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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여백(餘白) 1
-J의 訃告

 


“이 영화(파이란) 속에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어눌한 부재 속에서 피어오른다. (…) 당신이, ‘이런식으로’ 사_랑_이_있_다, 고 주장한다면, 나 역시 내 요란한 철학을 잠시 접어두고라도 기꺼이 묵수하리라.”( k님, 사랑 그 환상의 물매)


 
시란(是鸞). ‘귀한 소식을 알리는 기별(방울소리)’이라는 뜻을 지닌 새 이름을 얻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이름을 준 H에게 세 사람의 부고(訃告)를 전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내 첫 직장 상사 J였습니다. J는 간밤 들이닥친 화마(火魔)에 불귀(不歸)의 객이 되고 말았는데, 그 비극은 ‘폭염 속 에어컨 발화’라는 시사성 탓에 ‘OO동 아파트 화재…50대 여성 사망’라는 제목의 뉴스로 활자화되어야 했습니다.
 

J는 주2회 발행되는 의학전문지의 편집국장이었습니다. 위로 스무 살 넘게 차이가 지는 애인을 둔 독신녀 J는 잘 웃지 않았고 늘 회색 슈트 차림이었으며, 미숙한 신입의 출근복장을 지적할 때에나 한 달에 한두 번 꼭 지각을 하고 마는 신입에게 눈길을 흘릴 때에도 늘 한결같이 무심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딱 한번 신입이 쓴 기사에 대해 칭찬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그는 여전히 무심-하였습니다. 신입은 이후 2년을 못 채우고 더 나은 조건의 직장을 구해 그곳을 떠났고, J는 퇴락해가는 타블로이드 신문사에 남아 20여 년간 데스크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사실 H와 J는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이입니다. 나름의 인물평을 궁리하며 한두 번 H와의 대화 자리에 J를 호출한 것이 전부인데, J의 용모는 어딘지 박근혜 씨를 떠올리게 했고, 그 둘이 모이니 어느새 소설가 서영은 씨까지 곁붙어 나는 이 세 사람의 닮음(다름)에서 어떤 비밀을 염출해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마다의 벡터는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어떤 일관성을 얼굴에, 몸에 새기고 있었습니다. 각별한 인정을 나눈 사이도 아니었고, 특별히 호감을 가질 만한 구석을 지닌 것도 아니었던 J. 그곳을 떠나온 후 나는 J와 단 한 번 우연히도 마주친 적이 없었지만, J는 그렇게 이따금 내 말이 있는 자리에 다녀가곤 했습니다.


부고를 전해 듣던 날. J 역시 그곳(안정된 직장이 아니었던!)을 거쳐 간 수많은 신입 중에 하나였을 나를 기억하고 있었고, 몇 달 전 그가 나의 안부를 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함께한 기간은 길지 않지만 업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어서 뿌듯하다. 풋풋한 모습만 어렴풋한데 언제 한번 만나고 싶다”는 늦은 전언이었습니다.


노회찬 씨와 소설가 최인훈 씨 두 분을 위해 초를 켜고 애도하겠다던 H는 잊었다는 듯 한마디 덧붙입니다. “시란! 쑥고개 성당에 가서 세 개의 초를 켜겠어. J를 위한 초도 하나 더!” 나는 여전히 내 말의 자리에서 J와 재회합니다. 그리고 J와 나 사이에는 언제나 H가, 매개로서, 그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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