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단빈
대화를 할 때 범주나 층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함을 배웠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이번 속속에서는 대화를 할 때 총체성을 살펴야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대화는 논리적인 것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범주와 결부해서 정서를 고려해야 하는 것으로 , Affective primary (정서적 우위성)을 배웠습니다.
언어적 존재인 인간의 세계에서 말이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말이 칼이 되어 상처를 입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잘 벼려진 말을 배워가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범주에 대한 이해와 정서를 살피고 배려함으로 대화중에 생길 수 있는 오해와 상처를 줄여 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 숙비랑
“어른 집에 들어갈 때 조심하는 것처럼 꿈에 들어갈 때 조심해야“(단보선생)한다. ‘조심, 조심, 조심’의 생활 태도를 몸에 내려 앉히는 공부를 하고 있지만,
’차분‘해 지지 않은 이상에야 조심은 어려운 경우이다. 24시간 공부를 향해, 잠에 드는 순간 마저 조심할 수 있는 차분함은 “단지 생활을 잘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인생이라는 것이 허무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지점을 향해 나아가는”(단보선생) 전망과 희망을 갖게 한다고 배웠다. 책을 읽는 다고 모두 ‘공부한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차분함을 체화할 수 있는 생활양식의 짜임을 통해, 형식과 수행의 공부를 다시 한 번 벼려본다. ‘반복하는 몸‘이 개창하는 희망의 초상은 어디쯤 와 있을까. 다시 한 번 내 ‘몸‘의 길을 묻는다.
3. 유ㅅ진
나는 가끔 가치나 실용성보다 순간적인 느낌(감정)에 끌려 합리적이지 못한 소비를 하고서도 만족스러워 할 때가 있다. 이성적 행동은 아니지만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 논리로 나의 이러한 행동을 반박한다고 하면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 말이 사실일 테니까. 그러나 가성비니 효율성이니 하는 것보다, 공감이나 인정받기는 어렵겠지만 내가 느끼는 정서적 만족감이 크다는 것이 내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You can't change people's mind by refuting their arguments"라는 문장을 통해서 우리는 논리보다는 정서를 돌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훈훈한 이치를 배울 수 있다. 정서를 무시하고 그저 말로써 이겨버리면 쓸모도 없고 사후도 좋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의 허점을 찌르는 대신, 상대의 마음을 알아차리며 총체적 수행성으로 이길 수 있는 꾀와 실력을 길러야겠다.
4. 연이정
‘이 공부는 차츰 내용을 넘어서 형식으로 귀결한다.’(암연이장)
유교에서는 공부의 모든 내용을 ‘예’로 집약한다고 한다. ‘예’는 형식으로 태도로 그 내용을 지각시킨다는 것이다. 공부의 방향은 그 내용을 형식화 시키는 것으로, 내 생활이나 인생을 구제하는 쪽으로 형식화 한다는 것이다.(단보선생)
속속에서는 낮 12시부터 저녁 9시까지 공부와 쉼이 있고, 사이사이 적경과 질문과 응하기를 통해 매 꼭지의 공부가 내용을 형식화 하며, 또 다른 형식으로 공부가 이어진다. 형식을 통해 조각난 지혜를 모으는 우리의 공부가, 자기 구제를 위한 공부라고 할 때, 우리의 공부는 어디로 집약되고 있는 것일까? ‘자기 구제’도 집약된 형식이라 볼 수 있을까?
5. 김ㅅ연
단보선생은 대화에는 논리(logic)와 감정(emotion)이 관여하는데 상대를 이기거나 설득할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affective primacy(감정우선가설)'과 'You can't change people's mind by refusing their arguments,'라는 속담을 알려주셨다.
상대의 정서를 돌보지 않고 논리로 말싸움을 이겨버리면 관계가 망가지고 손해가 더 크니 상대의 존재와 감정을 알아봐주고 결국 그로 인해 내가 인정을 받는 지혜가 필요하다고도 하셨다.
이 가르침은 아이를 양육하는 부모 특히 엄마의 마음을 지키는 데에 참고가 된다는 생각을 했다.
좀 더 성숙한 사람 혹은 성숙해야하는 사람 즉 부모, 선생님, 조직의 리더 등은 가족, 학생 혹은 조직 구성원들과 갈등상황을 맞닥뜨릴 때 내 말이 옳고 그르냐를 따지기 전에 훌륭한 배우가 되어 상대의 감정을 헤아릴 수 있는 연극적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요즘은 '사이다발언'과 같이 논리로 상대의 발언과 입지를 무화하는 것을 통쾌하게 이기는 대화의 기술로 여기는 사회분위기도 있는 듯하다.
