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ㅅ연
수업중 '클레버한스' 사례를 들으며 일전에 한글 단어를 맞추는 천재견 보더콜리 사례가 떠올랐다.
알고보니 천재견은 한글 단어를 알고 단어 카드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표정과 몸짓 반응 분위기를 민감하게 감지하고 단어를 선택했던 것이었다.
오늘날 이러한 현상을 클레버 한스 효과라고 부르고, 관찰자 기대 효과로까지 발전되어 동물인지과학에 공헌했다고 한다.
단보선생께서는 클레버 한스 사례를 통해 바로 내가 문제의 중심 혹은 어떤 사태와 현상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자기개입'의 이치에 대해 설명하셨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이 '자기개입'의 가능성을 의식적으로 체크하다보면 자연히 '삼중조심과 삼중신중'의 실천과도 연결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2. 심ㅈ영
"낭독을 하면 에고의 균열을 느끼게 된다. 낭독하는 것은 나인데, 내가 글자를 따라가서 읽다 보면 불안정하게 흔들리게 된다. 낭독은 외줄타기와 같다. 에고의 균열, 흔들림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에 요동하지 않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위기의 체험이다. 나의 정신을 위기에 세워보는 것이다. 흔들리는 에고를 붙잡아 일매지게 나아가는 연습을 해보라는 것이다" 라고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자발적으로 정신을 위기에 세워보는 행위(낭독)에 대한 말씀은 요동치는 에고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는 내게 주체적인 힘을 주었다. 그 와중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정해진 일과를 철저히 따르며, 하루에 원고지를 딱 200매만 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잘 써지는 날에도, 잘 안 써지는 날에도 매일 원고지를 200매만 쓴다는 것이다. 낭독을 꾸준하게 하며 정해 놓은 작은 것들에 변덕을 부리지 않는 연습을 해야겠다.
3. 유ㅅ진
우리가 당연하게 믿는 인과관계는 반복된 경험을 통해 생겨난 습관일 뿐이지 원인과 결과의 필연적 관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결과에 단선적이고 명확한 원인이 있다는 오류에 빠지지 말아야한다. 현실은 인과관계라기보다 수많은 변수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수많은 우연과 통제할 수 없는 조건이 개입하는데 인과를 믿는 것은 어리석을뿐더러 확신편향이나 통제의 환상에 빠질 수 있다. 질둔해지지 않으려면 인과에 빠지지 말 것, 그러기 위해 사유의 노동에 게으르지 말 것, 내가 문제의 중심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4. 단빈
'오해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해명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얄팍한 변명으로 상황을 모면하고 싶은 욕구가 솟구칠 때, 다시 '오해를 삼키는 데까지 나아가보기'라는 가르침이 들어왔습니다.
비밀이 없으면 심심하듯 오해가 없는 삶도 재미가 없는 것이라며, 풀리지 않는 오해는 삼켜보기를 단보선생은 권면하셨습니다.
더해서 '똑똑한 한스 신드롬'을 소개해주시면서 자기 개입으로 비롯되는 오해로 질둔해지지 않으려면 자신이 문제의 원인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변명의 욕구를 내려놓고, 그 해명하고 싶던 상황을 창의적 생산성으로 나아가는 계기로 삼아봅니다.
5. 임ㅁ애
지난 장강 이후로 통합(integration)에 관심을 두고 있어서 그랬는지, 우연히 선택한 영화에서 'integrity'가 '정직'으로 번역된 것을 발견하고 통합과 정직의 관계를 묻고 있었다. 마침 이번 속속에서 결정적인 힌트를 주셨는데, "나에게 솔직한 것이 자기 통합을 이루는 방식"이라는 말씀과, "'소비하는 인간'이 통합에 실패한 대표적인 이유가 아닌가 한다"는 말씀이었다.
그 영화(《Finding Forrester》)의 자막에서는 integrity를 '정직'으로 옮기고 있었다. Integrity는 자신의 도덕적·인격적 원칙이 분열 없이 하나로 통일된 상태(Wholeness)를 의미한다. 자신에게 균열이 없다는 것, 겉과 속이, 말과 행동이, 순간과 순간이 어긋나지 않고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솔직한 것이 자기 통합을 이루는 방식"이 정직이다. 그 정직이라는 과정이 integration이 아닐까.
