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어떤 질문들은 듣는 것만으로도 불편해진다. 질문은 질문자의 입장과 관점을 내포하고 있어 그 안에 이미 특정한 형태의 답이 전제되어 있다.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p.16> 그럴 때 질문에 자신의 입장과 관점이 이미 내포된 줄 모르는 질문자의 순수한 의도와는 상관없이 불편한 마음을 숨기기 어렵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 관한 질문이 나에겐 그런 질문 중 하나이다. 남성과 여성의 정체성이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자꾸 묻는 것일까? 정체성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맥락 속에서 구성된다. 모든 정체성은 차이를 가로질러 형성된다. <정희진, 앞의 책, p.17>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 관해 묻는 사람들은 정체성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들은 SEX와 GENDER의 구분에 관해 모른 체하면서 끊임없이 체력을 부권제의 기원으로 보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우월한 체력이 정치적 관계의 요인은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는 인종과 계급의 정치적 관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문명은 항상 체력 대신에 다른 방법(기술, 무기,지식)을 사용해 왔으며 현대 문명은 이 이상 더 체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는 체력의 강약을 불문하고 계급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힘든 일을 한다 <케이트 밀레트, 성의 정치학, p.56>는 사실들을 묵과한 채 남성와 여성의 차이에 관해 이처럼 순수하게 질문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올까?
세상의 지식이 모두 평등한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다. 어떤 지식은 아는 것이 힘이지만, 어떤 지식은 모르는 게 약이다. 두 경우 모두 지식이 특정한 사회의 가치체계에 따라 위계화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정희진, 앞의 책, p.11> 남성와 여성의 차이에 대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여기며 여성, 여성주의에 무지한 것을 당당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남성들도 모두 동질한 남성이 아니며 여성들 역시, 계급, 인종 등 여러 면에서 동질한 여성이 아니다. 그러한 남성들 간의 차이와 여성들 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남성과 여성 간의 차이를 주요한 차이로 여기는 것은 여성을 여성으로 환원하려는 시도이다. 왜냐하면 대체로 남성들은 개인 혹은 인간으로 간주되지만 여성은 여성으로 여겨진다. 남성과 여성간에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 간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여성주의가 하고자 하는 방향이다. 여성을 여성으로 환원하는 것이 가부장제이기 때문이다.<정희진, 앞의 책, p.18> 따라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계속 묻는 것은 여성을 타자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입장을 드러낸 것이고, 타자를(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폭력을 드러낸 그(대체로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남자다!) 앞에서 나는 불편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남자다운 게이, 가죽 옷을 입은 여왕, 데님옷을 입은 열광족 들---이들은 이성애적 남성성에 단지 아이러니컬하게 대응하는 것 이상이다. 이들은 남성성의 붕괴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며, 동시에 기존의 팔루스적 권력이 거부하는 것들, 즉 현대 사회에서는 성적 정체성을 포함한 자기정체성이 성찰적으로 성취된다는 사실을 오히려 긍정하고 받아들인다. 앤소니 기든스<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224
* 팔루스는 자율성의 기표로서 여성들의 자기통합감(sense of self-integrity)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팔루스가 페니스로 전환되는 것은 여성들에게 고통스러운 함의를 갖는다. 앤소니 기든스<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232~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