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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린  
*
선생님께서 오코너는 단어 “grace”를 많이 이용하는데, 정신분석의 “진실”이라는 의미로 사용
하고 있다고 강의해주셨을 때, 오코너가 매개인 교실 안으로 내가 들어서지 못했다는 감각이
분명했다.
*
오코너를 읽은 독후감을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서 여러 차례 발표를 했지만, 복습
을 하면서 그 일을 돌아보니 힘 팽기고 한숨이 난다. 기운을 한껏 써서 팽기는 게 아니라, 헛
힘을 쓰거나 헛다리짚었을 때처럼 팽긴다. 그 많은 말이 한국어로 번역된 오코너를 읽고 한
말이었으니, 나는 문학적으로는 말 못하고, 문자적으로 의미론적으로 서사적으로만 감탄하며
말할 수 있었을 터다. 변죽만 울린 셈인데, 변죽을 치면 복판이 운다는 속담이 있기는 있다지
만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문학의 문장에 들어서면 그녀의 감성과 함께 시간/역사를 직관적으
로 누릴 수 있을 텐데, 나는 그러지 못하는 거다.
*
실력 자체는 힘쓰는 게 아닐 터인데, 헛힘을 썼다. 힘 팽기면서도 무안하다. 다음 속속 때는
힘 팽기지 않도록 그녀가 쓴 문장을 읽어내고, 그를 딛고 거기 있지 않으면 안 되겠다. 내가
오코너를 읽고 한 마디라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아니면 진정으로 한 마디의 말도 필요
없다는 사실을 역설할 수 있기를 바란다.

2. 연이정
단보선생께서는 "적경을 하는 것은 자기보다 큰 자기의 세계로 접근하는 길을 내기 위해 반복해서 해보는 훈련이다. 반복해서 걸어야 새 길을 낼 수 있고, 창발성을 얻을 수 있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꼭 적경이 아니더라도 산책, 명상, 멍 때림이든 '지금의 내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하고, 나에게 다가오는 미래의 소식(가능성)에 대한 기다림이 있어야 한다고도 하셨다. 엄마가 태아를 품고 있듯이 자기 안에 더 큰 자기의 가능성의 씨앗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늘 마음의 중심의 낮추고 고요하게 하는 것이 공부의 출발이고, 어떤 일의 시작에 앞서 갖추어야 할 마음의 태도라는 생각이 든다.

3. 류수
"공포나 애착은 마음이 맺혀져 있는 자리이다. 마음은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맺혀 있는 부분만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다. 공부하는 사람은 공포나 애착과 같은 맺힌 마음의 자리를 반드시 풀어야 한다" 라고 단보 선생은 말씀하셨다. 

"암기는 마음이 한 일이 몸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라고 단보 선생이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경험이 있다면, 물에 대한 모든 상황을 죽음으로 암기할 것이다. 물과 죽음에 대한 동일선상의 암기는 우리 뇌에 흔적을 내고 길을 만들고, 이전과는 다른 뇌를 만들고, 결국에는 다른 몸을 만들 것이다. 충격적인 사건, 그 사건으로 만들어지는 감정과 마음, 반복적인 감정과 마음으로 생기는 특정한 공포와 애착을 특수하다고 생각하며, 이것을 외따로이 생각한다.  그러나 단보 선생의 말처럼, 이것은 따로 떼어낼 수 없다. 마치 간암에 걸린 인간이 암을 자신의 몸과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과 같을 것이다. 물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사람과의 관계를 가질 때 이 공포감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라는 질문이 생겼다. 맺혀있는 자리가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의식적으로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물, 사람, 사건들을 무의식적으로 맺혀있는 자리마다 부딪히며 또는 공명하며 오해를 빚어낼 것이다.  