주인공 소년 자말은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남들이 기대하는 '계산'을 하지 않는다. 약속도 중요했지만, 그보다는 스스로 파편화되지 않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가 거부한 것은 다름 아닌 '계산'이었다. 이해득실을 따지고, 상황에 맞게 자신을 조금씩 구부리고, 그때그때 최적의 답을 찾아내는 그 계산을 멈추고, 스스로를 배신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통합의 실천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현대의 '소비하는 인간'은 바로 이 계산을 떠맡은 존재다. 소외되어 있고 파편화되어 있다. 소비 말고는 자신을 증명할 길이 없는 개인은, 소비하기 위해 취직을 하거나 창업을 해야만 한다. 똑똑한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똑똑한 공급자여야 한다는 분열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가장 효율적인 소비를 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정보를 소비해야 한다. 꼼꼼히 따져 최소비용을 달성하는 것이 성공이다. 그리고 동시에 소비자를 유혹하고 부추기는 능력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소비자를 유혹하고 부추기고 우롱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는 우스운 핑계는 평화롭게 합의된지 오래다. 그 안에는 당연히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일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이용하는 행위가 요구되고 수행되고 권유된다.
장사꾼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오래된 저주가 복수하는 것일까. 모두가 장사꾼이 되어 서로를 속이는 능력을 성공이라 포장하고 자랑한다. 이러한 마당에 자신만의 소신이나 철학을 가지고 생산 활동을 하는 사람은 극심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해고나 폐업은 오히려 깔끔하고 편안해 보인다. '본 적 없는' 이상한 사람은, 요상한 소문을 감당해야 하고 때로는 집단 린치를 각오해야 한다.
그런데 이 와중에 신기한 것은, 그 소문이나 린치 속에 오히려 부러움과 부끄러움이 묻어 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잠깐의 희망을 보기도 하지만, 늘 비용의 문제에서 절망하게 되곤한다. 덜 주고 더 받으려는 얄팍한 셈법에 되레 당하면서도 그것을 인정할 수조차 없게 분열되어 있는 것일까. 나에게 솔직한 것이 통합을 이루는 방식이라면, 이 부러움과 부끄러움은 그 솔직함이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는 증거일까.
6. 박ㅇ름
낭독에 대한 이해를 바로잡게 된 순간이 있었다. 나는 낭독을 하는 이치를 감성이 좋은 글이나 잘 쓰인 글을 읽는 행위를 통해 내 입과 몸에 그 감성과, 단어들과, 문장의 구조 같은 것들이 익숙해지도록 하여 나를 다르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단보선생께서 낭독을 중요하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낭독을 하면 '에고의 흔들림'을 느끼는 체험이 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며칠 뒤 조카들에게 책을 읽어주며 자꾸만 글자를 틀리게 읽게 되는 나를 발견했다. 집에서 혼자 낭독을 했을 땐 더 어려운 글을 읽으면서도 이처럼 많이 틀리던 적이 없었는데, 어린 조카들의 책은 훨씬 쉽게 읽히는 글임에도 자꾸만 입이 고장 나는 듯했다. 그 이유는 내 마음에 있었다. 혼자 있을 땐 적경을 할 때처럼 차분해지기 쉬웠던 것과 달리 그때 내 마음에는 조급함과 그 비슷한 감정들이 들어있었다. 그런 감정들로 인해 나의 에고가 흔들린 경험을 했던 것 같다. 낭독은 이러한 체험을 하면서 '흔들리는 에고가 마구 요동치지 않도록 훈련을 시켜 보는 것'이라고 하셨다. 낭독의 이치를 바로 알고 나니, 더욱 내 생활 속에서 낭독의 경험을 자연스레 늘려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감정뿐만 아니라 또 어떤 요소들이 내가 읽는 글자와 나를 분열되게 만들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겼다.
7. 권ㄷ환
슬픈 유머 같은 세속
뉴스를 보다 보면 끊임없이 사건과 사고가 발생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건 자체보다, 사건 이후에 따라오는 사과문과 대체로 형편없다고 여겨지는 사과문들에 대한 비평에서 반복되는 일정한 패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깨단한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물론 예외야 있겠지만) 제대로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 게다가 물의를 일으킨 사람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기대한 다는 것은 애초에 실망할 수밖에 없는 헛된 바람 같달까.
