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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이정
'속속'을 마치고 난 다음 화요일 저녁 8시에는 속속의 모든 꼭지를 되새김해 보는 '쑥쑥'이 있다. 나처럼 수업 시간에 미처 이해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구세주와 같은 고마운 시간이다. 매번 2시간이 부족하여 시간을 넘기기 일쑤다. 어떤 질문에도 응해서 말해주는 동학이 있어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이번 쑥쑥에서 한 동학이 "지금까지 교재로 문학을 읽으면서 무엇을 공부했는가" 하는 질문을 하였다. 생각해 보니 내용도 내용이지만 지금까지 선생님께 배운 책 읽기는 나에게 책을 읽는다는 것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주었다. 지금껏 문학 읽기를 즐겨 하지 않는 나에게 문학을 왜 읽어야 하는지, 어떤 책을 봐야 하는지, 어떻게 봐야 하는지, 작가를 탐색하고, 시대적 배경과 함께 다양한 시각에서 비평적으로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었다.
이번 교재인 오코너 단편을 읽으면서도 "문학을 문학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배우게 하는가"(단보선생)라는 질문에 문학을 번역한다는 것에 대한 다양한 관점에서 비평을 해 보고 있다. 원문을 번역했을 때 근접할 수는 있겠으나 결코 그녀(그)가 쓴 문학은 될 수 없다는 것. 언어 구조의 차이에서 오는 어떤 길은 표현이 되지 않아 놓치는 경우가 있고, 마음의 길이 다른, 다른 언어로의 번역은 끝내 번역되지 않는(못하는) 무엇이 남는다는 것이다. 읽히지 못한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손쉽게 번역본을 아무런 의심 없이 읽었던 책들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하였다.

2. 유ㅅ진
공부를 한다는 것은 표면적인 의미만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이해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을 두고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은 사람이 이성 뿐 아니라 '무의식' 그리고 '나보다 더 큰 나'와 같은 깊은 정신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떤 말을 듣고 복합적으로 중층적으로 이해하는데 시간이 필요함에도 우리는 듣고 바로 알려고 한다.
우주에서 가장 빠른 태양빛도 지구에 도달하는데 8분20초의 시간이 필요하며 싹을 틔워 열매를 맺기까지도 긴 시간이 필요하듯, 모든 위대한 이야기들은 시간을 두고 길게 품어야 한다.

3. 심ㅈ영
8월 장숙강에서, 단보 선생이 “정신분석을 받는 환자와 배움을 받는 학생은 각각 분석가와 선생이 죽기를 바란다”며 증상이 주는 쾌락에 대해 하신 말씀이 계속 내 마음에 남아 있었다. 그 말씀이 무엇인지 잘 알면서도 무언가 들킨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이번 속속에서 “모든 인간적인 정감이 있는 모임에서는 저항과 전이, 양 사이드를 피할 수가 없다.”,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저항한다는 것도 인정하라는 것이다. 저항도 전이도 없이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도움을 받겠다는 사람은 없다. 나라는 인간에 대한 밀물과 썰물이 있다. 인정하고 배치하라. 그것이 해답이다. 다른 도리가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언제부턴가 속속의 공부가, 속속의 사람들이 좋으면서도, 그 속에서 드러나는 저항을 다루기 위해 공부 장소에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항을 넘어서지 않고는 방을 옮길 수가 없다.

4. 숙비랑
“사람은 시간을 두고 무엇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사람 자체가 깊기 때문이에요”(단보선생)

단보선생께서는 사람이 시간성을 두고 서로 만나야 하는 이유를 사람의 깊이에 담으셨다. 지구에서 바라보는 태양조차 8분 20초전의 태양으로, 그 시간을 확보하지 않으면 영영 만나지 못할 빛이라는 설명이셨다. 이어 ‘나보다 큰 나‘에 대한 조망도 함께 이야기 해주셨는데, 미래에서 오고 있을 나보다 큰 나와의 조우 또한 이 시간의 깊이가 없다면 영영 못만날 존재인 것이다. 타인의 깊이의 흔적을 잡아채는 것은 고사하고 스스로의 깊이에 포함되어 있는 미래 또한 망각하기 일쑤다. 과거와 미래가 시간성이라는 빛으로서 현재에도 있음을 잊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사람은 현재에도 늘 깊어진다.