충격적 사건이 계기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해야 겠다고 마음을 먹고 매번 해버린다면, 즉, 마음 없이 연극적 실천으로, 매번 같은 행동을 하면 뇌에 흔적이 남고 길이 남아 다른 몸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음을 넘어서는 자리, 형식이 내용이 되는 자리일 것이다. 나는 암기와 같이 어떤 반복적인 행동을 하고, 뇌에 어떠한 흔적을 만들고 길을 만들것인가

저번 쑥쑥 모임에서 연이정이 단보 선생의 '다르게 쉼없이'의 복습하면서, 단보 선생은 최소 4년에서 ~ 최대 30년 동안 같은 행동을 하신다고 했다. 그 행동은 생활 곳곳에 녹여져 있고, 단중, 경행, 양발, 양손과 같은 신체의 이야기 이며, 이 세묘한 생활은 모순의 일치, 현명한 복종과 같이 선생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고 하였다. 

나는 암기와 같이 어떤 반복적인 행동을 하고, 뇌에 어떠한 흔적을 만들고 길을 만들것인가?

4. 유ㅅ진
“암기는 마음으로 하는 것인데, 암기를 하면 신경세포 돌기에 새로운 가시(spine)가 생기는 물리적 변화가 일어난다.”
정신적 현상이 실제 물리적 변화를 만들어낸다는 단보선생의 말씀이 나에게 희망의 메시지로 다가왔다.
읽어야 할 책과 읽고 싶은 책, 외워야 할 단어는 끝도 없이 생겨나고, 새로운 지식을 머릿속에 채워 넣고 싶은 욕심은 크지만, 돌아서면 즉시 휘발되어 버리는 참담한 현실 앞에 공부에 대한 회의감마저 들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을 쏟아 무언가를 외우고 노력하는 순간, 뇌세포는 새로운 길을 내며 물리적으로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씀에 용기와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다만, 비워내지 않고 채우기만 하는 방은 결국 어질러지기 마련이니 '단사리(斷捨離)'의 지혜로 배운 것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반복의 과정을 통해 신경세포의 가시도 자라고 나의 정신도 자랄 것이라는 새로운 전망을 품어본다.

5. 심ㅈ영
"적경((寂敬)을 하는 것은 여러가지 효험이 있지만, 그 중 한 가지는 자기보다 더 큰 자기의 세계로 접근하는 길을 내기위한 것이다", "적경이라는 것은 우회적으로 숨어있는 창발성을 얻고자 훈련하는 것이다.", "명상, 산책, 멍때림 등은 내가 전부가 아니라는 자각이 있어야 하고 나에게 다가오는 내 소식에 대한 기다림, 나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라고 단보 선생이 말씀하셨다.  
단보 선생이 하는 말씀 중에서 어색하게 다가온 것 중의 하나가 '나보다 더 큰 나' 그리고 '나에 대한 사랑'에 관한 내용이었다. 최근 '알모체'에 대한 이해가 조금 진척되었는데, 이해가 진척될수록 내 자신이 조금 더 겸허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내게 적경 '비슷한' 활동은 운동이고, 운동을 하면서 무의식이 열린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심지어 몸과 정신이 연결되는 느낌 때문에 일부러 운동에 나서기도 한다. 이번에 배운 적경의 효험을 평소에 하던 운동과 연결시키는 실험을 시작하였다. '허실생백(虛室生白). 타자의 빛이 생기기 위해서는 에고(ego)의 방을 비워 빈 곳이 있어야 한다.(단보 선생, <집중과 영혼>)' 

6. 김ㅅ연
단보선생께서는 번역본으로 접하는 문학작품의 불가해함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애쓰면 쓰는 만큼 근접할 수 있다는 격려도 하셨습니다. 
꾸준히 애쓰며 'A watched pot never boils.'라는 속담을 위안삼아 
지금 당장은 발전이 보이지 않지만 몇년 후의 미래의 나를 기대하며 
외국어로 문학을 읽는 시도는 살면서 끝없이 해내가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7. 임ㅁ애
"문학적 글쓰기와 비문학적 글쓰기 사이에 근본적 차이는 없다. 점진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선생님의 이 말씀은 문학에 대한 정의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소통이 지닌 어떤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특수성과 보편성은 분리된 두 영역이 아니라 한 세계를 이루는 방식이다. 이것은 다시, 길게 논의되어 온 통합(integration)으로도 이어진다.