한편 소위 '말빨이 딸리는' 상황 즉 '대화와 협상에서 주도권을 잡기 어렵고 상대에게 휘둘리기 쉬운 상태'가 되는 것을 크게 손해를 보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정치인들 중 상대의 감정과 입장을 전혀 돌보지 않고 병적으로 자신의 논리를 기관총 난사하듯이 내뱉어 성공적인 토론을 했다고 생각하는 이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자는 이준석이다.
개인적으로 오랜 세월 라디오 시사프로를 청취하면서 이준석이 라디오에 나와서 특유의 빠른 속도로 자신의 논리를 속사포처럼 쏟아내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거부감이 들었다.
그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다 이준석의 그러한 말본새를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20대 대학생이 된 소위 사회에서 말하는 '이대남' 아들이 이준석이 똑똑하고 말을 잘한다고 했을 때 받아들이기 어려운 충격을 받았다.
그전에는 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와 틀이 없어 그냥 "이준석이 정치인들 중 제일 재수없다."라는 말을 했는데
이제는 내 거부감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 "이준석과 같은 자들은 대화에서 논리만 내세우고 상대의 감정을 전혀 돌보지 않는 완벽한 대화의 무능자이다."
6. 아무공
잠의 형식화: 적경 등의 수행 같은 것이 생활을 단정하게 하는 것이지만 생활을 넘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잠도 그냥 푹 자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니다.(모든 사물의 원본적 상태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운동이다.) 잠에 대해 좀 다른 태도가 필요하다. 초상적인 현상과 접맥 가능한 지역으로서의 잠이 중요하다. 낮은 중심을 통해서 초상 현상에 접근할 수가 있는데 이 초상 현상이 인생의 허무을 넘어갈 수 있는 그런 매개가 된다.
잠이라고 하는 것이 초상적인 현상과 접맥 가능한 지역이라고 보기 때문에 조심히 입장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른들 집에 들어갈때 약간 조심 하듯이 그런 식으로 꿈에 들어갈 때 조심한다. 이것은 이른바 경한 마음을 갖고 그리고 신중한 마음을 갖고 또 항상 준비해서. 그러니까 敬・愼・備인데 (옛선비들은 방 안에 앉아 있어도 공이다. 사가 없다. 왜냐하면 근신하고 신독하니까. 남이 안 봐도 그냥 천지가 본다고 그렇게 믿고 공을 유지한다.) 경신비의 마음을 갖고 꿈에 들어가서 혹시나 꿈속에 생긴 다양한 창발성과 기별에 대해 준비한다. 잠과 초상 현상 사이에는 알모체가 있어, 알모체를 가지고 일상을 넘어서 초상적인 전망을 열 수가 있다.
자고 일어난 아침의 모습을 염려해서 잠에 들어갈 때 어떤 준비를 (되기라는 방향 속에) 생활 양식으로 만든다. 이는 잠을 알아봐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7. 임ㅁ애
'불안(운동)'이 인간의 기본 상태라는 선생님의 언급과, 합창의 총체적 수행성이 대화와 닮아 있다는 말씀을 통해, 합창과 대화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본다.
영화 〈The Choral〉은 1916년, 전쟁을 영웅놀이쯤으로 여겼던 오만함이 마침내 참호전의 잔혹함을 마주해야 했던 영국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평화로운 시골 풍경은 오히려 그 깊이 깔린 불안을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그들이 인지했든 못했든, 불안은 무언가를 향해 움직이게 했을 테고, 합창단은 그 무언가를 향한다.
인간 실존의 본바탕은 끊임없이 흔들리는 원초적 불안이며, 나를 위협하는 타자는 때로 지옥과 같은 존재다. 동시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 지옥의 한복판에서 타자와 함께 하모니를 이루는 순간을 갈망하며, 그 공명 속에서 비로소 실존적 안정감을 찾기도 한다. 이 역설적인 갈망이 실현되는 현장이 바로 합창이자 대화가 아닐까.
하나의 화음을 만들어내는 합창은 각자의 목소리를 지워버리는 획일화가 아니다. 각 음역대의 엄격한 범주(category) 안에서도 고유한 음색(identity)을 발휘하듯, 대화 역시 하나와 각자 사이를 넘나들며 존재를 확장한다. 합창도 대화도 총체적인 감각의 노동이며 몸의 수행(Performance/Practice)이다.
