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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에서는 옛부터 교양(Bildung), 특히 과거로 확정되는 관직 취임이 사회적 등급을 결정했다. 중국은 유럽의 인문주의 시대나 최근의 독일보다 더 배타적으로 문학적 교양을 사회적 존경의 척도로 만든 나라였다...(그래서) 2천 년 이상 독서인(die Literaten)이 중국의 지배적 계급이었다. 그러나 이 지배적 지식계층은 기독교나 이슬람교의 성직자적 성격은 물론, 유대교의 랍비, 인도의 브라만 또는 고대 이집트의 사제(司祭)의 성격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이 지식계층이 의례(儀禮)의 훈련과, 일종의 고상한 세속 교양(vornehme Laienbildung)으로부터 발생하였다는 사실이 중국문화의 발전방식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다."(유도166~168)


2. "주로 대외정치에 관심을 두었던 유대 예언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의례상의 훈련을 받은 중국의 독서인 정치가들은 주로 국내 행정문제에 관심을 두었다...이 독서인들은 처음부터 봉건제도의 반대자들이며, 국가가 관료적으로 조직, 운영되는 것을 지지하는 자들이었다. 이는 자명한데, 왜냐면 그들의 이해관계상 문학적 교양을 통해 인격적인 자격을 갖춘 자들만이 행정에 관여해야 하기 때문이다...관직을 둘러싼 봉록 추구자들 간의 경쟁은 봉건적 성격을 지닌 관리귀족들 간의 어떠한 연합도 저지하였다."(유도178)


3. "인도, 유대교, 기독교 및 이슬람교에 있어서 교양이 문헌적(文獻的)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그 교양이 문헌적으로 교육받은 브라만과 랍비들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거나, 혹은 성전종교(聖典宗敎, Buchreligion)의 직업적인 수도사들의 수중에 완전히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반해서, 그리스의 교양인은 오히려 장정(壯丁)의 것이며 중장보병(重裝步兵)의 것이었다...중세에는 기사적, 군사적 교양이, 그 후에 르네상스풍-귀족적 사교계교양(Salonbildung)이 사제 및 수도사에 의해 전해진 전적적(典籍的) 교양에 대항하였다. 반면 유대교와 중국에서는 이와 같은 대항 세력이 전혀 없었다. (정치적으로 정부도 무시할 수 없는 자의식을 지닌 시민계층은 중국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중국의 교양은, 다른 문명에서 사제들이 행한 교양과 같이, 완전히 비군사적이며 순수하게 문헌적이었다. 문헌적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文字'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성격이 극단적으로 강조되었다."(유도185)


4. 중국의 철학은 헬레니즘적 서양이나 근동 오리엔트처럼 전문적인 논리학을 추구하지 않았기에 어떤 스콜라 철학도 탄생시키지 못했다. 논리학은 순수히 가산관료제의 실천적 문제들과 이해관계를 지향하고, 경서(經書)에 속박을 받으며, 또한 비변증법적이었던 중국의 철학과는 인연이 멀었다. 실제적인 사려분별이 아무리 우수하더라도, 실제 지혜가 풍부한 공자의 수많은 진술들을 보면 그 비유적 성격으로 인해 합리적 논증이라기보다 오히려 인디언 추장의 표현방법을 상기시키는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정치적-사변적 효과를 위해 변론(辯論)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점에서 쉽게 느낄 수 있다. 변론은 역사상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처음으로 육성되었으나, 형식화된 재판을 갖추지 못했던 관료제적 가산국가에서는 결코 발전할 수 없었다."(유도188)


5. "중국의 가산관료제는, 점차 권력을 잃어간 봉건제도나 결코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 시민계급 세력으로부터 아무런 침해를 받지 않았고, 또한 독립된 교권제(敎權制, Hierokratie)와의 경쟁도 없었다. (유대교에서와 같이) 사회적 영향력을 지닌 예언(Prophetie)이라고 하는 것은, 근동적 성격이든 이란적 특성을 지닌 것이든 아니면 인도식이든,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초현세적 神의 이름으로 윤리적인 요구들을 제기한 예언자도 없었다...중국인의 정신이 예언자에 의해 혁명적으로 바뀐 적은 한번도 없었다. 개인의 기도(Gebete)는 존재하지 않았다. 의례(儀禮)에 충실하고 전적에 능통한 관리와 특히 황제가 모든 것을 돌보았다."(유도214)


