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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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숙행은 장숙강, 가이소, 속속과는 또 다른 공부 장소였다. 선생님, 숙인들과의 어울림 속에서 나의 말과 행동은 부족함과 자기 증상을 민낯으로 드러냈다. '정신은 자란다'의 의미를 배우는 시간을 통해 헤겔이 신을 인간과 분리된 초월적 존재로 본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인간의 정신은 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동시에, 신은 인간의 정신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고 여긴 것이다. 신과 인간이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상의 소소한 자득을 통해 신으로 점점 나아갈 수 있다는, 정신은 자란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신입 숙인으로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은 당연하고, 이 부족함이 앞으로도 민낯처럼 드러나겠지만, 나에게 낯선 숙인들과의 어울림은 '사건'이고, 이 사건을 통해 발생하는 균열 속 파토스에 계속 승복하도록 말과 몸을 고이고이 살펴야겠다.



숙인이 되고서 다섯 번째 장숙행을 다녀왔다. 강릉 오죽헌을 걷는 중에 신입 숙인 수ㅈ씨가 연이정은 장숙행 온 것을 후회해 본 적이 없는가 하고 의미심장한 질문을 하였다. 나는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전혀, 올 때마다 새롭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웬만한 독신 이삿짐을 방불케하는 짐을 싣고 언제 어디서나 장숙만의 장소화를 이루어 동학들과 평소 나누지 못한 얘기를 나누고 겨끔내기와 공동의 노동,
'현복지'를 실천하는 어울림 속의 즐거움은 더위를 잊게 하였다.
빗속 설악산 오색 약수터 자락길을 걸으며 본 숲의 풍경과 맑은 공기는 신선이 부럽지 않았다.
특히, 이번 장숙행에서는 그간 배운 암연이장(闇然而章)을 복습하며 보충하는 시간을 가졌다.
문장마다 그 함의가 깊어 긴 시간 질문과 생각을 나누느라 진도를 많이 나가지 못한 점이 아쉬웠지만,
한 문장 한 문장이 새롭게 깊이 다가와 개념이 길을 낸다는 말을 실감케 했다.
그중에서 새롭게 알게 된 한 문장을 옮긴다.
"암연이장(3) 짐작(시기) 하지 않으면 자유로워질 겁니다."
짐작과 시기는 고등동물의 감정으로 인간만이 갖고 있는 문명화된 정서라고 한다. 행동만 하는 생명체도 많지만 인간은 행동을 방해하는 사고가 생겨버려 눈치 보거나 재고하는 복잡한 감정이 생겨버린 것이다.
- 짐작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것 때문에 상대방과의 관계가 고착되는 경우가 종종 있고, 이로 인한 '피해 망상'은 짐작의 병이라 할 수 있다. 밀접한 관계에서 짐작이 많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연극적 실천은 짐작에
근거하지 않고 행동에 근거해서 움직인다는 것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 ‘짐작’이라는 마음의 상태를 잘 배치하여 어떤 자리에 봉인해서
확정될 때까지 기동하지 못하게 잡아두는 마음의 힘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하셨다.
- 공부한다는 것은 행동으로 자신을 나타내지 못하고 마음으로 나타내려는 심리를 멈추고
그곳에서 나와 행동으로 자기 삶을 증명하는 것이다.
"변명 안 한다는 것, 짐작 안 한다는 것, 오해 삼키는 것이 자원이 되고 자기 존재를 두텁게 한다.
이것만큼 자기를 키우는 것이 없다."(단보선생)고 하셨다.

이번 장숙행을 통하여 얻은 공부의 표지석은 ‘말’과 관련된다.
“공부를 하며 결국에는 말의 자율성을 얻어 가야 해요. 공부의 마지막 힘은 말의 창의성입니다.”(단보 선생)
말이 뜻한 바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몸에 포획되거나,
몸을 소외시키며 섣부르게 발화되거나, 변명으로 빠져나간다거나, 아니면,
아예 상호 불편한 말은 회피하는 식으로, 말과 몸이 어긋나는 곳에서 공부의 불쾌가 생긴다.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행지(行知)일 터, “말을 하는 사람”(단보 선생)이 되는 것이다.
가급적 정교하게 ‘잘’ 말하려고 애쓰면서.
문제를 풀 때 우리는 수학적 공식이 아니라, 언어적 힘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가급적 ‘~가 이런 말을 했다’는 식의 피상적 인용을 줄이고, 표현과 전달에 주의하면서 나의 문제, 당신과 나를 힘들게 하고 당혹하게 하는 문제를 말로써 풀어보려는 시도가 있어야 한다. 덩어리진 현실을 하나의 질문으로, 그래서 사유할 수 있는 문제로 만드는 것이다. 차마 말할 수 없는 것들에 최대한 말로 가까이 다가가 보는 것 !
우리는 말의 힘을 믿는 사람들이다. 대화의 갈등과 긴장은 창의성을 위해 필요한 물매라고 기억해두자.
처음부터 완결된 말, 완성된 말이란 없다.
“말이 길을 만들고, 말이 말을 정화”(단보 선생) 하도록 계속되는 실천이 있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