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한 건 ‘상식’이었다. 그(녀)는 ‘되어’가는 삶의 긴 여정에서 자신을 비워 요구에 응하고자 했다. 나는 그(녀)의 애씀을 안다. 그런데 잠시 그(녀)의 ‘응함’이 합리적으로 융통된 자리에 날아든 비난. 그(녀)가 겨우 기대한 게 ‘상식’이었기에, 상식 밖의 비난이 조금 아팠고 그래서 침묵했다. 그게 ‘상식’일지언정 줄 수 없는 상대의 진실을 외면-기대하는 오래된 개입이 선연해졌다.
왜 기대하는 것일까? 기대한 탓에 초라해지는, 애쓴 탓에 서러워지는, 그 기이한 도착에서 어떻게 풀려날 수 있을까? 얼마나 절망해야 기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왜 ‘절망’을 깊게 겪지 못할까?
절망 속에서 상대와 나의 한계가 자명해졌던 시간을 지나왔다. 그래도 또 기대하는 의존성. 그쪽에 길이 없음을 얼마나 더 확인해야 할까,
이제 그만 서러움과 원망을 모른 체하며 상대를 지목한 손을 거두고, ‘나’라는 절망으로 영영 진입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절망해야, 기대(냉소)하지 않으면서 희망을 살필 수 있는 걸까?
일단, 절망을 겪자. 상식을 지킬 수 없는 세속의 절망을.
누군가에게 절망이었던 나를. ‘나’라는 절망을.
* * *
“‘인간만이 절망’이라고 했건만, 그 인간의 정신에 빛이 깃들 수 있는 희망을 살폈다. 현실에 터하면서도
그 현실성이 가능성과 어울리는 길목을 더듬었다. 우주와 세상의 변화 앞에서 자기 생각을 낮추며,
굳이 이해를 구하지 않고 오히려 더불어 ‘되어’가고자 애썼다.“
(<집중과 영혼>,서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