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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회 속속 복습 문장 모음

0/ 신입숙인을 만나며
0.1. 상인
냉소, 자기혐오, 선택적 자기계발. MZ세대가 꽉 막힌 세상을 대응하는 3가지 유형.
동학 유재 선배가 신입숙인에게 주는 말 첫머리에서 꺼낸 이야기다. 듣는 순간 슬픔이 밀려왔다. 
그런데 자신은 세가지 중 어느 것도 아닌 방법 장숙 공부를 택했다고 하며 신입숙인들에게 같은 MZ세대로서 장숙 공부에 동참한 걸 환영하며 같이 오래 공부하자고 했다. 소리 없는 큰 박수를 오래오래 보냈다. 유재선배께, 그리고 3명의 신입숙인에게도.
신입 동학 아름의 자기소개에 지난 속속에서처럼 이번에도 감명 받았다. 말을 잘하는 사람이 되려고, 그리고 다른 태도를 갖고 싶어서 숙인이 되었다고 했는데 흡사 내가 지금 바라는 바가 그의 입을 통해 나오는 듯 했다. 다시 한번 신발 끈을 조여맨다.

1/ 공부는 ‘나’의 일
1.1. 유ㅅ진
선생님께서 자유로 가기 위한 방편으로 일상생활 속에서도 규칙을 정하여 실행하신다는 말씀을 하셨다. 속속 첫날 형식에 대해 배웠던 것이 떠올랐다. 우리의 공부는 형식 속에서의 자유와 진리 그리고 창의성을 배우는 것이고, 어떤 형식을 가지고 지속하면 결국 진전이 있다는 말씀이었다. 답답하고 길이 막힌 느낌이 드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내 스스로 정한 규칙과 틀에서 이탈하는 경우가 잦았던 까닭이다.
1.2. 는길
도고일척 마고일장(道高一尺 魔高一丈). 선생님께서는 “자잘한 행위가 전부인 인생은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자기에게 운명이 생기고, 일생을 걸고 무엇을 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거기에는 사마가 붙는다”라고 하셨다. 그러니 〈모른다-모른다-모른다〉를 지식의 거울로 삼고, 〈조심-조심-조심〉을 행위의 거울로 삼으라고 거듭 당부하신다. 또 어느 글에서인가, 공부가 높아지면 귀신(神)(들)도 그를 주목하기 시작한다고 하셨다. 비록 공부가 높아지지 못했어도, 내 말의 청자가 가시화된 존재들만이 아니라는 직관이 찾아올 때가 있다. 과연 누가 듣고, 누가 보고 있는 것일까.
일생일대사(一生一大事)를 감히 의욕하고, 운명의 심부름을 수행하며, 바로 그 운명을 감당하는 형식을 얻는 〈공부〉를 하고 있다. 엎어지고 코가 깨지고 하는 비용을 비싸게 치르지 않고, ‘조심’을, ‘모른다’를 체화해 나가야 한다.
1.3. 김ㅅ연
지난번 수업에는 신입숙인 김민국씨가 자본주의시대를 살아가는 속물, 건달, 신자, 소비자 중에 ‘소비자’로서의 자신의 모습에 대한 반성을 공유했습니다. 또한 선생님께서는 질문에 대한 답이 분명하지 못해도 좋은 질문은 질문 자체로 인해 수행적 변화와 이동을 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동학의 소비자로서 자신의 모습에 대한 성찰과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현명한 질문의 중요성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저의 소비패턴과 이에 대해 질문이 없는 저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는 출퇴근 이동 중이나 퇴근하고 집에 있는 시간에 습관적으로 당근에 접속해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하염없이 검색을 하고 결국은 입지도 않는 옷을 하나 두 개씩 사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당근으로 인해 적경을 하고 중심을 낮추는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고 새해를 맞이하여 당근 앱을 지웠습니다. 새해를 맞아 여러 다짐을 하면서 돈을 절약하고 적경하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당근앱을 삭제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왜 이렇게 시간이 없고 피곤하다면서 당근앱을 하는가?’라는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했어야 했습니다. 새해에는 내 삶의 특정 패턴을 관찰하고 성찰하고 제대로 된 좋은 질문을 하는 과정을 통해 좀 더 현명한 자리로 이동해야겠습니다.