“문학은 일반화되지 않는 특수한 개인의 이디오싱크러시(idiosyncrasy)를 끝까지 파고든다.” 철학이나 사회과학 등이 “보편을 향해 서둘러 생략해 버리는 것들”, 한 인물의 말버릇과 모자와 고양이와 시골 국도의 흙먼지를 문학은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파고들었기 때문에, 문학은 시대와 언어를 건너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범례(catholicity)가 된다.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은 오코너를 읽으며, 동시대 작가가 아니라 고대의 소포클레스(Sophocles)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녀의 글이 조지아의 특수함을 벗어나서가 아니라, 그 특수함의 바닥까지 내려갔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특수와 보편은 둘이 아니다. 불이(不二)다.

선의와 악의가 고작 두 개의 범주로 나뉠 수 없듯이, 먼저 이분법적 사고를 경계해야 한다. 이것은 오코너의 작품 전반에 깔린 전제이기도 하다. 그녀의 소설에서는 악마조차 은총의 원치 않는 도구가 된다. 둘이 아니라는 말을 같다는 뜻으로 읽는 것도, 아예 다르다는 뜻으로 읽는 것도 다시 이분법에 빠지는 일이다. 번역을 두고 되는가, 안 되는가를 묻는 것 역시 그렇다. 선생님이 원서 독해의 한계를 묻는 질문에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보지 말고"라고 하신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최선의 번역을 "죽은 애인을 본뜬 AI"에 비유하시며, 거기서 생기는 "무시무시한 갭"을 말씀하셨다. 서툰 번역(3천만 원짜리 AI) 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거의 완벽에 근접한, 30억짜리 번역이다. 언어가 이미 다른 이상, 아무리 완벽하게 옮겨도 옮겨지지 않는 것이 있고, 그 빈자리에는 한국어가 본래 품고 있던 소리와 연상과 뉘앙스가 스며든다. 그렇게 원작에 없던 무언가가 생겨난다. 그것이 무시무시한 이유는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을 대하는 일도 다르지 않다. 너도 나와 같은 본질을 지녔으리라 여기는 순간, 인간사의 절망들이 싹을 틔울 준비를 한다. 번역이 매끄러울수록 그 매끄러움이 지워 버린 살(flesh)의 부재를 알아차리기 어렵듯, 다 이해했다고 믿을수록 이해되지 않은 그 사람의 특수함은 더 기괴해진다.
그러니 굳이 번역을 거쳐 갈 것이 아니라, 원문으로 곧장 들어가야 한다. 누구나 특수하고, 그 특수함을 통해 보편에 접속할 수 있다면, 가능성을 넘어 자신감도 얻을 수 있다. 언어의 장벽에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같은 한국어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완벽한 소통은 불가능하다. 바깥에서 온 이와의 소통은 더 자주 어긋나겠지만, 그렇다고 단절되어 있지는 않다.
차이는 본질이 아니라 ‘정도’에 있고, 외국어를 배우는 우리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바깥에 서 있을 뿐이다. 오히려 경계에 선 시선이, 익숙함에 묻혀 원어민이 지나치는 것을, 번뜩이는 순간에 붙잡을 수도 있다. 외국인이든 경계인이든, 그가 붙잡아 낸 것 역시 넓게 보면 통합되어 있는 인간의 보편성 안에 있다.
선생님이 "자기의 읽기를 위험하게 느끼라"라고 주문하신 까닭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위험한 읽기란 이어져 있음을 믿되 그 이어짐을 쉽게 소유하지 않는 읽기다. 그러니 위험하고 아찔한 공부를 해야 한다. 글의 "뭉텅이"를 뜯어 먹으며, "애를 쓰면 쓴 만큼 더 근접한다"는 감각으로 부딪혀야 한다. 그 안에서 누림을 발견하는 것은, 해 봐야만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실천이, 막연한 감상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은 중요해 보인다. 선생님은 수업 중에 비코(Giambattista Vico)를 인용하기도 하셨는데, '인간은 오직 자기가 만들어 본 것만 이해할 수 있다'(Verum et factum convertuntur)는 말이었다. 오코너 자신도 자기 작품에 관해 쓴 한 에세이(「On Her Own Work」)에서 소설의 주제를 미리 세운 것이 아니라 자기 글을 읽고 나서야 발견했다(I have found)고 말했다고 한다.
작가조차 만들어 본 뒤에야 자기주장을 스스로 이해한 것인가? 그렇다면 독자인 우리에게 '만들어 본다'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남이 만들어 놓은 번역을 읽는 일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원문의 문장을 그것이 펼쳐지는 시간의 순서 그대로 내 안에서 다시 짜 보고, 그 단어들이 원어민에게 불러일으키는 감각을 찾아보고, 그들의 발음과 뉘앙스, 억양(intonation)과 리듬을 따라 해 보고, 마침내 그것을 내 말로 다시 말해 보는 일이 아닐까. 선생님은 공부하는 사람의 말은, “남들이 하기 어려운 말을 잘 해내는" 훈련이라고 하시며, "오코너에 대해서도 일반적인 쉬운 말이 아니라 남들이 하기 어려운 말로 들어가야 한다"라고 하셨다. 이 더듬거림을 오롯이 통과해 오코너의 주장을 따내는 것. 그 길 위에서 무엇을 만나게 될지는, 역시 해 봐야만 알 수 있다. 다만 무엇을 만나든, 그것은 오코너의 특수함과 나의 특수함이 서로 겹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작은 통합일 것이다.

