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글쓰기는 특히 말하기처럼 하지 않도록 유의합니다. 말은 화용(話用)의 여건이 번연히 드러나 있어 쌍방의 이해가 쉬워지지만, 그 여건을 떠나 종이(스크린) 위에 얹힌 글은 으레 제3의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말도 듣는 사람을 살펴 그(녀)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애써야 하지만, 특히 글은 오해가 잦으니 각별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2. <장숙>은 '비평의 숲'을 이상으로 표방하고 있지만, 숙인들은 서로 비평하는 일을 꺼리는 눈치입니다. 비(比)와 평(評)을 나누고 장단을 포폄(褒貶)하면서 서로의 공부길을 권면하고 돕는 것은 먼 공부길을 도모하는 학인들에게는 정신의 근육을 키우는 일과 같습니다. 좋은 운동은 미세한 근육이 찢어지는 줄도 모르게 찢어 근력을 키우듯, 좋은 비평은 기분의 여울을 넘어 정신의 대양으로 나아가도록 돕습니다. 특히 일부 여성들은 공감과 연대에 빠르고 실(實)보다는 화(和)에 기울어 비평의 문화에 생래적으로 저항합니다. 모쪼록, 서늘한 학인의 비평이 따뜻한 사람의 마음을 통과하면서 현명한 숙인의 자리를 얻어내기를 바랍니다.
3. 나와 함께 <장숙>에서 5년 이상 공부자리를 지켜온 숙인들이 5명 있지요. 신참 숙인들은, 이들 중에 누가 나와 닮았고(말과 글과 행동, 에서) 누가 나와 닮지 않았는지를 세세히 살피면서 자신의 공부길을 가늠하고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참들이 지닌 빛과 그림자의 일부는 곧 신참들의 미래상이 될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닮은 게 정답이 아니고 또 다른 게 반드시 그른 게 아니지만, 이 동이(同異)와 근사 속에는 여러 유익한 참조점들이 있는 법입니다. 늘 선학들의 명암과 장단을 헤아리면서 먼 공부길을 '자기화'하기 바랍니다.
4. 옛사람들은 이른바 '중심낮추기'의 공부를 신독(愼獨)이라고 불렀습니다. 신독의 이력이 쌓여야 덕(德)이 배양된다고 했지요. 도(道)를 '알기'에 배당한다면 덕은 '되기' 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옛 글들을 살피면 신독의 자리가 깊어지는 중에 '알모체'를 방불케하는 경험이 더러 확인됩니다. 다만 묘사나 설명의 방식이 다릅니다. 신독에서 빠트린 성찰은 당연하게도 '무의식의 세계와 가능성'인데, 선인들 중의 일부는 이를 귀신론(鬼神論)과 혼동한 채로 다루거나 혹은 기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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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응해서 말하기(살기)'라는 원칙의 취지 중 핵심은 책임성입니다. 상대의 언행에 대한 나의 책임이 곧 '응해서 (말)하기'입니다. 발제나 조장역할 등의 일도 응해서 (말)하기의 정신과 기법에 준응해야 합니다. 규정, 약속, 혹은 상대의 말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 취지를 살피고 살려주는 식으로 응해야 합니다. 10분, 이라면 10분이라야 하고, 압축, 하라면, 압축해야 합니다. 그게 책임있는 생활이고, 응해서 (말)하기입니다. 애초에 그 약속에 부응하지 않으려면 미리 양해를 구해 예외신청을 해야만 하겠지요.
6. 같은 취의에서, 응해서 (말)하기의 으뜸가는 덕목은 약속-지키기입니다. 그게 신뢰로 나아가는 사회적 책임의 기본입니다. 근자 한두 사람의 숙인은 제 시간을 지키는 일이 외려 드문데, <장숙> 공부의 알짬은 그 무엇보다 형식과 태도임을 재삼 숙지하기 바랍니다.
7. 숙유가 여러 차례 공지를 통해 환기시켰지만, 화장실 사용이 여전히 말끔하지 않습니다. 10년 공부에 그깟 화장실 하나 제대로 '장소화'하지 못하면 참으로 한심한 모임입니다. 실력은 자신이 혼자 있는 시공간 속에서 가장 분명히 표현된다고 누차 언급한 바 있지요. 특히 화장실은 사(私)와 공(公)이 겹쳐지는 곳이므로, 이곳을 사용하는 각자는 더욱 유심(有心)해져서 어느새 무심(無心)한 자리에까지 나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8. 민주주의의 근본 갈등은 체계(형식)와 사람(내용) 사이의 마찰에서 빚어집니다. 이 문제를 장숙의 자리로 가져오면, 익히 아는 바, '집짓기(체계)와 자득/신뢰(사람)'의 테마가 됩니다. (물론, 자득과 신뢰의 경우에는 '내용'으로 환원할 수 없는 묘한 어긋남이 있지요. 여담이지만 내용이 없이 형식을 위해 헌신하는 사례는 그룹의 체제를 위해 희생하는 벌이나 개미 무리들에게서 분명해집니다. '무임승차이론free rider theory'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의 경우에는 바보라도 제 나름의 한 세계를 짊어지고 다니기에, 내용적 일탈을 피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형식과 절차의 합리성을 통해 내용의 비합리적 분출이나 난반사를 예방하려는 장치입니다. 예를 들어 성장(자본주의) 그 자체를 민주주의와 등치시킬 수는 없습니다. 특히 성장이 내용과 형식의 구분을 없애는 눈가리게 역할을 하는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비자>에서, "法은 귀한 자에게 아첨하지 않고 먹줄은 굽은 것에 휘어지지 않는다"고 했지요. 혹은 리쩌허우李澤后에 의하면, "도구이성과 가치이성을 섞어 놓으면 민주주의를 낳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의 정신과 욕망으로부터 터져나오는 내용 중에는 비합리적인 것만 있는 게 아니라 이타적, 열정적, 초합리적 기운과 미립이 있고, 심지어 '알모체'의 끈들이 진동하면서 불러내는 기이한 기별들도 있는 법이므로, 역시 문제가 간단하지 않아요. 물론 이같은 관심의 끄트머리에도 복병--"민주주의는 늘 민족/국가라는 '병적인 사실에 묶여 있다'(슬라보예 지젝)"--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여기에서도, 이른바 '모순의 합치(coincidentia oppositorum)'를 통한 새로운 진실의 길을 얻어내어야 할 지 모릅니다.
9. 자아는 우선적으로 피부를 통해 그 밑절미를 얻는다는 주장(디디에 앙지외)이 있기도 하지만, 피부를 섬세하게 다루는 법을 익히는 것은 생활의 여러 층위에서 유효합니다. 숙인들이 이별례 중에 행하고 있는 악수와 포옹(일부)의 경우는 약간의 매너리즘을 보이고 있는데, 이 계제에 그 의미나 효용을 재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 한 때, '잘 만지기', '곱게 보기' 등의 훈련을 한 것을 떠올려 보기 바랍니다. 진화론적으로도 피부의 만짐(touch)은 자아의 구성과 함께 언어적 소통의 먼 기원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악수와 포옹은 매너(manner)이기 이전에 타자를 만나고 자신을 확인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일 수 있습니다. 그 의미나 가치를 다시 새기면서 공동체적 행위의 새로운 결과 울림을 만드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