1.4. 박ㅇ름
지난 암연이장(闇然而章) 시간에 "자신의 장점 탓에 죽지 않는 자가 적다."라는 문장을 공부하며 선생님께서는 “누가 미워 보여도 장점을 파악할 필요가 있고 누가 예뻐 보여도 단점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섞여있다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저의 시각에 대하여 되돌아보게 하였습니다.
저는 세상과 사람을 예쁘게만 보려고 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청소년을 가르치던 일을 할 때에도 저는 아이들의 안 좋은 모습은 뒤로 넘기면서 예쁜 모습을 자꾸 앞에 두고 보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쪽만 보려고 한 저의 습관은 결국 그 아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따뜻하고 착한’선생님이라는 말은 많이 들었어도 어떤 ‘의미 있는 영향’을 준 사람이 되지는 못했던 데에는 그러한 습관이 먼저 걸림돌이 되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습관에 어느 정도 답답함을 느낀 적이 있었는데 선생님의 말씀을 통해 더 구체적으로 저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날의 공부가 끝나고 난 뒤부터는 어떤 사람의 단점에 대하여 알게 되었을 때 그 부분을 저 스스로 잘 소화시키고 가고자 생각하고 실천하였습니다. 책을 읽을 때에 놓치는 단어가 없이 문장을 꼼꼼히 읽으려는 노력을 했던 것과 같이 사람의 모습도 그렇게 제대로 보고 가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랬을 때 그 사람이 저에게 더 입체적으로 다가오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세상과 사람의 섞여있는 그 모습들을 올바르게 볼 수 있도록 꾸준히 실천해 나가자고 스스로 다짐하였습니다.
1.5. 상인
인문학의 질문은 많은 경우 수행에 연계되며 질문 자체가 이동을 일으키기도 한다고 하셨다. 나의 질문은 무엇인가?

2/ 공(空)과 중(中)
2.1. 김ㅁ국
선생님께서 <漢文講讀(28)-2>의 ‘무상도(無上道)’가 불교 용어로서의 ‘진체(眞體)’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하시던 중에, 노장의 ‘허(虛)’나 불교의 ‘공(空)’보다 중요한 것은 ‘중(中)’이라고 강조하셨다. 공자의 ‘시중(時中)’을 언급하시며, 이는 ‘응하기의 가장 높은 단계’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시(時)’에 대해서는 ‘보살도(菩薩道)’와 연결시켜 주셨다.
이와 관련해, ‘허’와 ‘공’은 진리의 얼굴로서 쓸모가 없지만, ‘중’은 번역된 것으로 쓸모있는 것이라는 말씀도 받아적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분배’를 통해 ‘중’에 대해 부연 설명해주셨는데, ‘중’은 ‘자기 부피가 없는 것’이며 ‘소유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해를 돕기 위한 사례로, 먹을 것을 가지고 다투는 딸들의 갈등을 ‘분배’를 통해 해소시켜주는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엄마(자기)는 취하는 것이 없으며, 딸들(남)을 돕는다고 하셨다.
실천적 맥락에서, ‘공부’에 있어서 중요한 ‘형식’과 ‘응하기’의 잣대로서 ‘중’의 지혜를 ‘섭동(攝動)’이라고도 하셨다. 이는 맥동하는 나의 주체가 역동적인 대상을 대하는 중에 ‘알아서, 저절로, 빠르게, 온몸으로’ 드러나는 ‘내적 직관(直觀)’으로, ‘변침(變針)’과 구분해서 알려주셨다.
“‘중’을 빼고는 ‘허’나 ‘공’을 말할 수 없다”는 말씀을 질문으로 품고, 알고자 애써야겠다.
