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를 읽다가, “범천(梵天), 사천왕, 염라대왕, 제석천, 5도(道)의 명관(五道冥官), 저승사자, 사록(司祿)등의 허락을 받아”(262) 품은 원한을 되값기 위해 돌아 온 원령(怨靈)이, 법력이 남달라 자신을 제압할 수 있는 고승(高僧) 앞에 먼저 모습을 나타내어, 하늘의 허락을 받고 되돌아 온 것이니 자신의 한풀이를 막지 말라, 말하자, 그 고승이, 거의 제압하기 어려운 힘으로 되돌아 온 원령(怨靈)에게 이야기를 하는 품이, 꾀 많은 고승다워서, 읽기를 중단하고 옮겨본다.
………“지금 말씀을 들어보니 충분히 노여워하실 만하지만, 예로부터 어지신 분이 소인배로 인해 화를 입는 일은 원체 많아서 귀공 한 사람만의 운명은 아니옵고, 대체로 이 세상은 무도한 것이라 그렇게 원한을 지니는 일은 딱하게 보이는바, 아무쪼록 그런 생각일랑 접어두시기를 ……… 그러나 그렇긴 할망정, 귀하와 본인은 원체 깊은 인연이 있었기로, 모처럼 그렇게 간절하게 부탁해 오신다면, 비록 두 눈을 뽑힌들 그대 말씀을 좇아, 아무리 어명이 내린다 한들 그래도 받지는 않겠나이다. 다만 천하의 모든 것이 왕토(王土)이고, 본 우승(愚僧)도 왕민(王民)의 한 사람인 이상 만일 어명이 몇 차례에 이른다면, 두 차례까지는 안 듣더라도 세번째는 안 들을 수가 없겠나이다” 하고 대답하자………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262~263
* 나는 말하고 이야기를 하는 존재인 사람과 말하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어서 다시 돌아 온 존재인 귀신이 한데 뒤섞인 이야기 網 의 세계와 귀신 못 오는 “개념”과의 차이를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야기적 지식을 통해 우리는 이야기의 전통이 어떻게 해서 집단이 자신과 그 주변에 대해 갖는 관계들이 연출되는 삼중적 능력, 즉 말할 줄 앎, 들을 줄 앎, 행할 줄 앎을 규정하는 기준의 전통이 되는지 알게 된다. 이야기와 더불어 전달되는 것은 다름아닌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화용론적 규칙 집단(groupe de règles pragmatiques)이다." (<포스트모던적 조건>,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5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