6. "공식적 유교에서는 모든 내세의 희망에 대해 불가지론적인,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분위기가 지배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가 침투하지 못한 곳, 혹은 불교나 도교의 영향이 압도적인 곳에서도, 내세의 운명에 대한 관심은, 귀신들이 현세의 생활에 줄 수 있을 영향력에 대한 관심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었다. 중국에서는 다른 가산제적 단체의 경우처럼, 구세주-황제에 대한 메시아적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유대교의 경우처럼 절대적 유토피아에 대한 희망은 아니었다. 게다가 어떤 종말론도, 어떤 구원설도 없었으며, 또 일반적으로 초월적 가치와 운명을 붙잡으려는 노력도 없었기 대문에 국가의 종교정책은 매우 단순했다. 이는 한편 제사의 거행을 떠맡는 것이었으며, 다른 한편 사인(私人)들에게 필요한 주술사제층을 묵인하는 것이었다. 국가의 제사는 근엄하고 꾸밈이 없었다. 공희(供犧)와 의례적 기도, 음악과 율동적인 무용으로 이루어졌다. 모든 광조적(狂躁的/ orgiastischen) 요소는 엄격하게 제거되었다. 공적 제사에는 거의 모든 망아(Ekstase)와 금욕도 존재하지 않았다. 가령 로마의 관직귀족들이 디오니소스 숭배를 위험시했던 것처럼 그런 요소를 위험한 것으로 간주한 것에 틀림없다."(유도217)


7. "유교에는 필연적으로 인간은 종교적으로 불평등하게 자질이 부여되어 있다는 경험이 결여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은총상태(Gnadenstand)'가 종교적으로 개인차를 일으킨다고 하는 어떠한 사상도 존재하지 않앗다."(유도218)


8. "주술(呪術)에 대한 유교의 원칙적인 태도는 다음과 같다. 유교는 유대인, 그리스도교인 및 청교도들처럼, 주술의 실제성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주술은 결코 구제(救濟, Heil)의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 이것이 중요한 점이었다. 유대 율법가들의 경우에는 '이스라엘에서는 어떠한 유성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für Israel gelten keine Planeten). 즉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에게는 점성술에 의한 숙명 결정이 여호와의 의지에 대해서는 무력하다는 명제가 통용된 바와 같이, 유교에서는 그것에 해당되는 다음과 같은 명제, 즉 주술은 덕(德, Tugend)에 대해서 무력하다는 명제가 통용되었다. 더욱이 불교적 각자(覺者)와 그 도교적 모방자의 명상(冥想)은 유교와는 무관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공자는 '사람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살면서 기적을 행하고, 그리고 후세의 사람들로부터 사후의 명성을 누리는 것'을 거부하였다고 하는데, 이 말에는 노자의 신비적 도교에 대한 어느 정도의 논쟁적 풍자가 들어 있다."(유도228)


