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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訴訟)하는 여자>

燕泥子

 

   언제부터인가 선생님께서는 연니자를 소송(訴訟)하는 여자로 소개하신다. 처음에는 부끄럽기도 하고 과장되게 경험을 떠벌린 것은 아닌지 자기반성도 하면서, 불러서 된 새로운 정체성에 대해 오해를 풀어야 하는지 혹은 풀지 않아야 하는지 고민하기도 했다. 그리고 소송하는 여자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소송하는 여자가 갖는 함의(含意)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소송(訴訟)한다는 행위를 불의(不義)한 것에 대해 아무 말 없이 참거나 사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공적으로 발화하는 것이라고 규정할 때, 그렇게 불릴 만한 나의 이력(履歷)은 무엇인지, 헤아려보게 되었다. , 사람은 말과 행위를 통해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분하고 말과 행위는 인간으로서 서로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양식(아렌트, 인간의 조건, p.274)이라고 할 때 소송하는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는 누구인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먼저 공적으로 발화한 이력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발화에 대해서는 이미 이전의 별강에서도 밝힌 바 있듯이, 이상하리만치 어린 시절부터 바른 말하기를 즐겨하였다. 그 여파로 단지 바른 말을 한다는 이유만으로(이것은 순전히 나만의 생각이겠지만) 부모님의 미움을 한 몸에 받아왔다. 아빠로부터는 이모를 닮은’, 엄마로부터는 고모를 닮은’ X라는 소리를 들었으니,  두 분이 가진 미움의 정도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수 있겠다. 그래도 아직까지 이것은 어디까지나 집안일에 해당하는 사적인 발화였다. 이후 처음으로 공적인 영역에 나를 현상한 경험은 중학교 때 일이다. 남녀공학 중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웬일인지 담임선생님께서는 남녀가 짝이 되어 책상에 나란히 앉게 하는 것은 주저하였다. 반 친구들 모두, 남녀가 짝이 되길 원하였고, 반장도 아니었기에 왜 나섰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담임선생님께 반 친구들의 의견을 전달하고 그날 종례시간에 투표로 결정하기로 담임선생님과 단단히 약속을 하였다. 드디어 종례시간이 되었지만 기술과목 선생님인 담임선생님은 어쩐 일인지 아무리 기다려도 종례를 하러 교실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남녀가 짝이 되는 일은 무산되었다.

