 상을 받고 부귀영화를 누린 분이 돌아가셔도 누가 동원하지 않고 그렇게 자발적으로 전부 흰 옷을 입고 울고 하는 그런 모습이 과연 또 있을 수 있을까? (이수성 21)

 

9. 여운형 선생은 멋있는 한국인의 표상이었습니다. (김대중)

 

한국의 비극은 해방 후에 한국인들이 결정했다, 라고 저는 생각하는 면이 강합니다. ? 한국 정치에 중요한 인적인 엘리트들을, 중요한 정치 지도자들을 다 죽여버렸습니다. 4512월 송진우, 우파의 지도잡니다. 477월 여운형, 중도좌파의 지도자입니다. 11월에 장덕수, 역시 한민당 지도잡니다. 496월에 백범 김구, 그다음에 한국전쟁 스나미가 몰려와서 남아 있던 인적 자원들을 모두 다 휩쓸고 지나가버렸습니다. (정병준)

 

미군정(미군정청 여론조사국 1946,7)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다수의 한국인들이 원하는 통치구조는 모름(7%), 공산주의(10%), 자본주의(13%), 사회주의(70%)였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이 끝까지 친일을 하지 않았던 분들이 많다. 해방된 한국의 통치자격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판단했다. , 일본과 독일의 경제성장은 100년이 넘게 걸렸지만, 소련은 1917년 공산주의 혁명을 한 이후에 1945년에 세계 두 번째 강대국이 되었다.

(박태균, JTBC차이나는 클라스)

 

몽양은 늘 현장에 있으면서 끝끝내 변절하지 않았다. 법과 도덕의 눈치를 보지 않았으며 자기가 믿는 생활을 자신의 말에 따라서 스스로 구성하고, 창의성이 있으면서 때로는 비도덕적이지만 일관성이 있었다. 자기윤리가 있었다. (10/25속속강의에서)

 

이순신에게는 12척의 배가 있었습니다.

지금 한국인들에게는 언어 타자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멋있는 한국인의 표상”, 몽양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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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린 15 시간 전
    글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초고 수준의 거친 글이지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게재합니다. 필요하신 분들은 한 부씩 출력을 해오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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