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Dominic Crossan, <The Historica Jesus, The Life of a Mediterranean Jewish Peasant>(1991)
1. "(예수의) 황홀한 비전과 사회적 프로그램은 사회를 그 풀뿌리에서부터 위를 향하여 재건하려 했는데, 이것은 종교적 및 경제적 평등주의의 원칙에 기초한 것으로서, 농부들의 집에서 직접 공짜로 치유하고, 그들이 내어놓은 것을 공짜로 나누는 원칙이었다. 이처럼 의도적으로 주술과 음식, 기적과 식사를 연결시키고, 무상의 자비와 누구나 참석할 수 있는 개방된 공동식사를 결합시킨 것은, 유대교의 엄격한 정결 규정에 대한 도전일 뿐 아니라, 지중해 지역의 가부장적 결합, 즉, 영예와 수치, 후견인과 의뢰인 사이의 연결에 대한 도전이며, 문명의 영원한 성향, 즉 경계선을 긋고 위계질서를 만들고 차별을 유지하려는 문명의 영원한 성향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것은 정치적 혁명을 초래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상상력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사회적 혁명을 그리고 있었다."
2. "예수의 죽음은 그가 죽기 직전 며칠 동안과 연결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생애 전체와 연결시켜 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예수가, 아마도 처음이자 유일하게, 성전의 화려함에 맞서서 그 합법적 브로커 기능을 '브로커 없는 하느님 나라(unbrokered kingdom of God)'의 이름으로 상징적으로 파괴하였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행동이 만일 제국적 억업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유대인들의 유월적 축제 기간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벌어졌다면, 종교정치적 합의에 의해 십자가형에 처하기에는 충분하였을 것이다. 예수처럼 아무것도 아닌 한 사람(nobody)의 농부가 어떤 잔인함과 모욕, 무관심의 대상이 되었는지를 상상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로서는 불가능하다."
3. "또한 2세기 초엽의 한 로마 역사가는 '크리스찬이라는 이름의 창시자인 그리스도(Christus)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재임 시기(14~37)에, 총독 본디오 빌라도의 선고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으며, 이 악독한 미신이 잠시 주춤했지만, 다시 그 질병의 본거지인 유대에서 뿐만이 아니라, 수도(로마)에서도 발흥하였는데, 그곳은 세상의 모든 끔찍하고 부끄러운 것들이 모여들어 유행하는 곳이다'라고 기록했다. 예수 자신의 추종자들이 처음에는 십자가형의 위험과 공포로 인해 도망쳤다가, 마침내는 계속적인 사랑이나 미신의 전파만이 아니라 부활을 말하기 시작했다."
4. "실제의 예수를 찾으려는 것은 원자물리학에서 초현미경적인 입자의 위치를 찾아 그 전하(電荷)를 결정하는 것과 같다. 그 입자는 직접 볼 수 없으며, 사진판 위에서 그것을 움직이게 만드는 더욱 큰 입자들의 궤적들이 남긴 선들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주지하는 바와 같이 역사는 물리학보다 더욱 복잡하다. 그 기원이 되는 인물과 그로부터 발전된 전설 사이에 연결된 선들을 수학적 정확성을 가지고 추적할 수는 없다."
5. "현재의 문제점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하나의 사례만으로 충분하다. 다니엘 해링톤이 1986년 8월 6일에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카톨릭 성서연구회>의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행한 연설은...최근에 학자들이 제안한 예수에 관한 일곱 가지 서로 다른 상(像)을 간단히 묘사하고 있는데, 그 차이는 역사적 예수상을 자리매김한 서로 다른 유대적 배경과 관련되어 있다. 즉 정치적 혁명가로서의 예수(S.G.F. Brandon, 1967), 주술사로서의 예수(Morton Smith, 1978), 갈릴리의 카리스마적 인물로서의 예수(Geza Vermes, 1981, 1984), 갈릴리의 랍비로서의 예수(bruce Chilton, 1984), 힐렐 학파 혹은 최초의 바리새파로서의 예수(Harvey Falk, 1985), 에세네파 예수(Harvey Falk, 1985), 그리고 종말론적 예언자로서의 예수(E.P. Sanders, 1985) 등이 그것이다. 이런 목록의 모든 저술이 똑같이 설득력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이처럼 여러 예수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문제를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6. "예수가 하느님의 나라를 임박한 미래의 묵시종말론적 사건으로가 아니라, 현재의 한 생활양식으로 말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그 도전은 사회적 프로그램이라기보다는 시적인 비전인 것으로 보인다."