5. 김ㅅ연
단보선생께서는 지구에서 사람이 태양을 볼 때 8분 20초의 시차가 있음을 예로 들어 사람 사이에도 듣는 것은 동시적이지만 이해하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이치를 설명해주셨다.
메시지와 내 자아가 만나려면 매우 긴 시간이 걸린다는 말씀을 들으며 그간 자녀들에게 잔소리, 충고, 비난, 호소, 애원, 한탄, 냉소에서 저주까지 다양한 형식의 메시지를 전달해온 자신의 언어행태가 떠올랐다.
상대방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이치를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 모든 패턴이 반복되어 왔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특히나 특히나 자녀와의 대화에서 앞으로 이 점을 명심해야겠다고 다짐을 해본다.

6. 아무공
저항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하는 것은 자기의 깜냥뿐 아니라 자기의 운명까지를 시사할 수 있는 지점이다. 저항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다만 배치하는 문제에서 현명을 구한다. 흔히 공부라는 과정을 자유를 찾는 과정으로 동일시하곤 한다. 이와 더불어서 공부는 현복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fake it until you make it. 젊을 때 (자유만을 쫓고) 본뜰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건 불행이다. 찾아가서 만나고 대화하고 본뜰 수 있는 사람 혹은 대상이 있는가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게 큰 공부중 하나다.

7. 단빈
영자소 B형은 '응하기'의 훈련이자, 불편한 말을 피하려 했던 태도에서 벗어나기 위한 또 하나의 공부다. 우리는 말로 만난다. 비평을 통해 서로의 공부를 돕는다는 것이 이 시간의 취지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첫 번째 영자소 B형 시간이 긴장감의 연속이었다면, 두 번째 맞이한 시간은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여전히 긴장감이 있긴 했으나 받아들이는 감각이 달라졌다. 숙인들이 던지는 질문은 결코 즉흥적인 것이 아닐 테다. 함께 어울려 공부하며 쌓아온 감각의 결과물일 것인데, 때로는 그러한 질문이 한 사람의 생활을 깊게 파고 들어 삶의 전환점을 만드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두 번에 걸쳐 두 숙인에게 던졌던 내 질문은, 상대를 향하기보다 내 공부의 지침으로 삼고 싶었던 '나 중심적인 질문'에 가까웠다. 숙인들에게 양질의 질문을 하지 못했고 내 답변도 적절하게 응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그 시간이 공부가 됨을 알 수 있었다. 취지에 맞는 질문을 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며 응하는 훈련을 통해 조금씩 또 나아가게 될 것이다.

8. 여일
1) '말똥말똥한 눈빛 속에는 에고가 들어가 있다'는 '멍하기' 공부와 관련해서 해주신 말씀이다. '멍하기'는 '띵하기'와 다르다고 덧붙여 말하였다.
말똥말똥한, 멍하기, 띵하기 등의 표현은 어린아이가 좋아할 법한 쉬운 말들이지만, 단순한 말 속에 이치를 드러내는 감각은 남다르다.
'멍하기'와 '띵하기'의 차이가 무엇일까. 쑥쑥에서 가리사니를 얻었는데, 이 둘의 차이는 '낮은 중심'에서 다른 몸이 된다.

2) 쑥쑥에서 수업내용을 여럿이 어울려 복습하는데 가리사니를 얻는 바가 적지 않다. 종교와 좋은 문학은 양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지고 각자 응하였다.
종교 혹은 진짜로 믿는 것은 진실을 직통으로 만나는 것이라면, 문학은 다양한 우회를 통해 진실을 만나는 것이다는 설명이 기쁘게 와닿았다.

3) B형식의 자기소개에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는 질문을 받았다. 답이 시원치 못한 것 같아서 이 질문이 계속 맴돌아 생각해보았다. 법륜스님은 이 질문에 이유가 없다고 단칼에 답한다.
태어났으니까 살아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고 무심하게 설명을 한다. '왜 사냐건 웃지요' 김상용의 시가 생각나고, 부처님이 설법의 자리에 앉아 가만히 연꽃 한 송이를 들자, 제자 가섭만이
그 뜻을 이해하고 빙긋 웃었다는 '염화미소' 장면이 떠오른다. 여러가지 생각이 들면서 이러한 질문에는 어떠한 답을 내놓아도 반칙이 되겠구나 싶었다. '살아가는 이유'는 애초에 정해진 것이 아니다.
"의미란 현실에서는 얻을 수 없지만, 의미의 부재를 느끼고 그 의미를 그리워하게 될 때 반짝 나타난다"(집293)