8. 단빈
소통에 염증을 느낀다는 한 청강생의 말에 응해서 단보 선생께서는 진실을 대면하는 것으로 그 염증을 풀어갈 가리사니를 얻을 수 있다고  하셨다.
한편, 진실에 가려진것이 공포나 애착의 형태로 드러나기도 할 것이다. 과도하게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드는 공포나 애착은 삶 전체에 영향을 주기에 개별적 공략으로 풀어야 한다고 단보 선생은 말씀하셨다. 한쪽으로 쏠리면 자연스레 다른 곳마저 무너지기 마련이다. 
​공포와 애착을 타개하고 싶기도 하면서 아직은 진실을 대면할 준비가 부족함을 느낀다.  맺힌 것들을 차근차근 풀어내어, 마침내 염증을 해소하고 은총을 얻었노라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도 할테다.

9. 권ㄷ환
"빛나는 도시의 외부에서 강은 썩고 있다" <속속 212회, 암연이장>

-실내화된 실내인 도시의 화려한 스펙터클은, 실외화된 실외인 황폐한 강을 재로 만들며 타오르는 불빛과 같다.
"생각은 공부가 아니"라고 할 때의 생각을 실내로, 책이나 남의 글과 생각, 즉 타자의 말을 실외로 치환해 보자. 타자와 어긋냄의 비용을 지불하며 공부하지 않고 골방에 홀로 앉아 혼자만의 생각으로 공부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정신은 실로 놀라워서, 그 또한 나름 정교하고 세밀한 무언가를 견고하게 지을 수 있다. (아니, 더 정교하고 더 세밀할지도!) 그러나 그것은 알맹이가 텅 비어 있는(空) 빈 수레일 것만 같은데, 변수를 봉합(封合)하고 상수만으로 빽빽이 지어진 그 집은 약한 지진에도 쉽게 무너져버릴 허(虛)상에 가깝다.