옆 사람의 음정에 맞춰 내 목소리의 궤적을 실시간으로 수정하는 것, 그것이 합창이고 대화다. 우리는 모두 흔들리는 불안한 존재들이기에, 서로의 범주적 차이를 지켜내고 때로는 넘나들며 하나의 하모니를 향해 온몸으로 조율해 나가는 이 단순하지 않은 역동 속에서만, 비로소 지옥을 건너 저편을 희망할 수 있다.
내 목소리를 내면서도 타자의 음색에 주파수를 맞출 때, 서로의 소리는 겹쳐지며 증폭된다. 대화를 통해 타자의 세계가 내 안으로 흘러 들어오고 내 세계가 타자에게 틈입할 때, 인간은 나라는 감옥을 깨고 나와 '존재론적 확장'을 경험한다. 내 안의 혼란스러운 불안(운동)을 합창이라는 정돈된 역동(운동) 속에 던져 넣을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그 특별한 누림의 순간이 아닐까.
8. 는길
형식화한다는 것은 결국 깨침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 아닐까. 이론이나 현대 과학을 야물게 알아가려는 우리는 수행자들과는 다른 스텝을 밟게 될 것이다. 내용을 챙기며 걸어왔다는 것은 깨침의 순간에 어떤 차이를 만들게 될까. 불이(不二)라는 형식에 사무치면서도, 언어(설명)로써 실재에 간여한 이력이 인류에게 있었던가.
내용을 형식화하려는 방향에 관심을 모으게 된다. 무리한 추리로, 한나 아렌트의 ‘시작’에 관한 사유를 선생님께서는 모든 일정을 마치고 댁에 도착하셔서 신발을 벗으실 때 ‘다시 시작이다’라는 말로써 점을 찍는 행위로 형식화하신 것 같고, '등신불(等身佛)'이라는 수행에서는 ‘죽음 이후의 자신의 몸을 걱정하는 마음’이라는 갈래를 잡아, 죽음과 유사한 ‘잠’에 적용해서 깰 때의 상태를 신경 쓸 수 있도록 잠을 다르게 대하게 하신 것도 내용을 형식화한 사례로써 생각하게 된다. 암기수첩을 보니, 임사체험 이후 단번에 마음을 딴 데 두는 체험자들의 변화를 선생님께서는 “마음을 두는 곳이 달라야 생활이 바뀐다”라는 ‘되기’의 질문으로 접맥하셨다.
모든 내용을 형식화하자는 것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겠지만, 오늘 내가 읽고 알게 된 것들이 형식화하는 데 이바지될 수 있음이, 그런 앎의 쓰임이 반갑고, 기대가 생긴다.
9. 권ㄷ환
내 생활은 완벽하지 않다. 그런데 애초 완벽할 수 없다. 계획엔 먼지가 항시 끼기 마련이며, 예외는 언제나 발생할 것이고 내 몸은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좋았다가 안 좋았다 할 것이다. 하지만 세속은 본디 어긋남이고, "인간은 원래 병이 있는 것이 정상이며, 완벽한 정리와 평온은 이념적일 뿐"이다. 앞으로도 내 에고는 변덕을 부릴 테고, 나는 또 뜨거워질 것이며, 환상과 외로움을 종종 그리고 자주 들를 게 뻔하다. 내 부족한 실력(질 낮은 형식)은 이따금 낭독과 적경을 과제처럼 느껴지게도 하겠지만(내용이 되겠지만) 이 또한 재배치하며 생활양식을 만들어가는 겨끔내기의 과정이다. 다시 시작하고 또 반복하는 연극은, 연극이 내 생활이 되기 위한 당연한 비용이니까. 나는 단전이라는 나침반이 있고, 같이 걸으며 나를 바라봐주는 동학과 선생님이 있으며, 이따금 보이는 그들의 희미한 발자국도 앞에 펼쳐있다. 비록 의도와 현실은 어긋나고 공부와 휴식은 저 먼 거리로 소외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생활은 조금씩 단정되고 있다. 걸어가는 길에 가끔 넘어지더라도 넘어진 자리에서 내 시선이 먼저 간 선배들의 발자취를 향하도록 '잘 넘어지면' 되지 않을까. 비록 "공과 사가 따로 없는, 방 안에서도 신독을 실천하는 선비들" 수준은 아니더라도, '걸어가는 것 뿐 아니라 넘어지는 것도 공부'라고 때로 "놀이스러운 마음"도 내보며 우울함 따위가 침범할 틈 없이 낮은 중심으로 "눈먼 중이 마 캐듯" 나아가보는 것이다.