9. "유익한 실용적 지식, 특히 경험적-자연과학적이며 지리학적인 지향, 현실주의적 사유와 전문지식 등의 냉정한 명쾌함은 퓨리턴들에 의해 처음으로, 특히 독일의 경건파 신도들에 의해 육성되었다. 그것은 한편 神의 영광과 섭리를 그 창조물 속에서 인식하는 유일한 길이었고, 다른 한편 직업을 통해 현세를 합리적으로 지배하고, 신의 영광을 위해 그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유교와 퓨리터니즘은 모두 헬레니즘은 물론, 전성기 때의 르네상스의 본질과도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것은 각기 다른 의미에서였다...이것은 근대의 자본주의적 기업가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윤리적 자질이었다. 이러한 윤리적 자질과 경건한 노동자의 노동의욕, 즉 현세의 안에서(in) 생활하지만 현세를 양식으로 삼아(von) 지내지 않는, 이 냉혹하며 종교적으로 체계화된 공리주의가, 직업인층의 그 뛰어난 합리적인 능력과 그 '정신'을 만들어 내는데 공헌했다. 이러한 것은 유교와 그 세계적응적인 생활태도에서는 결국 어떻게 해도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었다. 즉 유교적인 생활태도는 합리적이긴 하지만, 퓨리터니즘의경우처럼 안으로부터 밖으로 향한 게 아니라 밖으로부터 안으로 결정된 생활태도였다. 이 대조가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은, 단지 '영리욕' 및 부(富)의 존중과 결합된 냉정함과 절약만으로는, 특히 근대적인 경제적 직업인 정신이라는 의미에서의 자본주의 정신(Kapitalistischer Geist)을 결코 대표할 수 없으며, 또한 그러한 정신을 낳을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합리주의라는 것은 양쪽의 윤리의 정신 속에 다 들어 있었다. 그러나 초(超)세속적인 지향을 지닌 퓨리터니즘의 합리적인 윤리만이 세속내적인(innerweltlichen) 경제적 합리주의를 일관성있게 관철시켰다."(유도350)


10. "유교도는 사회적 무례(無禮)라고 하는 품위없는 야만 상태로부터 구제되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구제되기를 원치 않았다. 유교도는 한 가지 사회적 기본 의무, 즉 공순(恭順, Pietät)의 위반만을 죄로 간주하였다. 봉건제도가 그 기본도덕으로 명예에 근거했던 것과 달리, 가산제는 그 기본 도덕으로 공순에 근거했다. 그 충성의 기본 성격은 봉건적이 아니라 가부장적이었다. 부모에 대한 자식의 무제한적인 효행은 그 모든 덕 중에서 기본이었다. 공자는 그 누구의 행위도 그가 그 부모의 장례를 어떻게 치르고 있는가를 보기까지는 그를 신용할 수 있다고 보지 않았다."(유도230)


11. "유교는 무교양의 야만상태에서의 구제 이외에는 어떤 것도 원치 않았다. 德의 보답으로 기대한 것은 현세에서의 長生, 건강 및 富이며, 죽은 다음에는 좋은 평판을 남기는 것이었다. 순수한 그리스인과 같이 윤리를 초월적인 것에 근거하게 하는 어떤 사고방식도, 초현세적 신의 명령과 피조물적인 현세 사이의 어떤 긴장 대립도, 내세의 목표에 대한 어떠한 지향도, 또한 근원적인 惡에 대한 어떤 관념도 유교도에게는 결여되어 있었다. 이러한 전제가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곳에서 그리스도교의 선교사들은 죄악감정을 불러일으키려 했지만 실패했다...그러나 현세를 초월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는 곳에서는, 현세에 대한 자체의 중량도 역시 없을 수밖에 없다. 대중의 순치(馴致)와 군자의 훌륭한 태도는 이러한 사정에서 생긴 것이었다. 생활은 일련의 사건에 머물러 있었을 뿐, 초월적인 목표하에 조직적으로 설정된 전체가 되지 못하였다."(유도334)


12. "소명-예언적 유형의 종교에서 예언자는 신의 이름으로 세계에 요구를 제시하는데, 이 요구는 윤리적이며 적극적인 금욕의 성격을 띤다. 현세 내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이 예언 방식은 바로 시민 계층에서 특별히 유리한 토양을 발견했다. 이 시민 계층은 적극적 금욕과 스스로가 신의 '도구'라는 의식 아래 신의 의지에 따르는 행동을 선호했으며 이것이 이들의 주된 종교적 태도가 되었다...소명-예언 종교의 경우 신도는 자신을 신성(神性)이 담긴 그릇으로 느끼는 게 아니라 신의 도구라고 생각한다. 이 소명-예언 종교는 초월적-인격적이며, 분노하고 사랑하고 요구하고 처벌하는 창조신 걔념과 친화적 관계를 맺는다."('전집'198)