2.2. 연이정
노장 사상의 허(虛)와 불교사상의 공(空)은 이상에 불과, 실천하기는 애매하다고 봅니다. 허(虛)와 공(空)을 실천할 수 있는 진정한 실력은 시중(時中)에 응하면서 중(中)을 찾는데 있습니다. 중의 개념을 "분배"로 설명해 주셨다. 세상은 분배의 실패로 싸움이 일어나는데, 말, 행동으로 어떻게 개입하면 현명한 분배가 될것인가? 하는 응하기의 잣대로써 움직이는 중(中)의 어떤 지점을 잘 찾아가는 것이 삶의 실천지혜라고 말씀하셨다. 이때 분배하는 사람은 얻는 것이 없고 분배를 잘해서  남을 돕는 것이며, 세상을 평화롭게 하여 일종의 공과 허로 밝혀주는 것입니다. 또, 움직이는 중(中)으로 섭동(攝動)을 설명해 주셨는데, 섭동이란, 맥동하는 나의 주체가 모든 대상을 대하는 가운데 생기는 역동적인 중(中)으로, 온몸으로 상대를 대하고 응하는 실력이 쌓여 내재적인 섭동에 의해 생기는 직관과 같은 것이라고 하셨다. 분배의 개념으로 말과 행동의 실천에 중(中)으로서 실천 기준점이 생긴 것 같다. 
2.3. 조ㅇ남
사람들은 젊을 때 노자, 장자와 같은 극단적 개념 읽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허(虛)와 공(空)은 잠깐 갔다가 오는 것이지, 오래 머무는 곳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실력은 “중(中)‘입니다. 허와 공을 뚫어서, 중간의 실제적 방침인 중으로 가야 합니다. 시중(時中)은 응하기의 가장 높은 단계로 시장 한 가운데서(산으로 가지 않고) 응한다는 뜻입니다. 중의 실제 작동 방식을 알 수 있는 생활에서 허한 마음으로 말(言)의 분배, 땅(地)의 분배, 정(情)의 분배, 먹는 것의 분배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 이 관계에서 무엇이 가장 적절한가(인연생기)를 거쳐 결국엔 공으로 갑니다. 깨끗한 말은 침묵처럼 여겨집니다. 분명 말은 했지만, 무언(無言)과 같은 것이지요. 이것은 문제를 푸는 것이자 결국엔 남을 돕는 행위입니다.
-선생님의 이번 중(中) 설명을 들으며 왜 단전으로 힘으로 모아야 하고, 왜 적경을 해야 하고, 왜 중심이 낮아져야 하며, 왜 조심조심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모든 것이 삶의 실력을 키우는 방법의 기본인 것이다.
2.4. 임ㅁ애
空이나 虛라는 이 심오한 개념은 그 깊이만큼이나 위험하다. 매혹적인 "진리의 얼굴"에 감탄만 하고 있어서는 정작 발을 딛고 있는 현실에서 무력하거나 손에 잡히지 않는 개념의 파편들을 붙들고 허무의 바다에서 허우적대기 쉽다. 선생님은 "그 ’진리의 얼굴‘은 만났음으로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그 빛나는 만남 뒤에, 그것을 '번역'해내는 것"이라고, "虛와 空이 번역되면 반드시 中으로 나온다"라고 하셨다. 진리가 시장이라는 복잡한 현실의 문법으로 전유되었을 때 그때야 비로소 실용적일 수 있다. 번역은 단순히 단어를 바꾸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고차원의 추상을 구체적인 실천의 언어로 발화하는 행위이다. 진리의 얼굴은 세상에서 쓸모가 없지만, 번역된 진리인 '中'은 세상에 작용할 수 있는 지혜인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이 없고(空) 나라는 부피가 없음(虛)을 中이라는 실천을 통해서만 행위해낼 수 있다. 中의 실용성은 관념에 있지 않고 '분배'에 있다. 중을 실천하는 자는 스스로 취할 것이 없으면서도 전체의 조화를 복원한다. 선생님은 "中은 정지된 가운데가 아니라, 끊임없이 흔들리고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섭동), 매 순간 중심을 잡아가는 자발적인 맥동이자 역동"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결국 실력이란 산속의 고요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소음이 가득한 복잡한 시장 한가운데서 얼마나 정교하게 중의 점을 찍느냐에 달려 있다. 지혜의 칼과 자비의 물을 때에 맞게 잘 불러내어 번역에 성공하기를, 더 이상 허공을 베어내지 않기를 의욕해본다.