"많이 공부를 안 해도, 바보가 안되려면 일단 너무나 쉽게 인과율에 빠지지 말자는 것과 더불어서 내가 문제의 원인일 것이란 사실을 다시 한번 체크해 보자. 그것만 되어도 그 사람은 바보가 안되지 않겠는가."라고 단보 선생은 말한다. 그렇지만 슬픈 유머 같은 세속은 역시나 바보 같은 반복을 바보처럼 또 반복할 것이 분명하다.
인과율조차 쉽게 단정 짓지 않고 항시 비용을 감당하는 이들은, 온갖 오해뿐 아니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만치 온 세상의 자리에서 자기 개입의 자리를 인지하며 "걷고 걷고 걸으며 알게 되고, 행하고 행하고 행하며 깨닫는다."(闇然而章, 51) 그는 그렇게 깨닫는 중에도 '조심'하며, 이전보다 더 많이 "알(아가)면서도 모른채"(k 선생)하며 나아간다.
그러나 "무지에의 욕망"(김영민, 자본과 영혼, 148p)에 순치되어 '생각'하는 이들은, 온 세상의 것들을 관조하는 혼자만의 예외적인 깨끗한 자리에서조차, 따개비같이 단단히 정교화 시킨 진짜(?) 소중한 자신의 내면에 흠이 날까 타자를 통해 바깥에서 전해오는 소중한 신의 소식에도 두려움에 떤다. 그는 '타자'도, '바깥'도, '인문학'도, 심지어 '모른다'도(!), '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한 방편은, (이미)바보에게는 정작 닿지 않는다는 슬픈 사실.
8. 여일
'겨끔내기'라는 개념이 다양한 모습으로 재밌는 공부로 다가온다. 겨끔내기는 고도의 응하기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몸이 항상성의 시스템으로 유지가 되듯이,
인간사 모든 일은 사람의 일이듯이, 모자람과 넘치는 것은 겨끔내기로 조금씩 균형을 만들어 가야 한다. 사람의 일은 일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넘어지고
미끄러지고 어긋나면서도 우리는 서로 빚진 자로 어울리고 어리눅을 수밖에 없다.
9. 아무공
모든 사람들이 자기만의 우회 방식을 가지고 걸어간다.
우리들의 목표가 자기 구제의 길이라고 하더라도 다 다르게 간다는 것이다. 이게 피할 수 없는 우회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 구제라고 하는 공부의 목표를 위해서 각자가 다르게 운신할 것인데, 그것이 일종의 우회로이고 이것 때문에 자연적인 이치로 자꾸만 공부를 환원시키는 것이 문제가 많다고 보는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보편주의에 빠져있었다. 그 뿌리가 깊다.)
10. 지린
*
교재 115쪽에는 아래와 같은 문장들이 있었다.
“설계자들은 어린나무가 제대로 자라려면 바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바람은 나무를 휘게 만드는데, 그러면 바람이 불어오는 쪽에 있는 뿌리 부분이 끌어당겨지면서 반대 방향에 있는 나무 부분이 압축된다.
뿌리계는 이에 대한 반응으로 필요한 곳에 더 단단한 닻을 제공하려고 팽창하며, 압축된 나무 세포들은 구조가 더 튼튼하고 단단하게 변한다.
이렇게 변화된 세포 구조를 ‘이상재reaction wood' 또는 ’응집계 stress wood'라고 부른다.
어릴 때 강한 바람에 노출된 나무는 다 자랐을 때 훨씬 강한 바람도 견뎌낼 수 있다.
이와 반대로 보호받는 온실 환경에서 자란 나무는 다 자라기 전에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는 일이 종종 생긴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는 詩의 문장은,
당연하게도 자연과학으로도 충분한 시인의 직관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게 하는 구절이었다.
속속 강연 중에, 선생님께서 근대화보다 “실내화”라는 말을 써보자고 하시며,
실내화는 우리로 하여금 실재 사물을 만지지 못하게 한다고 덧붙이셨다.
한문강독시간에 발표자가 폭백(暴白)을 말하였을 때,
“白자가 있기 때문에 변명하다가 되었다”고 덧붙여 주셨는데,
그 말씀을 들을 때 나는 글자와 단어가 생긴 이치가 재미있으면서도 신기했다.