"하여간 공부한다는 것은 자유로와진다는 것, 이라 대충 말할 수 있거든요. 그게 무슨말인지 설명해야 되겠지만. (중략) 이것을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어서 생각을 해볼 수 있는데. 공부가 높아져서 자유로워지면 의식이 총명해져서 아주 똑똑해져서 빤짝빤짝 빛나면서 아무도 나를 반박못하는. 그런모습이 공부가 된 모양은 아니겠죠. (중략) 그렇다고해서 자기를 완전 죽여버리고 사물처럼 되어버려서 다산선생도 '나는 이제 평생 책도 많이 봤고 아는것도 많고 온갖 생각이 많은데 나는 이제부터 방안에 가만히 앉아가지고서 햇볓만 쬐면서 사물같이 늙어가면좋겠다.' 라고 말해요. 이것도 어떤 기분에 상태에 빠진것이거든요. 근데 이것이 과연 좋은것일까. 올바른 공부의 모습이 빛나는 의식도, 어두운 무의식도 아닌, 어떤 사이라고 나는 보거든요. 빛나는 지성과 사물같이 어둑어둑한 무의식. 지혜로운 곰팡이도 아니고 방구석에 혼자 지잘난맛에 빛나는것도 아닌." <장숙강 57회, 영원한 자기소개 중, 단보 선생>

-성인을 위한 연극이라는 방편은, 악마로 향하는 길에도 (더 많이)놓여있다.
바깥을 차단하고 타자를 삭제한 뒤 완성되는 합리의 집은 매끈한 내부의 정합성으로 반짝반짝 빛날 수 있겠지만, 그것은 나르시시즘이거나 혹은 거대한 환상에 불과하다. 자폐화로 완성한 연극의 스포트라이트는, 마치 황폐한 강을 비용으로 존재하는 빛나는 도시처럼 타자를 연료 삼아 비추는 (예고된)폭력의 불빛이다. 그것은 어둠을 뚫고 나온 찬란함이 아니라 곧 자빠지게 될 상황을 예고하는 경고등의 불이며, 공(空)과 허(虛)에서 빚어낸 시중(時中)이 아니라, 생산적 권위 없이(空) 앎의 허(虛)영에 잡아먹힌 채 타자를 협박하는(瞋) 시중(時衆)/실중(失中)인 것이다. 어떤 연극은, 귀신과 물건과 동물은 물론, 사람도 그리고 미래의 관객까지 전부 탈락시킨 채, 오로지 자기만을 관객으로 기괴하게 이루어진다.

시인 고은은 제주 관광객을 제주의 풍경만 관람하는 관광객을 욕한적이 있다. 지금도 강을 보는사람들이 전부 구경만 하는 것 같다. 강은 다 썩어있는데. 멀리서 보지말고 접근해서 속내를 파악해야..<속속 212회, 단보 선생>
무지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지식의 결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알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한결같이 노력해온 결과가 바로 무지입니다. 무지는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근면의 성과입니다 <우치다 타츠루>

-무지에의 욕망(자본과 영혼, 단보 선생), 그러나 안다고 사라지진 않는 근원적인 부조리
초등학교 1학년 때, 지구는 지구본의 크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치 크고 세계는 무지 넓다는 걸 배웠다. 세계 제일의 부자 빌 게이츠에 대해서도. 그때 이후로 줄곧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땅'에 주인이 있다는 사실이 의아했다. 한없이 넓은 세상에 땅 한 칸 없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엄마는 어떤 땅의 이전 주인은 그 전 주인이 주거나 팔아서 주인이 된 거라고 했다. 그럼, 처음에 대체 어떻게 땅의 주인이 생겼을까. 나는 그때의 '이질감'이, 성인이 되고 대학에 들어가 여러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이런저런 고민과 잡다한 영화를 감상하고 인문학을 접하고서도 조금도 가신 적이 없다. 나는 최승호 감독의 <추적>을 본 뒤 가까이 접근해서 강을 바라봤을 때도, 대체 그 강이 어떻게 그렇게 된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꼭 어릴 때 땅의 주인이 있다는 사실을 접했을 때의 그 이질감과 닮았었다. 누가 아무리 그 강이 더러워진 원인이, '나태한 공무원이 문제'니 '부패한 정치인 때문'이니 '악마 같은 자본주의 체제 때문'이니, 하며 온갖 합리적인 분석과 이유를 설명한들, 그리고 그 기원을 이해한들, 이 이질감이 영영 가시지는 않을 것 같다. 

