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숙 명예의 전당에 오를 강력한 후보로 거론되는 그 분의 이모저모를 그 분 평전을 통해 살펴보았다. 내게 와닿았던 부분을 적바림해 본다.
* 안재홍이 잡지 '삼천리' 1949년 2월호에 게재한 "髑髏哲學의 司徒로 되었다"에 나타난 그의 생각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생은 극히 허망(虛妄)한 것이지만 그러한 사실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면서도 그래도 사람으로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이란 보편적 가치들의 실천을 위한 "영항불멸(永恒不滅)의 정진(精進)의 세계를 걸어가는 것"이다.
둘째, "물질로 본 인생이 북망에 구르는 한 개의 촉루(髑髏, 해골)밖에 아니 되지만," 그러한 사실을 진지하게 인식하고 살아가는 자아인 '나'는 "천하로도 바꿀 수 없는 지상가치의 파지자(把持者)"인 것을 명확하게 깨닫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셋째, "수순생사(隨順生死), 부주열반(不住涅槃)"의 가르침에 따라 중생제도(衆生濟度)를 강조하는 대승불교의 가르침도 있듯이, 인생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허망과 집착, 초월(超越)과 정진 따위 모순(矛盾)"뿐이지만 그런 속에서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보편 가치들을 붙잡고 "영항창조(永恒創造)”하며 노력하는 생애를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바로 이것이 유물론과 유심론을 통합하며 "인생을 일원화하여 살아가는 독자적인 경지"이다.
- 정윤재, 안재홍 평전, pp.216-217, 민음사, 2018
* (民世가) 자신의 의지와 비전을 당시의 정치 과정에서 제대로 실천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 이유로 다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2차 대전 이후 초기에는 비교적 협조적이었던 미국과 소련이 국제정치 차원의 냉전을 벌이기 시작했고, 그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강력한 반공주의자였던 이승만 박사와 그 추종 세력을 지지함으로써 안재홍과 김규식 등 이른바 민족자주 진영의 정치적 입지가 흔들리거나 경시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안재홍 개인으로 볼 때 그는 비록 자신의 식견과 도덕성을 활용하여 지적 리더십은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지만, 정치지도자로서 갖추어야 할 상황 장악 능력이 미약했거나 빈곤했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지도자의 상황 장악력은 조직적, 재정적, 대중적 기반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안재홍의 경우 그러한 자원들을 갖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럴 수 있는 기질의 소유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해방정국의 정치인으로 성공적일 수가 없었다. 이러한 것은 김규식이나 장면의 경우에도 해당되는 것으로 해방 이후 한국 정치에 등장했던 대부분의 민간인 지도자들(civilian leaders)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라 하겠다.
- 같은 책, p.240
2. 선생의 좌우명 "사후 100년을 돌이켜 자기를 바라보라"를 맞닥뜨리고서는 나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하고 옷깃을 여몄다. 또 그 분의 독서 좌우명인 "일생을 일하고, 일생을 읽으라"에도 큰 감동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