9. 는길
무엇을 ‘나’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단보 선생은 어느 글에서 변화한 만큼, 걸어나간 만큼, 연극적 실천으로 뚫어낸 만큼을 ‘나’라고 정의하셨다. 이번 속속 강의에서는, 〈지극히 인간적인 순간에 무엇을 교환하는가〉라는 질문이 더하여졌다. 무언가를 교환하게 되는 〈응하기〉의 자리에서, 우리의 인간성이 폭로되기도 보증받기도 계발되기도 한다. 여기서 “기계와 동물과 인간의 차이가 극명”(단보 선생) 해진다. 앞서 말했듯이 '지극히 인간적인 순간'에 무엇을 교환하는가에 따라 ‘이게 나’라는 결론적인 말이 생긴다고 하셨는데, 기억해야 할 것은, 본디 인과(因果)란 정보와 에너지와 물질의 작용이지만 인간의 응하기(果)는 다른 경로가 있는 듯이 이 범주를 초과한다는 것.

〈응하기〉의 자리를 통과하며 ‘나’라는 주체에 대한 최종적 언술을 획득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단 ‘응하기’에의 묶음은 인간을 사이-존재로, 사방과 소통하는 정신의 가능성이자 표현적 매개로 위치시킨다.

나는 주로 어떤 경로로 다니며 무엇을 교환하는가. 호오나 심리의 계선에 올라타지 않고 죽은 듯이, 〈낮은 중심〉의 경로로만 다닐 수는 없는 걸까. 교환양식을 정화하고 일상과 초상을 융통시키는 ‘낮은 중심’이라는 窓口로 다시금 다가선다.

10. 지린
지난 속속의 漢文古典講讀 시간에 발제발표를 했다. “夫學者之挾其小智凌駕先儒固爲不韙而至於箚記疑難實有益於問學亦先賢之所未嘗禁”을 발표할 때, 선생님께서 이 문장에 있는 두 개의 “之”가 “の”처럼 주격으로 쓰이고 있다고 바로잡아주셨다. 나는 “之”를 주격으로 하여서 위 문장을 다시 말하였다. “무릇공부하는자가끼인그작은지혜로선유를업신여기면본디옳지못하게되지만의문나는것을적바림하기에이르는것은진실로학문에유익한것으로또한선현이금한적이없었던바이다.” 선생님의 도움을 입어 혼란스럽던 문장이 반듯하게 일어서면서 길을 내고, 비틀거리던 나는 그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글속으로 들어서면 거기에도 길속이 있다. 길의 형국은 내 실력이니, 나의 걸음은 아직 더듬더듬 휘청휘청, 저 문장은 1709년에 쓰인 것이니, 300년이 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장에 들어섰을까, 저마다의 길이면서도 공통된 길이 있는 저 오래된 문장은 길속과글속이 어울리면서, 품위 있다. 문장으로 간신히 들어서면, 밖에 남겨둘 게 없다. 나보다 큰 세계이고 시간이기 때문이다. 문학/문장을 읽는다는 행위는 내게 그런 것이다. 깊고 너른 문장 속으로, 길속과글속이 함께 어우러진 관념의 세계가 나를 기꺼이 받아들여준다. 들어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물겹고 기쁘다.

11. 독하
후기 단상으로 적어 내기도 했지만, 오코너의 소설은 '나보다 더 큰 나'가 '알면서 모른 체하기'를 매개로 쓴 글이다. 물론 그녀의 문학을 말하는 에세이도 그렇다. 글 쓰는 '주체 아닌 주체'가 동일하더라도 문학과 문학론을 쓰는 시점의 매체적 환경이 다르기에, 문학론이라는 사후적 글쓰기로 문학에 대해 논하는 '어긋남'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소설은 문학이다. 그렇기에 '무엇이든 쓸 수 있다.' 이런 형식적 자유로움이 오코너의 '나보다 더 큰 나'로 하여금 그녀를 옭아맨 매체적 환경으로부터 자유로운 글쓰기를 가능하게 한 것이 아닐까. 그녀가 습합한 공부를 매개로 해서, 그녀의 '신앙 너머로' 말이다. 아니, 그랬으면 한다. 자신도 모르는 타자성의 발견은 하나의 '은총'일 테니.

