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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8 23:40

行知(3) 서재

조회 수 315 추천 수 0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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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엔가 큰 아이가 엎드려 꼼짝 않고 있길래 이유를 물었다. 죽는 게 너무 무섭다는 게 아닌가. 당장은 해결할 수 없는 두려움인 것 같아서 같이 꼼짝 않고 있었다. 아이는 어느새 엄마로 만족하던 시절을 지나, 죽음을 매개로 인간의 실존에 진입하고 있는 듯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인간만의 현상이라면, ‘욕망이란 것도 그렇다. 후기 구조학자인 라캉은 욕망이 인간에게 자리매김 되는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유아기 동안 주체를 최초로 보호했던 타자는 그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주체의 삶은 그들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발전한다. 당연히 유아기의 주체는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게 되는데, 이에 따라 그들 또한 그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게 된다.  그들은 아이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고 그에 따라 삶을 꾸려나가도록 강요한다. 그들은 아이가 자신과 똑같은 언어를 말하고, 똑같은 계획표에 따라서 자신의 욕구를 통제하기를 요구한다. 그들은 주체가 무엇인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애정을 갖도록 하는 최초의 원천이다. 주체는 그 요구에 승복함으로써 그들로부터 승인과 사랑을 얻으려 한다. 그들의 요구에 더 잘 순응할수록 그는 더 많은 승인을 얻게 되고, 그들의 소망을 더 많이 충족시킬수록 그들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얻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타자의 욕망에 의거해 욕망하는 법을 배우타자의 욕망이 자신에게 향하기를 원할 뿐 아니라 타자와 같은 방식으로 욕망하기를 원한다는 설명이다.

자기이해라는 공부의 여정에서 욕망이란 말이 자주 등장했고 이 말은 늘 환기의 효과가 있었다. 자기 욕망을 인정하고 언어화하는 것. 신경증적 사회, 도덕적인 사회일수록 숨은 욕망()을 말로써 해원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간 동화(同化)해온 타자의 욕망이 무엇인지 묻고, 자신을 소외시키는 타자의 욕망과 분리. 타자의 결여와 불완전함을 요구로 바꾸지 않을 것 등은 내가 여성인 한, 더욱 꼼꼼히 거쳐야 하는 주체화 과제였다. 신경증자는 불가해한 타자의 욕망을 불안해하는데 그래서 타자의 욕망을 요구로 바꿔 응한다고 한다. 이런 식의 행동이 많을수록 에너지는 빠르게 소진되었던 것 같다. 다행히 욕망에 대한 이해가 생기며 불안으로 촉발된 행동이 줄었고, 자신과 타자의 욕망을 견디는 태도도 조금씩 생겨나는 중이다.

서재이야기를 하려던 것인데, 글이 이렇게 흘렀다.

9년 전엔가, 거실 한편에 내 책상 하나를 뒀다. 곡선 진 다리의 원목으로 된 책상인데, 책상이 있다는 것만으로 손님의 호기심을 샀고, 자못 흐뭇했다. 하지만 책이 많아지면서 비좁아진데다가 창가 쪽에 있던 탓에 웃풍이 드니 막상 책상보다는 식탁에 앉아 공부할 때가 많았다. 그렇게 책상이 막연히 방치되고 있던 차, 근자에 한 숙인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딸이 쓰던 책상을 버리기가 아까워 안방에 들여놓았다는 얘기였는데,  자신만의 공부 책상을 얻은 기쁨이 이야기를 듣는 내내 전해졌다. 그래서 나도 안방으로 책상을 옮겨보았다. 그런데 정말, 조금 아늑한 공간에 책상을 배치하니 느낌이 다르다. 비록 식구들이 수시로 들락날락하는 방이긴 해도 문이 있는 방에 책상을 두고 내 방이라고 명시하니 마치 이 집에 존재의 거처가 생긴 듯, 편안하고 안도감마저 들었다. 뿐만 아니라 외출해 있으면 방 생각에 서둘러 집에 갔으며 집에서도 괜히 문을 닫고는 멀거니 책상에 앉아 있곤 했다. 너무 쉽게 내 방이 만들어진 것도 황당하고 너무 좋아라하는 것도 당황스럽다. 이토록 좋아하는 일을, 왜 그간 한 번도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까. 환상이 욕망을 규정한다고 배웠는데 환상 말고 내 욕망을 규정하는 것들이 더 있는 것 같다

신혼집이 작았던 탓도 있지만 이사 때마다 남편은 늘 자신의 서재 방을 챙겼고 여유 공간이 생기면 아이들 방을 마련했다. 어떤 필요와 여건에 의해 순위가 정해졌겠지만 나는 또 언제 사유없이 내면화한 것일까. 가정 중심으로, 경제 활동 중심으로, 타인 중심으로 여성을 배치하는 체제의 욕망과 내 욕망을 일치시키지는 않지만, 충분히 주체화되지 못한 탓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말로써 의심없이 자신의 욕망을 규정하고, 과거의 조건과 한계, 경험 선 만큼만 꿈꾸고 아니 꿈꾸지 못한 채 쉽게 만족한다. 그래서 욕망의 대상으로 남거나, 환상을 현실로 믿거나, 욕망할 줄 모르는 채 살기도 하는 것이다. 사람은 결코 자신에게 좋은 것을 선택하지 않는단다. 그것이 해가 되더라도 좋은 것을 버려두고 익숙한 것을 선택한다는 씁쓸한 얘기다. 한 술 더 떠서 익숙한 것이 좋은 것이라는 도착도 흔한 세속!

