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소의 가짐’과 돕기의 윤리 >
未散
우리가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면 나머지는 모두 부차적인 것이다.
-Anne Frank1)
퇴근길에 동네의 한 작은 빵집을 지날 때면 늘 그곳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하다 다시 집으로 향하곤 한다. 가게의 외관이 다른 곳과는 다르게 눈에 띄거나 독특한 메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곳에 갈 때마다 조금은 특별한 것이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사물이 놓인 자리
문을 열고 들어서면 이른 아침부터 정성껏 만들어졌을 빵들이 대부분 자리를 비우고 바게트나 스콘 몇 종류만이 남아 있긴 하지만, 차분하고 정돈된 실내에서 가지런히 자리를 잡고 놓여있는 빵들은 ‘그저 빵 한 조각’이라고 하기에는 무색하게 제각각 어떤 종류의 빛을 내고 있다. 멋스럽게 적힌 필기체의 이름 덕분인 것도 있겠지만 이름을 얻은 사물들은 은은한 조명과 함께 단정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
혼자서 꾸리는 작은 살림이지만 돌아서면 금방 치울 것이 생기고, 치우지 않으면 계속해서 내 의도와는 어긋나게 눈덩이처럼 불어 버리는 안타까운 흔적들은 생활의 자리를 시험하는 표식처럼 끊임없이 어떤 신호를 보낸다. 사물들이 제자리에서 자리를 잘 찾은 모습으로 보인다는 것은 그 생활의 자리를 매일 가꾸고 돌본다는 것이다. 그런 분위기를 늘상 유지한다는 것은 가끔씩 하는 대청소가 아니라, 일상의 정성과 돌봄이 계속 된다는 메시지이다.
장소의 가짐과 소유
그런 의미에서 한 장소를 만들어가는 개인이 그 장소에서 펼치는 행위의 중요성은 단순히 그 장소의 ‘소유자’가 된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더욱이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소유(所有)의 개념조차 오늘날 현대인들이 이해하는 것처럼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사적인 부를 점유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특정 부분에서 자신의 자리를 가지고, 그렇게 함으로써 정치적 조직체에 소속되는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과정에서 ‘소유는 점차 구체적 공간과 장소의 성격을 상실하고 자의적으로 점유, 처분, 양도할 수 있는 동산의 성격으로 변질되었다.’2)
아렌트가 말한 소유의 본래 개념은 물론 공적이고 정치적인 활동의 조건이 되는 장소로서의 가짐이었다. 하지만 ‘장소의 가짐’이라는 소유의 개념을 좀 더 확장해본다면, 한 공간에 머무르는 개인이 자신의 자리에서 일련의 정성과 관심을 통해 ‘공간에 대한 정서적 개입으로서의 장소’3)를 만들어가는 총체적인 노동 혹은 행위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한 숙인과의 대화 중 오래된 건물을 허물고 다시 짓는 것이 내부를 전체적으로 수리하고 고치는 비용보다 오히려 적게 든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건물을 다시 짓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지만 빠르게 짓고 처분해 버리는 것에 비해 시간성을 두고 만들어가는 장소감과, 그 안에서 사람과 사물들을 어떻게 응대하고 대접해야 하는지에 관한 윤리는 점점 빈곤해지고 부재하는 듯하다.
신뢰, 돕기의 이력
사실 이 장소에서 내가 만난 가장 뜻밖의 순간들은 빵을 구입하고 사기 위해 나누는 짧은 대화의 순간에 응하는 가게 주인의 ‘말’이었다. 여타의 가게에서 종종 느끼곤 했던 과한 친절이나 혹은 그 반대로 다가오는 무성의함이 아닌, 오롯이 작은 요청에도 잘 응하는 그녀의 태도에서 어떤 신뢰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단 한 번의 경험이라도 오랜 여운으로 남을 수 있겠지만 여러 번의 방문으로 반복이 되어 얻은 인상은, 들어오는 손님을 도울 준비가 돼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미 돕고 있는’사람이라는 것이었다.
한 장소가 깊고 고요하게 만들어져가는 풍경 뒤에는 보이지 않는 손길과 노동이, 무엇보다 돕기의 이력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장소의 본령은 결국은 사람’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은 한 사람의 정신이 가닿을 수 있는 진경을 보여준다. 여기서 내가 해야 할 질문은 내가 개입하고 있는 자리에서 깜냥껏 실력을 키워 돕고 있는가? 라는 것인데, 변덕이나 고백 보다 빠르게 ‘말없이 도울 수’4)있다면, 그런 몸을 만들어가는 생활을 일러 ‘돕기의 윤리’라고 이름을 붙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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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옆방의 부처>, 55쪽 시 『도울 수 있어요 나는』
2)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47쪽
3) <집중과 영혼>, 974쪽
4) <옆방의 부처>, 55쪽 시 『도울 수 있어요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