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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물론자의 다른 세상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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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나 자신을 유물론자라든지 내가 어떤 가치관과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해하는지 알려고도 고민하지도 않았다. 유물론이라는 개념 자체가 때 지난 폐기돼버린 맑시즘에 따라붙는 어휘 정도의 느낌이었다. 유물론이든 유신론이든 인간이 만든 개념일 뿐이라 생각했고 세상을 이분화시켜서 볼 수 없는 복잡하고 다원화된 현실 속에서 이런 개념들이 한계개념일 뿐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상식이 되었다. 나 자신에게 유물론자라고 스스로 칭할 수 있었던 계기는 공부를 해 가면서 세상을 개념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이 생기고 인간이란 존재를 탐색해 가는 과정 중에서 나 자신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서 인 것 같다. 또 나 뿐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 계몽주의의 혜택을 입은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유물론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기독교라는 종교에 40여 년이 되도록 몸담고 있었음에도 나는 어떤 식으로든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고 어쩌면 영혼, 정신까지도 믿지 않은 면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 오랜 시간 종교를 떠나지 않은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거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부모님과의 관계였을 것이다. 부모님을 따라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그냥 일상처럼 일요일은 교회를 가야 하는 의무이자 규율이었다. 다른 하나는 인간 예수에 대한 믿음이든 희망이든 그것이 하나의 놓을 수 없는 끈이었다. 물론 독립 이후엔 내 스스로 교회를 선택할 수 있었고 작년 1월 까진 다니다 지금은 잠시 쉬고 있다. 교회가 종교 공동체이긴 해도 꼭 신앙심이 깊진 않더라도 다닐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내가 다닌 교회는 나름 보수적이고 근본주의 신앙에서 벗어난 진보적인( 종교를 진보적이라 하기엔 무언가 모순이 느껴지지만) 곳이었기에 20년을 다닐 수 있었다. 지금은 떠나 있지만 마음은 언제나 열어놓고 다시 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내 사고의 전반은 이성과 합리로 이끌어가고 있었고 그것을 벗어났을 때 나는 많이 힘들어했고 타협하지 않는 고집들도 꽤 있었다.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어쩌면 장숙의 공부를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난 증여론이나 황금가지등의 책을 전혀 거들떠보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을 깊게 이해하고 그 원형을 알아가는 과정의 소중함을 영영 몰랐을 것이다. 인간 정신의 기이함 경이로움 그리고 가능성을 우리의 말과 글로써 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과 세상만물의 현상을 이제는 존재론적 겸허함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배웠다. 20C의 문명의 혜택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정말 많은 것들을 알아냈고 해결했으며 지금도 계속 나아가는 중이다. 그러나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한계로 인해 우리는 죽음의 문제라든지 우리의 의식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우리의 이성과 합리의 힘인 과학의 눈으로 세상을 다 이해하고 그 원리로 만물의 이치를 다 설명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며 없다고 단정 짓는 오만함과 내가 본 것이 전부라는 독선 사이에서 우린 현명한 사잇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미숙했던 나는 물(物)만을 바라봤고 그 밖에 것은 비합리로 여겨 인간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냉소했고 회의주의자가 되기도 했다. 꿈이라던가 어떤 기미라던가 종교적 체험이든 금기든 내 안에서 모든 걸 막아 놨기에 난 어떤 경험도 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타고난 기질과 성향이 있기에 받이들여야 하는 지점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 자신을 어떤 틀 안에 가둬두지는 말자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은 나 자신을 위해 열어놓고 싶다.

["...... 왜냐하면 관념론의 반대로 진술함으로써, 관념론을 '전도' 시킴으로써 관념론에서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경계심이 없이 유물론에 대해서 말해서는 안 됩니다. 말과 실제는 다릅니다. 주의 깊게 분석해보면 대부분의 유물론은 전도된 관념론들 뿐입니다."] 루이 알튀세르 -철학에 대해서- (세속의 어긋남과 어긋냄의 인문학 ) 130 P"

관념론이 신체, 생각에 중요한 지점이 있다. 유물론만 가지고 인간은 살 수 없다." 82회 속속중 K선생님.

탈 주술화를 거쳐 인간의 이성과 합리가 우리 생활 전반에 놓여있는 현실은 분명 인간이 진보해가는 역사이기도 하다. 그 혜택은 실로 큰 것이었고 우린 그것을 인정한다. 그러면서 놓친것들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들도 필요하다. 그러나 여전히 영혼을 이야기하고 NDE(임사체험)를 경험하고 사후세계를 궁금해 하는 인간존재는 여전히 특별하고 기이한 동물이다.