최근에 이사하며 다시 안방에 책상을 들여놓았다. 책상이 비좁다. 서재로 쓰기에는 허점이 많은 방이지만 그래도 이곳을 어엿한 서재로 꾸며보고자 한다. 책장도 들이고 보조 책상도 하나 더 들일 계획이다. 편안히 앉아 독서할 수 있는 1인용 소파도 있으면 좋겠다. ‘정신의 장소화를 이루고 내 정신이 거처할 집을 욕망하는 이에게는, 서재가 내부의 형식일 수 있다. 내게 없던 생활양식이다. 낯설다. 그래서 더욱, 실용과 효율과 합리의 견제를 견디며 욕망의 영역에서, 스스로에게 서재를 허()하고자 한다.

낯선 일을 실행하는 부담? 어떤 부담은 깜냥과 다른 선택에 필연적으로 따라다니는 그냥 그렇고 그런 것이었다.

  

 *  브루스 핑크, <라캉과 정신의학>, 맹정현 옮김, ()민음사, 2017, 100쪽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욕망은 특정 대상에 의해 이끌리는 것이 아니다(욕망ㅡ>대상). 욕망은 대상에 의해 끌어당겨지는 것이 아니라 원인으로부터 떠밀리는 것이다(원인ㅡ>욕망). 물론 어떤 순간엔 대상이 원인을 <보유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것이 분석주체의 욕망을 자극하는 특질들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원인이 대상으로부터 갑작스럽게 떨어져 나오면, 대상은 그 즉시 폐기되어 버린다.' (브루스 핑크, <라캉과 정신의학>, 맹정현 옮김, ()민음사, 2017, 95쪽)


'타자의 '욕망에 대한 동화(同化)는 주체가 욕망을 형성하는 데 필연적인 과정이다. 하지만 이후에 그것을 깨닫게 되면 주체는 그것을 타자의 침략과 폭력으로 체험한다. 주체는 타자가 자신을 그렇게 만들었으며, 그가 자신에게 모든 것을 강요했다고 생각하고, 자기 욕망조차 자기 것이 아님을 개탄한다.' (같은 책, 102쪽)


'(...)욕망은 막연하고 분산된 원망의 과정 그 자체이다. 이에 반해 요구는 어떤 특정한 원망이다. 우리가 어떤 생물학적인 욕구를 <가지고>있다고 말할 때처럼 우리는 어떤 요구를 <가지고 >있다. 신경증자가 견디지 못하는 것은 타자의 욕망, 즉 타의 결여, 타자의 불완전함이다. 특정한 요구는 일종의 소유 양식이다. 하지만 욕망은 요구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결여와 무능력과 일정한 부적합을 암시한다. 신경증자는 그러한 욕망을 기피한다.'

(같은 책, 116쪽)


'외부는 내부의 형식'(Georg Simmel)




그림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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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우젠 2020.05.11 00:35
    아침에 양말을 찾아 신다가 교복을 입고 서둘러 양말을 찾아 신던 어떤 날이 떠올랐어요. 등교 시간은 정해져 있고, 반복적으로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색의 양말을 신은 뒤 같은 길을 같은 번호의 버스를 타고, 같은 길로, 같은 시간에, 같은 교문을 들어서야 하던 때요. 견딜 수 없는 우울감을 등에 지고 살아내는 것이 겨우 인간이란 말인가, 이런 감정들이 십대 아이들의 꽃같은 시절을 지배하고 있겠구나 짐작해요.
    욕망이 참 깨끗하게도 거세된 시절 말이지요.
    그러나 원초적인 자리에서만 맴돌다 가는 게 삶은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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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명자 2020.05.13 08:51

    예전에, 우리 나라 청소년을 연구한 논문에서 중학교 때의 우울지수가 남학생보다 여학생이 월등히 높은 것을 보았어요. 그런데 고등학생이 되니 남학생과 여학생의 우울지수는 같아졌고, 그 수치는 다른 나라보다 역시 월등히 높았답니다. '입시경쟁'을 주요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었어요.
    담헌이 공부한 석실 서원의 학규에는 '과거공부 할 사람은 다른 서원으로 가야'라는 항목이 있었지요. '입신출세'가 공부의 범위를 좁히듯이, '입시'라는 제도도 功扶의 기쁨과 실효를 축소시키고, '공부하게 되어있는 정신'을 은폐하는 건 아닌가 해요.
    (이땅의 십대들이여, 지배 받아보시라, 결코 다 지배될 수 없는 당신들의 정신을 가만히 느껴보시라!)


    한편, 藏孰의 공부의 자장이 깊고 넓어져서, 

    돕는 소식으로 그들에게 가 닿을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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