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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서는 산책길에 10개의 쓰레기가 있다면 8개만 줍는데, 도우면서 잡착하지 않고, 원망이 쌓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남을 돕는 것에도 에고가 개입되기 마련이니 '남을 도울 때는 깜냥껏, 원칙껏 하되, 집착이나 원망이 쌓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자기를 구제하고 이웃을 돕는 것이 공부길이라지만 잘못 돕는 것에서 원망이 생기며 '보상의 위기'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을 알아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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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지식은 항상 진보하며, 잘 축적된 지식으로, 문명의 진보가 이루어집니다. 반면에 깨친다는 것은 내용이 없는 것이기에 축적될 것이 없습니다. 특히나 당대 최고의 지식을 외면한 깨침은 사회적 실효마저 없어보입니다. 칼 세이건은 과학을 이해하느냐 못하느냐가 우리의 생존 여부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과학을 어떻게 참조하면서 쓸모있는 깨침이 가능할까요? 최고 지식인의 책을 통해 모든 영역의 탁월한 지식을 섭렵하면서 생활속의 수행을 행하며 방향을 잡고서 깨쳐야합니다. 이것이 장숙에서의 공부법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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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생각하지 않게 되었을 때 생겨나는 가능성'
<선생님 책, 차마 깨칠 뻔 하였다>
가창오리떼는 몸의 유기적인 통합으로 군무를 만들어냅니다. 잡념 혹은 욕망 즉, 에고가 없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에고를 지닌 탓에 서로 어긋나며 마찰을 일으킬 뿐 그런 군무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나를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에고의 첨병인 잡념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인데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닌 생각이 오게 하는(하이데거) 그 지점으로 나아가 보자는 것입니다. 생각을 비우고 몸에 오롯이 맡길 때 새롭게 올라오는 그것은 어떤 가능성을 지닌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