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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들의 요청 -실가온



 1. 자궁 밖으로

허블의 관측을 통해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며 우주는 상상할 수 없는 에너지의 밀도를 지닌 아주 작은 특이점에서 시작되었다는 빅뱅이론이 우주 탄생의 과학적 이론으로 정립되었다. 빅뱅 이후 수소와 헬륨이 우주 공간을 떠다니다가 중력의 힘으로 합쳐졌고 수억 년에 걸쳐 별들이 탄생하게 된다. ‘없음에서 있음으로 이 세계는 이동을 해온 것이다. 어릴 적 의 기원을 따져 올라가다가 증조할아버지를 기점으로 모든 조상이 그냥 할아버지로 통칭될 때부터 는 인식의 불가능에 포위당한 채 그 짓을 그만두곤 했다. 하릴없이 공상에 빠지곤 하며 던졌던 질문은 이것이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이전으로 끝없이 소급해 간다면 인간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하는.  그러나 기원에 대한 호기심은 최초의 생명에 대한 생물학적인 보편적 이론으로 충족될 수 없었다. 오히려  그 질문에 대한  실마리는 형이상학적인 영역에 있었다. 차라리 있음없음과 대비되는 개념이 아니라 없음의 필연적인 토대 위에 생성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 인간은 미지의 존재들 간의  우연한 만남, 생식세포 간의 작용, 생명의 탄생, 그리고 자궁밖으로 던져지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이후부터 전개되는 인간 존재의 운명같은 것. 

 

 2. 상상계의 유령

라캉에 따르면 인간은 상상계를 거쳐 상징계를 통과하며 주체를 형성해 나간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인간은 상상계로 퇴행하여 거울보기를 하루의 낙으로 삼거나, 상징계가 만든 주체에 갇혀 평생을 살기도 한다. 땅콩을 못 먹었다고 이륙 직전의 비행기를 회항시키기도 하고, 국가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 어릴 적 대타자와 평생을 대결하며 살기도 한다. 이렇게 상상계에 머물거나 상징계에 갇힌 존재를 유령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울한 때였던 이십 대 때 가끔 나타났던 증상은 약속을 파기하는 것이었다. 약속 전에 못 나가는 사정을 문자나 전화로 알리는 것은 매우 점잖은 짓이었고, 약속을 까먹거나, 약속 시간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나가지 않은 적도 있었다. 얼마 전 조카와 온라인으로 수업을 하기로 한 시간에 조카가 나타나지 않아 문자를 남겼다. 문자를 남기며 이 아이가 답장을 안 주면 어떡하나 불안했는데 그 불안의 정체는 과거 내게 들러붙어 있던 유령의 모습 때문이었다. 조카가 나타나지 않은 자리, 그 부재의 자리에 허무를 양식으로 살아가는 유령이 나타난 것이다. 주체적으로 궤도를 옮길 수 있는 자가 아니라 궤도 없이 부유하는 존재. 구심력과 원심력의 균형을 잃고 미세한 것들과의 충돌에도 온 세계를 한 방에 부정해버리는 존재. 그를 유령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문학은 궤도를 잃고 떠도는 유령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거래보다는 약속이, 큰 재난보다는 작은 오해가, 정오의 혼인보다는 하오의 불륜이 종종 문학적 상상력의 좋은 소재가 되었을 터다.” 1) 유령들은 언어를 획득하여 상징계에 안착하기도 한다. 소위 미래파2)라고 불리는 시인집단이 그들이다. 일단 활자화되어 출판된 언어는 그 무리(無理)’의 글쓰기에도 불구하고 영역을 확보하게 되었다. ‘없음에서 있음으로 향하는 인간의 여정에서 탈서정, 탈관습은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외의 존재들이 이탈하여 향한 곳은 어디인가? 새로운 영역을 창조하고, 사회의 한구석에 안착한(그것은 가능한가?) 자들도 있지만, 다수의 이탈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죽음에 대한 균형을 이루지 못한 채 삶에 이끌려 죽음을 두려워하다 죽음을 살고, ‘없음의 세계, 카오스의 근원을 동경한 나머지 삶을 저당잡아 다시 또 죽음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도약을 향한 죽음이 아니다이것은 니체가 미라가 된 진리로 조소한 대상이다”3)  가끔 그들은 고향과 가족을 잃고 무력감을 되새김질하던 식민시대의 지식인과 자신의 정체성을 박제에서 발견한 천재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상징을 얻지 못하거나, 잃어버리고 떠도는 유령들의 모습을 우리는 문학작품 속에서 자주 만날 수 있다.

 

3. 상징계 속의 유령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가 유령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근대 사회로의 이행은 한 번에 많은 유령을 탄생시켰다. 동네에 한 사람씩 있었던 미친년과 바보들은 자본주의의 똬리 속에서 수용시설로 들어가며 일시에 유령이 된다. 동네에서 봄날 볕을 쬐며 구석에 박혀있다가 우르르 몰려온 아이들과 어느새 섞여 놀던 그들이 사라진 거리는 그들의 부재와 함께 매끈해져 간다. ‘없음에서 잉태된 존재들이 만든 있음의 세계에서 인식은 일당백 ,그 역할을 해내고, 이성과 합리의 빛은 있음의 세계를 더욱 정교하고 찬란하게 창조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상징과 기호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면서 또 유령이 된다. 요양원이라는 단어가 있기에 노년에는 요양원에 간다. 커피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스타벅스를 마신다. 남자와 여자라는 기호, 어른과 아이, 전라도와 경상도, 유럽과 아시아라는 기호에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복종한다. 또는 도덕과 제도의 압력 속에서 유령이 되기도 한다.