10. 박ㅇ름
사람 사이의 '대화'에 대한 말들이 마음에 남는다. 대화가 잘 되려면 우선 상대방과 내가 같은 범주 안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파악해야 할 것이고, 말에 이기려고 하기보다 "인간관계에서는 '정서'가 더 우선적"(단보선생)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함께 대화를 나누는 상대방의 감정을 살피는 것도 필요하겠다. 속속 복습 모임인 쑥쑥을 통해 말의 '수행성'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들은 고정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상호 간에 쌓아온 시간 속에서 그 말에 의미가 더해진다. 같은 말이라도 대화하는 상대에 따라 다른 의미로서 작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화가 잘 되려면 대화의 상대와 그 맥락을 잘 살피는 일도 필요하겠다. 이번 복습 문장을 통해 나열한 것만 하더라도 대화를 할 때에 살펴야 할 것들이 참 많으니, 대화도 응하기도 잘 되려면 무엇보다 긴장하지 않은 상태로 지낼 수 있는 몸의 상태를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11. 여일
‘마오가 백내장 수술을 받았을 때 저우가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마오의 병실문 앞에서 수술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던 것을 단순히 권력자에 대한 아첨이나 위선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353) 마오를 군왕처럼 받들고 충성을 다하는 모습은 그리 세련되어 보이지 않았지만, 수십 년간 오직 나라를 위해 죽을 때까지 온 힘을 다하는 그의 일관됨은 연극적으로 아름답고 숭고한 감동을 준다. 토의에서는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보에티우스의 ‘비타협적인 정의 추구’와 저우의 타협적이고 실용적인 꾀의 대비가 흥미로웠다. 보에티우스의 비타협적 정의는 반대파를 자극하여 실패로 끝나지만 소크라테스나 예수처럼 위대한 실패로 볼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이어서 실용주의자로서 저우와 마오, 보에티우스처럼 몽상가, 이상주의자, 혁명가의 다른 기질과 차이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둘의 차이는 주변의 책임을 지는 자리에 있는 지 여부에 따라서 혁명가 아니면 현실적 실용주의자로 나뉜다.
우리의 공부는 ‘어긋내며 어울리며 어리눅는’(단보선생) 길이기에 몽상가이면서 생활의 실용을 추구한다.
12. 상인
장량을 거쳐 저우언라이를 배웠다. 그들이 모사, 책사로서 뛰어난 업적을 이룬 바탕에는 타고난 재질이 있었고 그 재질은 각자 인생의 베이스캠프가 되지 않았을까?
사람마다 베이스캠프가 자리하는 고도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니 나의 베이스캠프는 어느 높이에 있는가? 내게 주어진 베이스 캠프를 더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조별 토의 시간에 나보다 더 큰 나를 믿고 겸손한 자세로 조심조심 정진하는 것이 방법이리라고 하던 동학의 말이 확 와닿았다. 그런데 이 언급은 선생님이 이미 몇번이나 말씀하신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불러왔다. 아울러 같이 어울려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돌이켜 보는 계기가 되었다.
13. 독하
"You can't change people's mind by refuting their arguments."
대화는 논리만으로 진행되지 않으며 감정이 중요한 요소로서 개입한다. 그렇기에 논변이나 잔소리로 상대를 변화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시비를 따지고 가르는 것은 승패라는 일차원적 기울기를 낳아 감정의 소용돌이를 불러 그 내용을 잡아먹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대화에서 연원하는 감정을 뒤로하고 대화 속에 번득이는 현명함을 내재화(복종)하며 변화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학인의 길이다. 대화에서 감정이 중요한 요소로 개입함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은 스스로 일차원성으로 미끄러지지 않으려는 메타적 자리를 위한 애씀이고, 또한 대화 상대가 일차원성으로 미끄러지는 패턴을 잡아채 우회로를 트는 메타적 자리를 얻기 위함이다. 달리 말하면, 감정의 늪을 벗어나 일이 되게끔 만드는 꾀의 자리를 얻기 위한 것이다. 이는 동일한 언어임에도 서로 다른 경험(지도)을 지닌 근본적 어긋남 속에 공동의 일을 향한 겹침의 자리를 얻기 위한 응하기라는 대화에 필수불가결 요구되어지는 기본기로서의 태도다. 그렇기에 이를 아는 것이 대화에서 쉬 감정의 늪으로 미끄러지는 자신(이나 타인)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흘러서는 안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