13. "이 두 가지 모두, 즉 한편으로는 세계의 탈주술화, 다른 한편으로는 구원의 길을 명상적 현세도피가 아니라 행동을 통한 금욕적인 현세개조(現世改造)에서 찾는 것, 이 두 가지 모두를 완전히 달성한 경우는, 전 세계에서 발견될 수 있는 몇 가지 소규모의 합리주의적 종파들을 제외한다면, 단지 서구의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에 의해 창출된 종파뿐이었다...이들은 현세를 신의 계명에 따라 윤리적으로 합리화시키고자 했는데, 이는 종교적으로 자격을 갖춘 자의 은총과 선택됨은 바로 일상에서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있는 그대로의 일상이 아니라 신에 봉사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합리화된 일상생활에서 이 증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합리적 관점에서 직업으로 승화된 일상행동이 구원의 증거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 서양의 종교에서는 경제행위를 포함한 생활양식의 체계적 합리화의 요소를 형성했다. 이에 반해, 아시아의 명상적, 광란적, 또는 무열정적 설교자의 공동체들은 현세 내적 행동의 무의미성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동경의 배출구 역할을 했다."(전집206-207)


14. "구원예언이 순수하게 종교적 성격의 공동체를 창출했을 경우, 이 예언과 갈등을 겪게 되는 첫번째 세력, 또는 이 예언을 통해 평가절하될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 첫번째 세력은 자연발생적 혈연공동체다. 자신의 가족,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와 적이 될 수 없는 자는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라든지, '나는 평화를 가져다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가져다주러 왔다(마태10:34), 등의 성경구절은 이런 맥락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예언은 상기한 현세 내적 관계를 적어도 상대적으로 평가절하하고 친족관계의 주술적 구속과 배타성을 타파하면서 하나의 새로운 사회적 공동체를 창출했는데, 이것은 예언이 구세론적 교단종교성으로 발전한 경우 특히 그러했다. 이 새로운 사회적 공동체 내에서 예언은 종교적 형제애 윤리를 발전시켰다."(전집233)


15. "구원종교는 각별히 형제애에 적대적인 경제적 세력들의 발전을 깊은 불신으로 대했다. 카톨릭의 '신이 달가워하는 일은 아니다'라는 警句는 구원종교가 영리생활에 대해 가진 변함없는 태도를 특징적으로 보인다. 화폐와 재화에 집착하는 것에 대한 경고는 모든 합리적 구원방법론에서 단호한 거부로까지 강화되었다. 그러나 종교적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서는 경제적 수단이 필요했으며 또 대중의 문화적 요구와 일상적 이해관계에 대한 적응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종교적 공동체는 경제적으로 타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자금지의 역사는 이러한 타협들에 대한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모든 합리적 금욕주의의 역설, 즉 금욕주의는 자신이 거부하는 부(富)를 스스로 창출한다는 역설은 이 과정에서 모든 시대의 수도사 층을 함정에 빠트렸다. 즉 어디서나 사찰과 수도원은 그 자신이 합리적 경제의 장이 되었던 것이다. 이 긴장을 피하는 방식의 하나는 청교도적 직업윤리다. 이는 사랑의 보편주의를 포기하고 이 세상에서의 모든 활동을 신의 의지에 대한 봉사로 이해하고 또한 현세적 활동을 자신의 은총상황에 대한 시험으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청교도 윤리는 현세의 모든 활동을 합리적으로 객관화하고 이와 함께 현세 전체와 마찬가지로 비천하고 타락한 것으로 평가절하된 경제적세계도 신의 의지가 깃든 곳으로 수용하고 또한 의무완수의 대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긍극적으로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목표로서의 구원을 원칙적으로 포기하는 태도이며, 그리고 이러한 보편적 구원 대신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항상 특수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은총을 지향하는 태도이다. 사실 이러한 비형제애적 입장은 더 이상 진정한 구원종교는 아니었다."(전집2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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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버, <유교와 도교> (문예출판사, 2003) (본문 속에서는 '유도'로 약칭)

*막스 베버, <막스 베버 사상 전집1> (나남출판, 2002) (본문 속에서는 '전집'으로 약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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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찔레신 2020.02.17 23:14
    *이 글은 71회 속속(2월 29일) 중의 '복습' 교재로 사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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