 

4. 유령의 얼굴과 바깥

이렇듯 유령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그 모습은 언제나 슬프다. 영화 다크나이트에서 고담시를 파괴하려고 했던 광기 어린 악당 조커의 얼굴은 무섭다기보다 처연하다. 상징계가 낳은 그의 얼굴에 서린 어둠의 깊이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재기발랄한 귀신조차도 슬픔의 아우라를 풍긴다. 그는 없지만 있고, 있지만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유령은 혼자 있을 때는 유령이 되지 않는다. 관계의 자장 속에서만 유령은 그 실체가 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니까 사람의 손을 탔다가 버려진 물건은 애초에 어떤 관계도 맺지 못한 채 존재해 온 물건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내가 경험한 유령의 모습은 많지만 요즘 가끔 떠오르는 이미지는 고등학교 때 아버지에게 차려드린 밥상이다. 어느 날 긴 시간 노동에 지쳐 돌아온 아버지에게 차려드린 밥상에는 무언가가 빠져있었다. 냉장고 속에서 마른 김치와 전날 끓여 먹고 남은 된장국, 구색을 맞추느라 만든 아버지가 좋아하지도 않은 감자볶음, 구운 김과 간장. 그 밥상을 받고 아버지는 안방으로 들어가 홀로 장기를 두셨다. 한참 뒤 방안에서 하모니카 소리가 들렸다. 안방 문이 열리는 소리로 아버지가 화장실에 가시는구나 생각했으나 그때 그 분은 아버지가 아닌 다른 누구였었다. 그리고 그렇게 아버지를 감각하고 있던 나도 가 아니였고, 내가 차린 밥상도 밥상이 아니였다.

 

이 지구상에는 숨쉬는 사람들의 수만큼 차원이 다른 세계가 존재할 것이다. 인간은 나의 세계 외에 어떤 세계가 있음을 감각하며, 우연한 순간 드디어 그 세계와 만나며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 더 큰 자아가 된다. 그러나 자아감으로 가득 차 있는 는 다른 세계의 부름을 받지 못한 채 유령이 되고, 타자의 세계 또한 공허하게 만든다. 

 

지식은 일종의 소외 현상일 뿐이므로 자아의 진정한 바깥이 될 수 없다”4)

 

지식과 인식의 힘으로 권력을 부리는 개인은 본인이 무엇을, 누구를 소외시키는지 알아채지 못한다. 과학의 힘으로 건설된 근대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이 유령이 되는 것은 운명이었다. 그러나 상상계와 상징계 사이, 혹은 그 너머에 실재하는 세계, 그 환상 속에서 인간은 희망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환상 속에 실재의 맹아가 움트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령을 없앨 수도 없고, 유령의 다른 모습을 상상할 수도 없다. 유령과 함께 살아가는 인간은 어떤 개입을 통해서만이 유령을 다르게 만날 수 있다. 유령과 공존하면서…….어쩌면 인간은 유령이고, 유령은 인간이다. 그 둘은 함께 살아가며 가끔 실재의 틈을 열어낼 수 있고, 찰나의 순간 그 틈을 통해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도 있다.

 

간간이 논급했지만, 그 누구라도 이 상호개입의 자리에 발본적 반성과 체감, 그리고 이에 따른 실천이 없이는 자신과 이웃의 삶을 갱신할 수 없다. 귀신(현상)조차 인간의 정신이라는 장구한 진화론적 이력의 변곡점/정화(精華)에 따른 상호 개입에 수반되는 현상인데 역시 그 본질은 유물도 유심도 아니다...개입의 깊이와 무게를 알아챌 때 윤리는 존재론적 의미를 띠며 인간의 책임은 되살아난다. 신생(新生)이란, 곧 새로운 책임에 다름이 아니다.” 5)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공간이 이런 틈의 세계일 수도 있다. 욕망을 찾아갈 수 있는 공간, 한 번의 실패로 물러서지 않는 공간, ‘인간만이 절망임을 더욱 처절히 느낄 수 있는 공간. 몸만으로는 알 수 없는 앎의 지평으로 나아가기 위해 인식의 무능함과 마주할 수 있는 공간. ‘가 사라진 순간, 무심히 한 자리에 존재해 왔던 컵도 제 얼굴을 드러낼 때가 있다. 근대사회를 이끈 과학은 없음에서 있음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없음의 토대 위에 있음을 건설했다. 빅뱅 이래로 우주가 팽창하듯 인간의 앎은 더욱 성장하고 있다. 앎은 미지에서 왔다. 빛이 어둠 속에서 오고, 내가 없음에서 나왔듯이. 그 텅 빈 곳에 누가 있다.



1) K 선생님,  『세속의 어긋남과 어긋냄의 인문학』, 

2) 평론가 신형철의 <미래파> 진단을 살펴보자. "엽기적인 시공간에는 법이 없다.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분별되지 않는다. 가학과 피학이 난무하고(...) 이 무법천지는 정서적으로 끔찍하다기보다는 이성적으로 불가해하다무법천지의 공간에서 주체들은 자유롭게 즐기는 것이 아닌그 자유로움에 짓눌려 신음하고 있기라도 하는 것인가. 그들의 시를 독특하게 만드는 요소는 정체 모를 상실감이다."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P205

3) K 선생님,  『진리, 일리, 무리 P186

4) K 선생님,   『동무론

5)  K 선생님, 동무론, 개입의 윤리와 신생의 묘미P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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