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암 강독>이 열리고 있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쉬지 않고, 5주에 한 번 모입니다. 지난 강독 모임에는 회원 여일, 숙비랑, 나:무, 는길, 연이정, 사이 그리고 청강자 재랑이 참석하였습니다.
선생님 댁 차방에서 낮게 존재하는 사물들과 어울려 ‘영원한 자기소개’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독서하며 쟁여온 질문을 선생님께 드립니다. 새 말을 붙잡고 담아두기 위하여 손은 민활하게 움직이고 노트는 빽빽해졌습니다. 그렇게 기록된 언어는 어떤 운명(몸)을 얻고 있을까요. 간절하였고 그래서 바삐 筆記하였던 활자를 살아(려)내는 노동은 여전히 기록한 자의 몫으로 남아 있습니다.
“실은 그게 내겐 가장 놀라운 사실이었다. 은폐된 상처의 만연(蔓延)에도, 그 어떤 상처도 공부를 위해서, 공부를 통해서, 공부를 향해서 생성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차마, 깨칠 뻔하였다』, 늘봄, 2018, 264쪽.)
‘상처의 절망’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상처’와 ‘어리석음’은 근친한 관계에 있는 것만 같습니다.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상처는 드물고 어리석음이 된 상처는 흔합니다. 그러나 좁은 길에 주목하여 보면, 분명 어떤 이들은 상처의 중력을 견디며 오히려 그 어둠 속에서 자신을 ‘깊게-갈무리’함으로 정화의 길을 내기도 하는데, 신비주의적 영성가인 이블린 언더힐(Evelyn Underhill)은 이런 구간을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 하였습니다. 드리워진 어둠조차 어떤 길의 방편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듯합니다. 모든 수행자와 영성가 그리고 수행적 공부에서 비슷한 과정과 형식이 발견된다고 배웠으니, 긴 공부 길에서 마치 ‘상처’나 '어둠'이 맡은 역할이 있어 보입니다. 상처는 일종의 내몰림과 같아서 욕망을 정화하고 의욕을 벼리는 진짜배기의 시간에 도달하게도 하고, 실재를 견디지 못하고 ‘현세 적응’의 차원으로 퇴행하게도 합니다. 이렇듯 위기이며 기회인 시간(성)과 버성기며 어떤 진실이 생성되겠지요.
그날 선생님께서는 ‘우리의 상처가 얼마나 사소한가’를 지적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상처가 어디로부터 생겨나는지요. 과연 ‘공부’로부터 생겨난 상처였는지. 돌아 보건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공부의 상처는 외려 사소하게 배치되고 보상의 굴레나 신경증의 구조, 욕망의 체계 혹은 체계의 욕망으로부터 생긴 상처는 환착(幻着) 되고 있었습니다. 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를 근심하며 변화가 생길 때까지 계속해서 걸어 나갈 뿐입니다. 공부를 신뢰하며 저도 모르게 되풀이하는 상처를 대면하고, 상처 보다 낮게 걷는 걸음을 익히는 과정 속에 있습니다.
<공부로부터 생겨난 상처>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그(녀)의 공부가 진실하였고 마침내 공부가 그(녀)의 존재 방식이 되어서야 공부의 상처가 생겨납니다. 비로소 ‘학생’이 됩니다. 공부를 향하여 상처입고 공부를 통하여 상처 보다 커진 이, 생활 곳곳 무의식 곳곳까지 ‘학생’이 될 수 있을까요.
필기해 놓은 물음 앞에 다시 섭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거짓인가. 우리의 상처가 얼마나 사소한가.’
[동암 강독 소식]
* 5月 동암 강독은 24일(금)에 열리며, 6月 모임은 28일(금)입니다.
** 청강자였던 재랑이 입회 절차를 거쳐서 동암 강독 회원이 되었습니다.
*** 다음 모임부터 동암 강독은 대구시 수성구로 이동합니다. 회원 ‘사이’의 집에서 오후 3시~7시까지 4시간을 어울려 공부합니다.
**** 교재는 『차마, 깨칠 뻔하였다』입니다. 다음 모임 진도는 7장(‘복종과 의무...’)입니다.
다시 상기 시켜주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