우리의 시야를 가리는 '트라우마'와 '부끄러움'을 직시할 수 있을까. 일본에 대한 열등감이나 중국에 대한 혐오처럼, 상처 입은 기억은 진리를 왜곡된 이데올로기로 번역하게 만든다. 모든 중요한 기억에는 상처가 새겨져 있고, 우리는 그 상처를 피하려다 결국 기억을 재구성하거나 은폐한다. 진정한 '중(中)'의 실천을 위해서는 이 부끄러움의 역사를 정직하게 직시해야 한다. "애이지기악(愛而知其惡), 증이지기선(憎而知其善)"의 입체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트라우마라는 필터를 제거하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시도가 선행될 때, 비로소 우리의 번역은 '역동성'이라는 동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 정신이 크기 위해서는 이 부끄러움의 잡탕 속에서 눈을 뜨고, 복잡한 현실을 간편하게 재단하고 그 위에서 안주하지 않을 용기가 필요하다.
2.5. 권ㄷ환
선생님께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것이 공"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공이 일상으로 번역된 것이 중"이니 "분배하는 이는 취하는 것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무언가를 취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행하는 주체를 필요로하는데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주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선생님께서는 "중용은 사태에 개입하여 치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사태에 개입하며 친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선 이는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개입"되어 있는 몸의 대응이며 몸의 대응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절로, 온몸으로 세상에 응하는 것을 뜻한다. 결국 떡 5개를 두 딸에게 공정하게 분배하는 일을 '장기적 관점에서'조차 성공시키기 위한 더 큰 지혜는, '첫째/막내가 양보하라.'는 낡은 규율이나 '남은 떡은 번갈아 가면서 준다.'라는 중(中) 아닌 중립(衆立) 시스템, 혹은 '허약한 형제가 하나 더 먹으라.'라는 논리적 설득 따위의 "반성하는 에고"에서 찾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내 생활양식의 변화로 체화된 자득(되기)과 시간의 두께가 쌓여 타자와 맺어진 신뢰(응하기)의 힘으로 비로소 한 뼘 "더 자란 정신"으로 변해버린 "온몸으로 세상에 응해"야 한다.    
그렇다면 허와 공이 일상으로 번역되는 '장소'가, 혹은 그곳을 향해가는 '길'이 있다면 그곳은 어딜까. 그곳은 "누구를 숨겼을까?" "복종은 좋은 것인데 혹여나 억압이라 오해할 수 있으니, 의문이 든다면 물으라."라는 여일의 말에는 떨린 신입의 마음을 헤아리는 따스한 체온이 담겨있고 "자격이 있나 부끄럽고, 낙오될까 두렵지만 같이 가자"는 말에 동학 모두가 다 같이 웃음을 터트리다가도 수진 씨의 표정은 다시금 신입의 긴장감을 늦추지 않게 하는 비장함이 베어 있다. 배워가는 길에 놓여있는 숙인 들의 자주 어긋난 질문에도 그 모든 질문에 어떻게든 답하는 선생님의 모습은 "하려고 하면 할 수 있다"라는 선생님의 말씀/유재의 조언으로 땅 위에 붙어있다. 소비자를 위해 산골짜기 집 앞까지 완성품을 대령하는 공산품 세상에서 숙인(孰人)을 위해 다 갖춰진(영원히 자기를 묻는) 장소에 어울리기 위해, "편안함을 걷어내는 비용을 지불하고 기성의 틀을 바꾸라"라는 독하의 도움받아 기존의 생활양식을 단사리(斷捨離)하고 정(靜)한 마음으로 "오래된 미래"를 향해 "조심 조심 조심"히 낮은 자세로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를 읊조리며 나아가보려고 한다.
2.6. 아무
(질문) 엄마가 떡 5개를 두 딸에게 줬는데, 서로 3개를 먹겠다고 싸운다. 현명한 엄마는 멋지게 나누어 주어서 화평하게 되었다. 이때 엄마는 어떻게 개입하였을까?