白 자는 고백(告白)이나 자백(自白)처럼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말하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도 하는데,
사납게(暴) 자신을 말하는 것이 변명이라는 것이니,
에두르지 못하는 말하기, 즉
일단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오는 에두름이 없는 말하기는
변명은 사나운 것이려니 하였다.
이 이치에 의하면 사나운 곳은 에고이며 실내이고,
바람 없는 곳이며, 평온은 밖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일 터인데,
상식적으로 그리고 습관적으로 나는 자주 반대로 느낄 때가 많았다.
바람 부는 쪽으로!
11. 독하
'약속, 낭독, 복종, 연극' (단보선생)
에고라는 증상의 덩어리는 자신의 삶에서 외부와 응한 마찰의 흔적을 몸속에 기록하여 고착시킨 패턴이다. 자타를 가르고 외부라는 타자(미지)와 응하는 노하우를 몸속에 기록하여 온 것이 생명의 역사다. 과거의 응하기를 몸속에 기록하며 역사성을 기반으로 외부와 응하는 것은 영점에서 다시 시작하며 외부와 응하는 것에 비해 생존이라는 몸(형식)의 유지에 효율성을 지닌다. 에너지는 준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생명도 물질을 기반하므로 여기서 예외일 수는 없다. 몸이라는 물질의 배치를 바꿔 에너지가 흐르는 길을 다르게 관개함으로써 타자를 분별하고 이에 맞춰 반응한다. 몸은 에너지 흐름을 위한 끌개(atrractor)로 작동하는 셈인데 몸이라는 위상의 차이를 (재)배치 하기 위해서는 몸속에 불확정성을 지녀야 하고 이를 결정짓는 것은 외부 자극의 빈도와 강도가 될 것은 짐작 가능하다.
에고가 '마음대로', '하던 대로' 기울 수밖에 없는 것은 물질성인 '최소 작용 원리'에 있다. 기성이라는 홈파인 공간이 주는 심리적 안정감과 편안함은 저항의 최소화라는 위상적 기울기에서 연원한다. 뇌는 타자와 응한 마찰을 기록하며 비가역적으로 구성된 몸이라는 끌개와 실재 사이에 어긋남이 적을수록 에너지 사용이 최소화돼 안정감을 얻는다. <불안 세대>의 불안은 이 어긋남에서 비롯한다. 변화가 적은 환경에서 적응이 목적이라면 에고는 적절하게 작동돼 문제될 것이 없다. 문제는 인간이라는 언어적 존재가 처한 외부 환경에 있다.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여타 동물과 다르게 외부 자극의 수동적 수용을 넘어 정신이 외화된 다양한 문화적 환경에 둘러싸인다. 변화가 적다면 외부와 응하는 노하우를 몸이라는 내부에 기록하여 계통 발생적으로 전달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언어의 되먹임을 매개로 변화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문화적 환경에서는 노하우를 내부에 담아낼 수 없는 물리적 한계에 처한다. 신경망이라는 개체 발생적 우회로는 이런 물리적 제약에서 연원한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고 자본과 기술이 세계의 가능성을 독점할수록 인간이 속한 문화적 환경은 무시간적 공간으로 치닫는다. <불안 세대>에서 지적한 자유 놀이의 실종과 전자 매체의 폐해는 개체와 개체를 통시공시적으로 연결하는 공통된 행위 지표로서의 언어적 기능이 상실됨에 있다. 이는 몸이라는 끌개를 매개하는 언어가 전통이라는 통시공시적 연결성을 잃고 유투버와 인플루언서가 유행(소비)시키는 언어로 분산되는 시대적 배경에서 연원한다. 불안의 기원은 행위와 동시 유입되지 않은 언어가 문화로서 소비되며 일상의 행위 지표로서 안착되지 못해 외부와 응할 노하우를 갖추지 못한 탓이 크다. 잃(잊)어버린 전통의 가치는 공통된 언어가 '(의)례'라는 수행성과 동시 유입을 거쳐 공통된 행위 지표를 이루고 이를 기반해 공동의 노동으로 이어짐에 있다. 개별성이 극단으로 향하는 시대일수록 약속, 낭독, 복종, 연극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약속, 낭독, 복종, 연극은 에고를 묶어 타자성을 통합시키는 틀로서 작동해 어울림의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