10. 는길
“무아(無我)인 걸 모르는 삶은 한심하다고 칩시다. 애착의 삶이니.”
“無我하면 어떻게 사는가, 의 문제가 실천에서 핵심이 됩니다. 없는 나를 가지고 잘 살아야 하거든요.”(단보 선생)

생의 초기 애착에는 죄가 없다. 오히려 정당하다고 보아줄 수 있다. 절대적 의존 상태의 아기는 그렇게 자신을 대리해 줄 타자와 결속하고, 그것은 생의 조건이었다.
그런데 어른의 몸으로도 애착을 한다. 애착해 보았는가. 불안이 범람하고 편집증적 망상에 시달리고, 자기 괴로움에 압도되어 타자를 통제하려 든다. 그럴듯한 자기상(像)은 가차 없이 붕괴한다. 그러나 갈림길은 있으니 주체로의 출구가 그곳에도 있다. 더 이상 유아도 약자도 아닌 자신을, 대리해 줄 이가 “없다(無)”는 진실을 직면하면서, 망망대해(茫茫大海)이며, 텅 빈 장소이며,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장소에 다다른다.  
또다시 애착함으로써 무(無)의 현실을 회피하기도, 타인을 통해 빈 곳을 메우려는 헛된 시도도 반복되겠지만, 오코너 식의 ‘은총’이 번득이고 죽비소리도 들리는, 무엇보다 애착 너머를 밝히는 ‘말’이 공부길 위에 있다.

11. 박ㅇ름
이번 속속에서 공부한 내용들 중에 "마음은 분리 독립해서 서지 못한다"(단보선생)는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마음은 서로 분리된 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해야 하는 것이므로 만약 과도하게 마음을 쏟게 되는 영역이 있다면 그것이 마음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맺힌 마음의 자리를 풀어낼 필요가 있다는 말씀이었다.
이것은 한 숙인이 물에 대한 트라우마를 이야기 한 것에 대해 응하여 말씀해 주신 것인데, 익사에 대한 공포뿐 아니라 벌레를 무서워하는 마음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마음들은 깊은 물가에 가지 않거나 벌레를 마주치지 않는다면 그다지 크게 작용하지 않을 마음의 영역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평소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 마음이 나에게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내가 평소에 잘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풀어내야 할 마음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지, 내 마음을 들여다보게 하는 말씀이었다.

12. 여일
1) ‘문학을 읽을 때, 우리는 무엇을 공부하는가?’
오코너의 작품을 만나면서 위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만남에 대한 기대감이 사뭇 크다. 예언자는 신의 매개가 되어 세상에 정의를 외치듯이, 어떤 문학은 작가를 통해 시대를 관통하는 예언자적인 계시를 보여주는 것 같다. 오코너는 폭력, 죽음, 부적응자 등 그로테스크한 사건을 통해 인간의 내밀한 위선들과 오만함을 차갑게 폭로한다. 거짓이 폭로된 자리는 어떤 은총을 만나는 가능성의 자리가 된다.
2) ‘다르게, 쉼없이’는 단보선생의 생활세계를 보여주는 소소한 버릇들이 소개되어 있다. 정신을 자라게 하는 공부가 무엇인지 다시 알게 되었는데,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평심한 깨달음이었다.

13. 독하
소설을 '문학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말씀이 타자성으로 다가왔다. 문학책은 교재가 아니면 거의 읽지 않는 편이고,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지 않은 외국 소설은 더욱 읽지 않는다. 이유는 번한데 '마음의 길'을 겹쳐 내려면,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공부한다고 와서 공부를 기피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 나름 애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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