뇌과학을 통해 인간의식을 규명하는 노력들도 어느 정도 성취는 있지만 과학만으로 인간과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 종교가 사실상 폐기처분의 대접을 받고 기계화된 세상과 물질만능의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필요하고 (종교적이든 관념론적이든 형이상학적이든 ) 찾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고민이 든다.

한 달 전 병원에 있을 때 오빠의 추천으로⟨영적 휴머니즘. 길희성 저⟩(종교적 인간에서 영적 인간으로)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인간이 영적 존재인 한, 영적 관심은 외면할 수 없다. 영적 휴머니즘은 세속적 휴머니즘을 능가해야지 거기에 못 미치거나 그 아래에 밑돌아서는 안된다. ( 영적 휴머니즘 . 길희성저)

신도 사라지고 도덕적 가치나 의미도 사라진 세계는 현대인들에게 자율적 삶의 자유와 해방감을 선사했지만 , 신과 자연과의 유대가 사라지고 전통적인 사회적 관계나 공동체로부터 풀려나 고립된 주체로 살게 된 현대인들은 이제 인생의 무의미성이라는 새로운 복병을 만나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된 것이다. (영적 휴머나즘. 길희성저)

종교적 인간(homo religious) 을 넘어 영적 인간(spiritalis) 의 출현을 희망하는 이 책은 성육신은 2천 년 전에 유독 예수라는 한 사람에게만 일어난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인간 모두에 해당하는 보편적 의미와 진리를 가진 사건이라고 본다. 현대의 도구화된 이성, 세속화된 이성의 본래적 의미를 찾고 신과의 합일의 가능성을 통한 인간의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들을 다룬 이 책이 아직 나 자신에게는 먼 이야기지만 새로운 신관과 더불어 다른 길을 보여준다. 신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언제나 조심스럽고 위험하다. 그러나 신의 죽음을 선포함이 가져온 공도 크지만 그로 이해 놓친 것들이 현대 문명의 여러 가지 병폐를 가져온 것도 자명하다. 여전히 21세기에도 종교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라면 그 종교 속에서 어떤 희망을 보아야 할 것이다.

인류의 긴 역사 속에서 인간들은 끊임없이 존재의 이유와 의미를 물어왔고 지금도 찾아가는 중이다. 호모 사피엔스를 거쳐 호모스피리탈리스까지의 여정은 여전히 신비하고 경이롭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을 조금은 냉소했고 회의적이었지만 여전히 인간은 그 어떤 생물체가 가질 수 없는 의식을 가졌고 세계와 우주를 이야기하는 놀라운 존재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신을 이야기기 하는 것이 나약함과 도피가 아닌 참나를 찾기 위함이라면 나는 다시 신을 입에 담을 수도 있겠다는 조그마한 용기가 생겼다. 아직은 저자의 글들을 다 이해할 수도 다 받아들일 수도 없지만 언제나 종교의 테두리에서 헤매고 있던 나에게 새로운 신관을 만나고 인간을 다시 보게 되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인간의 존엄성을 외치는 현대 세속주의적인 휴머니즘의 구호가 공허하게만 들리는 까닭은 휴머니즘에 대한 믿음이 신적, 우주적 기반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영적 휴머니즘. 길희성 저)

이 책의 마지막에 4명의 영적 휴머니스트를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예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중세 가톨릭 신학자), 임제 의현 선사(선불교), 최시형 해월 신사 (천도교) 이다. 현대에 와서는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회의와 한계도 이야기하지만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영적 인간들에 대한 가능성들을 몸소 실천하신 분들이셨다. 앞서간 그분들이 있기에 우린 길이 있고 또 그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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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가온 2021.08.11 14:01
    알파고와 대결에서 패배한 이세돌은 손석희와의 인터뷰에서 자동차와 인간의 경주에서 인간이 질지라도 인간을 자동차가 가르칠 수는 없지만, 인공지능은 바둑을 인간보다 더 잘 가르칠 수 있지 않느냐하며 새로운 세기의 탄생을 알렸습니다.
    그 어조는 “~ 않습니까?”라는 투였는데 그것에는 자신의 확신을 부디 뒤집어 달라는 호소와 어쩔 수 없어졌다는 체념이 동시에 얹혀있었어요.
    닫히고 닫히고 닫힐 뿐인 시간 속에 회옥의 “돈데, 돈데, 돈데크만”의 주문은 시간의 틈을 열어 주는군요.
    “돈데,돈데, 돈데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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