12. 임ㅁ애
오코너를 읽는다는 것은 놀랍도록 즐겁고, 그만큼 아픈 일이다. 인간이 얼마나 자신의 믿음과 확신에 갇혀 사는 존재인지 거듭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창조한 작품 속 인물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코너 자신도 여성으로서, 미국 남부의 가톨릭 신자로서, 젊은 나이에 큰 병에 갇힌 사람으로서 자기 시대와 몸의 한계 속에 살았다. 그녀는 그 조건에 순응하지도, 거기서 벗어나지도 못했다. 오히려 조건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절박하게 알았기에, 그 안에서 무엇을 할지를 남다른 강도로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짧은 창작의 시간 동안 그녀는 기다리고, 고치고, 저항하면서 자기 문학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지난 시간 선생님은 복종에 대해, 그리고 명명(命名)에 대해 말씀하셨다. 나는 이 둘을 하나의 물음으로 읽어 보려 한다. 나는 나를 어디까지 알 수 있는가.

먼저, “현명한 복종”은 여전한 화두이다. 저항은 없애야 할 결함이 아니다. 자기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항한다. 중요한 것은 저항과 복종을 어떻게 인정하고 배치하느냐다. 무엇에 저항하고 무엇을 받아들일지, 누구에게 배우고 무엇을 본뜰지. 그것은 태도의 문제를 넘어 한 사람의 재능과 운명에까지 닿는다.

다음은 명명에 관한 말씀이다. 선생님은 “이름은 남이 짓는 것이고, 그래야 에고를 넘어갈 수 있다”고 하셨다. 내가 나에게 붙인 이름만으로는 내 가능성을 다 알 수 없다. 나를 알아보는 시선, 때로는 나에게 맞서는 시선을 통해 나는 나를 다시 발견한다.

오코너에게도 그런 만남이 있었다. 1955년 첫 단편집이 나온 뒤, 그녀는 작품을 읽고 편지를 보내온 독자 베티 헤스터(Elizabeth “Betty” Hester)와 교류를 시작한다. 헤스터는 오코너 작품의 종교적 의미를 알아보았고, 오코너는 자기 이야기를 이해하는 이 독자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 오코너가 세상을 떠난 1964년까지 9년간 250여 통에 이르는 편지가 오고 갔다. 거기에는 공감만이 아니라 이견과 논쟁도 있었다. 그 교류가 창작에 무엇을 남겼는지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독자의 해석이 작가에게 돌아올 때, 그것은 작가가 스스로 붙인 이름 바깥의 또 다른 이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작가는 그 이름을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 새로운 이름은 기존의 이름 바깥에도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코너가 1948년 출판 대리인 엘리자베스 매키(Elizabeth McKee)에게 보낸 편지를 상기시킨다. 그녀는 소설의 개요를 미리 짜지 않으며(I don’t have my novel outlined),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 써야 한다(I have to write to discover what I am doing)고 했다. 쓴 것을 보고 나서야 자기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게 되고, 그래서 다시 써야 한다(I don’t know so well what I think until I see what I say; then I have to say it over again)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발견하게 하는 타자는 꼭 다른 사람만이 아니다. 내가 쓴 작품조차 나에게 낯선 타자가 된다.

그러니 복종은 타인의 권위 앞에 나를 지우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닐 것이다. 내가 이미 아는 나만 고집하지 않고, 아직 알지 못하는 무엇과 관계를 맺는 일이다. 그 안에는 저항도, 갈등도, 받아들임과 거부도 있다. 그래서 현명한 배치가 필요할 것이다. 어떤 배치가 적절한지 아직 희미하다는 것, 그것이 때로는 동력으로, 때로는 좌절로 작동하기는 한다.

여전히 헤매는 중이지만, 이번 공부가 문학이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를 고민하게 한 계기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문학은 바로 그런 만남이 일어나는 장소가 아닐까. 문학은 이미 아는 진실을 전하거나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인간이 ‘그렇게 할 수도 있다’(Thou mayest)는 가능성을 끝없이 열어 둔다. 그 가능성이 반드시 선한 쪽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작가도 독자도, 이야기 속 인물도 이미 알려진 모습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아직 알지 못하는 나, 아직 쓰이지 않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것. 이것은 또한 인간이 왜 사느냐의 문제와도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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