7. "내가 여기서 주장하려는 것은 주술과 종교의 관계는 의적(義賊)과 정치의 관계와 같다는 사실이다. 즉 의적이 정치권력의 궁극적 합법성에 도전하는 것처럼, 주술은 영적인 권력에 도전한다...종교는 공식적이며 승인된 주술인 반면에, 주술은 비공식적이며 승인받지 않은 종교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종교를 갖고 있지만 그들은 주술을 갖고 있다.' 문제는 주술사가 공식적인 종교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주술사들의 존재 자체는 그러한 의도와는 상관없이, 공식적 종교의 타당성과 배타성에 대한 도전이다...엘리야와 엘리사, 호니와 하니나는 주술사였으며, 나자렛 예수 역시 주술사였다. 기독교 신학자들이 예수를 주술사(magician)라기보다는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miracle worker)이라고 묘사하고, 이 둘 사이의 질적 차이점을 고려하려고 시도하는 것을 지켜보면 한없이 재미있다. 이런 주장의 편향성에는 종교와 그 기적들을 주술과 그 효과로부터 보호햐려는 이데올로기적 필요성이 있다."
8. "그러므로 예수의 귀신축출을 논의함에 있어서, 두 가지 요인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하나는 식민지 백성들의 거의 정신분열적 상태이다. 만일 그들이 기꺼이 식민지 통치에 복종한다면, 그들은 자신의 파멸에 협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식민지 통치를 증오하고 경멸한다면 그들은 자신들보다 더욱 강력한 힘, 그래서 어느 정도는 바람직한 힘이 가증스러운것이며 비루한 것임을 인정한다. 그것이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염두에 두어야 할 또 다른 하나는 식민지에서의 귀신축출이 즉각적으로는 혁명보다 못한 것이지만 결국에는 혁명보다 더한 것이며, 그런 귀신축출이 실제로는 개인화된 상징적 혁명이라는 것이다."
9, "나는 예수가 스스로 지위가 높여진 칭호들(exalted titles), 즉 기독교 전통에서 그에대해 알고 잇는 고양된 칭호들 가운데 어느 것을 사용하여 자신을 선포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톰 라이트(N.T. Wright)가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가 자신을 메시아라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지만, 그러나 나는 그런 주장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는다. 만일 메시아라는 말이 자신이 하느님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은 살마(anointed by God)이라는 정도로 온건한 뜻이라면, 나는 예수가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데, 이 경우에는 메시아와 예언자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만일 메시아라는 말이 이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 즉 톰 아리트가 주장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역사의 절정의 인물로 하느님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으로서 악과의 마지막 결정적 전투를 이끌 인물이라는 뜻이라면, 나는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의심하는데, 이것은 내가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서 핵심적인 것이라고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갖는 의심과 마찬가지이다."
(마커스 보그, <예수의 의미>, 한국기독교 연구소)
10. "예수의 뿌리 경험은 세 가지 요인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내가 이제까지 설명한 것처럼, 유대교 신비가로서의 그의 종교 체험이다. 이 체험은 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나는 그의 신성함의 체험을 그의 능력의 원천, 즉 치병자, 마귀추방자, 깨달은 자의 대안적 지혜와 교사로서의 능력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의 권위, 정치적 비판, 예언자로서의 사회적 비전의 원천이며, 그의 카리스마적인 현존의 원천으로서, 이것은 다른 것들과 결합하여 그를 중심으로 운동이 시작된 것을 설명해준다. 두번째 요인은 유대교의 전통이다. 나는 예수가 근본적으로 유대적 인물로서 이스라엘의 전통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예수가 히브리 성서(구약)를 읽을 수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즉 예수가 기록된 히브리 성서를 읽고 연구할 수 있는 '서기관적 독해력'이 있었는지 하는 문제는 오늘날 예수 연구의 논쟁적 질문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비록 예수가 서기관적 독해력을 지니지 못했다고 해도 그는 유대교의 핵심적 전통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세번째 요인은 불의(不義)에 대한 경험이다. 그는 사회정의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었다. 이런 열정은 우리 시대에 간디나 마틴 루터 킹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전형적으로 불의를 직접 체험하거나 관찰한 데서 생겨난다. 예수는 갈릴리의 가난한 마을, 즉 당시 급격한 사회적 변화가 진행되던 지역 출신일 뿐 아니라 려난 사회계급 출신이었다. 그는 주변에서 불의가 자행되는 것을 목격했을 것이며, 그 자신이 이 불의의 피해자이든 아니든 간에, 가난한 사람들과 주변부의 사람들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마커스 보그, <예수의 의미>, 한국기독교 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