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공부 장소의 입구에서부터 지난 강의의 근본 주제와 마주치게 된다. 안으로 비워서(空) 열린 문이 되어 누군가를 맞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에는, 아직 아무것도 아닌 그 순수한 비움과 열림의 표면에 중(中)이라는 적절하고도 적실한 노동이 구성적으로 기입(/개입)되어 있다. 모든 앎이 늘/이미 ‘행지(行知)’로서 수립된다고 하듯이, 아직 없던 비움이나 열림은 중(中)이라는 노동의 무늬화를 통해서만 비로소 사후적으로 ‘문’이라는 형식의 구체성을 얻게 되며 기능하기 시작한다. 공부 장소의 저 순수하고도 무관심한 입구를 환대의 ‘문’으로 만들어주신 숨은 중(中)의 손길들에 감사드린다.
[이후로 다른 사진들을 첨부할 수 없는 기술적인 문제가 생겨 사진 없는 후기를 작성해야 할 듯합니다. 방법을 익혀 수정하겠습니다.]
지난 장숙강에서 내가 배운 것은, 공(空)이나 무(無)라는 진리의 이념이 지닌 ‘불순한’ 형식이다. 만일 공이나 무의 이념에 내포된 이론적-실천적 함축(implication)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그들 이념이 인간의 일 속에서 언어적으로 벼려질 수 있을 때에만 의미화되며 스스로를 펼쳐낼 수 있다(explicated). 즉 생활이라는 ‘인간사 속의 다양한 응하기’의 요구에 필연적으로 노출돼 있다는 바로 그 인간됨의 조건에 ‘매개’될 때에만, 공이나 무의 이념이 때늦게 구체적인 의미화의 작용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잠시도 인간의 사회 속으로 액자화할 수 없는 신(진리)의 얼굴”(k 선생)과도 같은 이념적 진리는, 역설적이게도 어떻게든 우리의 일상 속으로 내려와 “생활의 곳곳에서 만나고 응할 수 [있는] 진리”(k 선생)로서 더더욱 불순하게 오염되어야만 한다. 즉 인간의 생활에 필연적으로 매개되는 불순한 진리는, 순수 공이나 무라는 실없고도 불가능한 부사적 이념에의 만족과 표상적 액자화라는 명사적 집착을 동시적으로 어긋 내고 다만 낮고 구체적인 응하기의 자리, 곧 중도(中道/中度)라는 실천적 지혜를 요구받는 ‘사람들 사이의 자리’로 명랑하게(heiter, Heiterkeit) 눌러앉아야 한다. 그런 방식으로 진리는 인간이 그 속에서 지속 가능하게 거주할 수 있는 장소의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무아의 이념이 아니라 주체화의 실용적 장치에 더 관심을 갖는 게 현실적”(k 선생)이다. “완전한 것에 대한 기대는 인간의 운명을 넘어서는 것에 대한 기대”1)일 수 있기 때문이다. 관건은 우리가 진리를 배치하는 이중의 방식, 곧 진리가 순수한 부사적 이념의 자리에 느긋하게 만족하게 하거나 아니면 (그와 짝패를 이루는 방식으로서) 순수한 명사적 액자화에 그 자신을 서둘러 방치하게 만드는 태만을 동시에 따돌리는 실천 형식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연극적 실천’이다.
가령 공(空)이나 무(無)라는 가설적이고 잠정적인 이념은 일상적 응하기의 자리에서 실행되는 중(中)의 구체적인 실천을 위한 무대이자 배경으로서 ‘없는 듯이’ 작용한다. 하지만 공(空)이나 무(無)라는 불가능한 이념은 중(中)의 실천이 언제나 더 낫고, 따라서 더 낮은 응하기로 탈-구축(de-construction)될 수 있도록 일종의 비판적 준거점으로서 ‘있는 듯이’ 작용한다. 그리하여 공(空)이나 무(無)와 중(中) 사이의 연극적(그러므로 놀이적) 긴장과 교호는 무엇보다 중(中)의 실천을 3중무지(三重無知)와 3중신중(三重愼重)으로 조율한다.
과연 일상적 실천과 응하기의 ‘적도’(適度)란 무엇인가. 그것은 공(空)이나 무(無)라는 불가능한 이념의 허실생백(虛室生白)적 빛 아래에서 쉼 없이 지속되는 구체적이고도 겸허한 연극적 실천, 곧 ‘모른다ㆍ모른다ㆍ모른다’와 ‘조심ㆍ조심ㆍ조심’의 인식론적-실천론적 수행 속에서만 점점이 가늠될 수 있는 시중(時中)의 운동성이다. 이때 시중(時中)의 운동성은 사회적 제도와 자아라는 습관의 다발로부터 공(空)이나 무(無)를 향한 창의적인 퇴행(退行)으로만 정향되지 않는다. 도리어 그것은 늘/이미 우리가 노출돼 있는 삶/생명/생활이라는 3중적 응하기 자리에의 신중한 개방으로도 동시에 정향되어 있다. 따라서 시중(時中)이란 퇴행과 개방이라는 이중 구속(double bind)적 상황의 요구를 경청하며 바로 그 불이(不二)적 요구에 동시적으로 응답하려는 지속적인 겨끔내기의 운동에 다름 아니다.
1) 마사 누스바움, <정치적 감정, 정의를 위해 왜 사랑이 중요한가>, 박용준 옮김(글항아리, 2019), 277쪽; k 선생 강연원고에서 재인용.
영광씨, 후기 잘 읽었어요. 그날의 배움을 되새김하게 되는군요.
'진리관'이 변해왔다고 배웠는데, 영광씨 글을 통하여 인간의 자리로 가라앉은 "지속가능하게 거주할 수 있는 장소의 가능성"으로서의 진리, "더더욱 불순하게 오염" 되어야 하는 진리를 분별하게 됩니다.
空이나 無가 '없는 듯이' 그리고 '있는 듯이' 작용한다는 설명도, <연극적 실천>의 무대를 가설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