(힌트) 전략적 반성적 분배는 아니다. 엄마는 중용으로 분배하였다. 이는 사랑하는 딸을 위해 사람이 행할 수 있는 최고의 단계이다. 중용이 뭘까. 허와 공은 진리의 얼굴인데, 이런 이상적인 진리가 일상에 쓸모로 드러난 것이다. 특히 공이란 인연생기라 상호연관되어 있어, 전체가 다 주체가 없으니, 나의 주체가 모든 대상을 함께 대하는 가운데 생기는 섭동적인 중中이다. 이는 무의식을 통한 상대감이며 온 몸으로 상대를 대하고 응하는 그런 실력이다. 결국 엄마는 응하기의 잣대인 중으로 분배의 지혜를 발휘함으로써, 모든 것이 공으로 간다 혹은 인연으로 엮여 있다는 것을 밝힌 사람이다.

3/ 기차의 꿈
3.1. 여일
이번 수업으로 클린트 벤틀리의 <기차의 꿈>을 여러 번 보게 되었다. 주로 이야기(서사)를 중심으로 영화의 흐름을 이해하려고 했다. 이야기 중심의 영화 이해는 무언가 진부하거나 감정이입해서 정서적으로 이해하고자 애쓰게 된다. 그러면 드라마와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선생님께서 이 영화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은 스토리(story)가 아닌 장면과 이미지들인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볼 때는 이미지 혹은 장면에 집중해서 보았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이미지가 서사적으로 다가왔다. 감독이 조명을 쓰지 않고 굳이 자연광으로만 촬영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날 것 그대로 숲과 인물들을 보여주는 것은 진짜 삶과 시간의 밀도를 느껴지게 했다. 이러한 느낌들은 영화의 흐름에 좀 더 가깝게 만든다. 비로소 로버트의 어린 시절, 벌목 노동자, 동료, 사랑, 상실, 슬픔, 연결에 이르기까지 나는 함께 호흡할 수 있었다. 
"세상도 이미지에요"(k선생님)
3.2. 독하
Grainier는 문명이라는 외투를 걸치지 않은 채 벌거벗은 몸으로써 타자를 공대하며 외부와 상호 개입한다. 영화는 몸을 지닌 정신적 존재인 그가 삶에서 마주하는 ‘아직은’ 모르는 고통의 불꽃으로서 자신을 담금질하는 모습을 그린다. 바꿔 말하면, 자신의 삶 속에 우발적으로 찾아오는 타자성을 말로써 쉬 재단하지 않으며 조심성과 시간성을 매개로 융합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의 정신이 인간이라는 개체성에서 벗어나 통합된 존재로 확장되어 삶을 평온히 마감함으로써 '가능성의 총체'로 회귀하는 동시에 새로운 생명으로 전화하는 모습을 비춘다.

4/ 에고
4.1. 숙비
“공부를 해보면 점점 좋은 에고가 생기지 않겠나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런것은 업서요. 에고는 마지막까지 자기 욕심을 차리고 까불고 자기 보호에 열심을 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통합된 정신이 자기를 이끈다는 정신의 갈래를 갖고 공부를 배치하는 것이 좋습니다.”(선생님)
4.2. 지린
복습 시간에 "공부의 주체가 무엇인가?" 에 대해 강의해주셨는데, 
나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정신은 자란다"는 문장을 조금 더 분명하게 헤아려볼 수 있었다. 
"공부를 하면 점점 좋은 에고가 생길 것이라는 것은 안 된다. 훨씬 통합된 정신이 자기를 이끈다. 
에고를 영영 넘어가지는 못한다. 넘어가는 것은 에고가 아니다. 에고는 영영 에고이다. 
계산하는 에고가 없으면 우리는 못 산다." 
임계치를 넘어가는 정신의 나아감도 전적으로 내 소관일 수 없으며, 
저렇게 살아 펄펄 날뛰는 묵은 내 증상도 내가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는 사정 앞에서, 
용기를 낼 수 있었고, 
나는 그저 정해진 것을 수행할 뿐이라는 시작점 앞으로 다시 가 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