   두 번째 공적발화는 대학교 때 일이다. 돌이켜보면, 그 때는 사람 많은 대학 광장에서 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여성에 대한 폭력이 자행되던 그런 시대였다. 크지도 않은 캠퍼스에서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담배 피는 수많은 남자들 틈에서 단지 여자가 담배를 핀다는 이유로 옆에 있던 파란색 쓰레기통이 머리 위로 쏟아지는 야만의 시대였다. 그랬기에, 그런 시대였기에, 여성들이 당하는 폭력 앞에서 쉽게 동일시되었고 모든 여성에 대한 폭력은 곧 내가 당하는 폭력과 다를 바 없었다. 학교를 오갈 때 마다, 그 파란색 쓰레기통을 볼 때마다 금방이라도 쓰레기가 내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선후배들이 모여서, 뒤풀이 비슷한 것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제법 나이 많은 선배가 장난처럼 후배 여학생들의 브래지어 끈을 어깨동무 하듯이 뒤에서 잡아 튕기며 즐거워하는 것을 보았다. 평소 바른 말하기를 즐겨하였기에, 그 날의 일을 도무지 묵과할 수는 없었다. 그 선배의 만행을 고발하는 글을 써서 학과 사무실에 게시하였고, 다시는 적어도 내 앞에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그날 이후, 과 남학생들로부터 경계(警戒)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경계(警戒)는 내가 그들에게 보인 경계(鏡戒)의 효과였고 외려 나의 보호막이었다. 누구도, 내게 와서 음담패설을 한다던가, 귀엽게 대한다거나 하는 허튼 짓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시나브로 여성에 대한 폭력에 맞서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었다.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즉각적인 대처가 가능하도록 24시간 상담을 시작한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했고, 혼자 혹은 두 셋이 밤을 새면서 상담전화를 기다렸다. 기지촌 활동에 참여하기 위한 교육을 받았고 성폭력 재판이 있는 날에는 참관을 하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여성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성폭력상담소 활동가가 되었다. 피해자를 상담하고, 원한다면 법적인 절차를 밟을 수 있도록 도왔다. 내용증명을 보내거나 (바쁘고 비싼 변호사를 대신하여) 고소장을 작성하는 일을 맡았다. 본격적인 소송하는 여자의 길로 들어선 것은 이때부터지만 출산으로 인한 경력단절로 직업적인 소송하는 여자의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비록 직업적인 생활은 짧았지만, 법과 소송절차에 대한 이해는 쓸데없이 바른 말하기로 미움받아온 어린 시절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대체로 불안하고, 가끔 괜한 정의감에 치받곤 하는 엄마가 통장 일을 보고 있었을 때였다. 비록 작은 자리라도 돈과 이권이 관련되면 모함과 음모가 따르기 마련인가보다. 아파트 통장 일에 무슨 대단한 이권이 걸려있는지는 모르지만, 엄마가 통장 일을 하다 모함에 빠져 음해를 당하고 있었다. 엄마는 평소에도 불안수준이 높은 편인데 화까지 나면, 정말 억울해서 거의 아무 말도 못하는 편이었다. 무슨 일인지 너는 신경 쓰지 말라면서 울며 싸우고 다니는 엄마를 더는 볼 수가 없어, 가만히 앉혀놓고(?) 자초지종을 들었다. 엄마의 이야기는 사실과 짐작과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심지어 딸이 들어도 뭔가 수상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차분하게 딸이 엄마를 충분히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시키고 사실관계 파악에 들어갔다. 그리고 소송하는 여자의 경험을 발휘하여 내용증명서를 쓰기 시작했다. 조용히, 봉투에 갇혀 고작 우체국과 상대방만 읽을 수 있는 내용증명서는 이 정도 사태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명확한 사실관계에 대한 기술, 그리고 앞으로 계속 음해하고 다닐 경우 밟을 법적절차에 대한 경고가 담긴 내용증명서는 크게 확대 복사되어 아파트 엘리베이터마다 붙여졌다. 효과는 단박에 나타났다. 상대편은 엘리베이터마다 다니며 붙여진 종이를 떼기 바빴고 더 이상의 음해는 없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다니는 대학을 그깟 알량한대학교라고 폄훼당하며 엄마에게 줄곧 인정받지 못했었는데, 그 사건 이후 더는 인정투쟁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바른 말이 먹히는 낯선 상황이 시작되었다

    

   나의 첫 공적 발화는 그저 욕망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했다. 남학생과 짝이 되고 싶다는 작고 사소한 욕망은 말 없는 행위로 무시되었다. 그러나 그 첫 시작을 시작한 이후로 혼자만 아는 바른 말은 별무소용이라는 것을 깨달아갔고,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불의한 상황에서 맞서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여성이 이렇게 살게 된 역사를 알아야 했고, 여성학을 통해, 여성운동을 통해 맞설 수 있는 새로운 말을 배울 수 있었다. 또한, 새로운 말은 새로운 관계를 열어주었다. 비록 여느 엄마와 딸처럼 갑자기 살갑게 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다르게 말하는(행위하는) 딸로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새로운 말이 열어준 새로운 길은 결코 비단길은 아니었다. 상담소에서 자원봉사 할 때 누군가 (약간 자조 섞인 목소리로) 우리는 뇌에 (페미니즘이라는)칩이 들어 있어서 절대 다른 사람과 같아질 수 없다고 하였다. 다르게 산다는 것이 결국 다르게 감각하는 것임을 깨달을 때마다 이 말이 같이 떠오른다. 이미 사태를 다르게 감각하므로 다르게 살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불러서 된 새로운 정체성, 소송하는 여자, 소송하는 행위를 통해 드러난 는 누구인가에 대해 스스로 답해보자면 어긋내면서 다르게 살고자 하는 주체라고 말하고 싶다.

 

말 없는 행위는, 행위하는 주체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행위가 아니다. 행위자는 그가 동시에 말의 화자일 경우에만 행위자 일 수 있다. 그가 시작하는 행위는 말로 인간에게 이해된다. 그의 행위가 말이 없는 짐승과 같은 몸짓으로 지각될 수 있다 해도, 그가 행위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얻을 수 있는 말을 통해서만, 즉 현재 행하고 이전에 행했고 장차 의도하는 것을 알려주는 말을 통해서만 행위는 적절한 것이 된다.(아렌트, 같은 책, p.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