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형식과 이유로 막대한 교환을 행하는 사회가 있습니다. 대항과 경쟁에 기초해서 평화를 만들고 어울려 살아가는 방식을 터득한 사회. 그들은 비타산적이며 의무적인 형태로 교환했고 끊임없는 주고받기의 순환 구조 속에 구속되었습니다. 물건과 소유자, 죽은 자와 산 자, 증여한 사람과 받은 사람, 추장과 개인의 운명이 혼동되어 얽히고 얽힌 사회. 그리고 무엇보다 주술과 종교적 환상이 주고받기의 형식을 규제했던 사회 (『증여론』, 마르셀 모스, 이상률 옮김, 한길사, 2002, 129쪽).
부족 집단의 주고받기를 곧장 ‘개인’에게 대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말했듯이 그들의 문화는 집단적이고 주술적이며 종교성이 강해서 거기에서 개인은 보호받을 수 없습니다. 또 우리도 나름의 성취로서 ‘선물’과 ‘감사’의 불가능성을 사유해냈고 서로에게 조심하고 타협하고 대화하는 기술도 익혔습니다. 주고받기의 허무와 무능을 감내하면서 성숙의 기회를 얻기도 했고요. 그쪽에서는 부족의 대표가 부족을 이끌고 집단 밖으로 나아갔다면, 이쪽에서는 개인의 사유가 집단을 뚫고 경계로 나아갔으며 혼동하였던 것들을 분별하고 구별하고 개념화하면서 보다 인간만의 문화와 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하지만 빛과 그림자가 짙어진 곳에서는, 되돌아 온 과거를 영접하는 방식을 통해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우리와 다른 주고받기의 길로 걸어 나아갔던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가 잃어버리고 놓고 온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 볼 수 있겠습니다.
얼마 전 스승의 날 제 아이는 담임으로부터 선물을 준비하지 말라는 당부와 편지도 쓰지 말며, 정 쓰고 싶으면 내년에 쓰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조금 과도한 주의로 느껴졌습니다. ‘김영란 법’과 같은 제도의 효과를 인정하지만 이 제도가 부패 이외의 다른 기회도 봉쇄하고 차단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서로가 누구인지를 살피고 고마움을 기억하고 적절하게 주고받는 관계의 노동을 배울 기회까지 차단하고 있는 듯 보였던 것입니다. 적절한 관계를 맺어가는 지혜와 노동보다, 선을 긋고 거리감을 확보하는 쪽, 얽매이지 않으려는 쪽으로의 방어벽이 전수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었습니다.
<증여론>의 추장들은 이런 사안에서 우리와 다르게 보입니다. 일단 그들은 과감합니다. 저돌적으로 다른 집단을 향하여 나아가는데, 자신과 부족을 지키는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노골적으로 선물하며 타협하고, 또 답례합니다. 만나지 않고 답례하지 않는 것은 열등을 자인하는 것으로, 이 이치에 순복하는 듯. 주고받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겁니다. 마치 운명처럼, 죽을 때까지 주고받기의 순환에 구속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조심’을 배운 후라면, 조금은 저돌적으로, 조금은 과감성을 발휘해서 관계를 개척할 수 있고, 또 그런 탄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끊임없는 주고받기의 현장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을 통해서 잠시 태고의 야생성이 이동을 매개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한편, 그들은 파괴하고 탕진하고 낭비하는 극적인 주고받기의 행위로써 집단 안팎에서 자신을 증명하고 명예를 세워나가는데, 우리는 어떻게 주고받기의 현장에서 명예를 세워가고 있는지 자문해보는 것도 중요해 보입니다. 명예를 팔고 여타의 계산에 조급할 수 있는 ‘소비자’의 태도가 쉬 전염되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비와 피로와 거울과 화폐가 아직 출현하지 않았던, 증여(贈與)의 사회. 사전은 ‘증여’를, 재산을 무상(無償)으로 타인에게 물려주는 행위라고 정의합니다. 어떻게 인간은 ‘무상’을 기획하게 되었을까요,
“물건이 주어지고 이에 답례하는 것은 바로 ‘존경’-우리는 이것을 아직도 ‘예의’라고 부르고 있다-을 서로 주고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뿐만 아니라, 물건을 주면서 그 자신을 주는데,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 자신-그 자신과 그의 재산-이 다른 삶들의 ‘은혜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증여론』, 마르셀 모스, 이상률 옮김, 한길사, 2002, 192쪽)
보다 자연이었고 자연과 가까웠던 이들은, 홀로 존재 할 수 없다는 인간의 조건을 더 절실하게 체감했던 것일까요. 인간은 어느 동물보다 가장 무력한 상태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절대적으로 보살핌을 받는 시간을 딛고 비로소 사람이 되는데, 이것은 어제나 그제나 누구나의 조건이지요. ‘증여’의 시작에 대하여 아는 바는 없습니다. 다만 그 행위가 누군가에게 무상으로 받지 않고서는 차마 존재 할 수 없었다는 자각에 조금은 기대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존재의 불안정과 연루해서. 다른 삶들의 은혜를 입고 있다는 자각에서. 다른 삶들에 대한 존경에서 비롯되는 어떠한 행위들.
돌아보면 우리의 주변에는 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았다며 오래 고마워하는 이들이 있고, 더 주지 못해서 미안해하는 얼굴들, 좋은 것을 주고 싶어서 머뭇거리는 몸짓이 있습니다. 서로 빚졌다고 말하고, 줄 수 있는 게 있어서 다행이라는 말도 듣곤 합니다. ‘합리’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주고받기가 있다는 것이지요. 먼 길을 걸어서 다시 찾아 온 손님을 대하듯, 이 사실을 인정하고 잘 대접하면서 열리는 인간의 길이 있을 듯합니다.
“오래전 내 마음의 바닥에서 건져 올린 게 ‘존재에 대한 미안함’이랄만한 정서의 꼬투리인데, 언제 보아도 마치 물살에 끄들리는 신해어의 신세와 같다. 이른바 측은지심과도 겹치겠으나, 특히 (내)존재의 불안정(ontological precariousness)과 연루한다는 점에서는 다르다. 일본어의 ‘아리가또우(有り難う)’는 자구로만 새기면 ‘존재하기 어렵다’라는 뜻이 되기도 하는데, 이게 ‘고맙다’라는 뜻으로 안착한 게 또 흥미롭다. 그렇게 생각하면 고맙다와 미안하다는, 결국 다른 표정의 같은 얼굴일 듯하다.” (『차마, 깨칠뻔하였다』, 늘봄, 2018, 44쪽)
오래전 어떤 자식이 부모에게 진 빚을 근심하고 있을 때 이런 말을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부모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지 않아도 된다. 네가 아기였을 때 너는 부모에게 모든 기쁨을 다 주었다"
이 말에 무거워지는 마음을 흘려보내곤 했습니다. 그러나 불가능이 가능했던 시절은 어느새 지나가 버리고
눈을 꽉 감고 받은 것을 모른 척하며 지내곤 했습니다.
"태고의 야생성이 이동을 매개할 수 있다는 상상"
습관처럼 회의에 젖고, 습관처럼 어긋내고, 어긋납니다. 되잡히고 마는 시간을 사는 현대인이 실천하기에 아득히 멀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 야생성을 회복하기 위해, 사람들은 산에 오르고, 집 앞, 손바닥 만한 화단에 꽃을 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구심력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