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할 수 있는가? >
未散
십여 년이 넘도록 머물렀던 장소를 떠나 몇 달 전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사를 하기 전날 밤 틈틈이 정리해 둔 짐들을 방 한쪽에 밀어놓고 더 이상 정리할 것이 없다고 마음을 놓았는데 이삿날 아침 가구를 옮기며 그 밑에 수북이 쌓인 먼지를 보았다. 가구 밑의 공간이 거의 없어 먼지가 들어갈 틈도 없을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오랜 시간 동안 조금씩 쌓이고 쌓여 방바닥에 새까맣게 달라붙은 먼지들을 보면서 이동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주변에서 지금 살고 있는 곳보다 좀 더 좋은 환경의 집이나 조건이 더 괜찮은 곳을 알려주어도 알아보는 시늉만 하다가 포기했는데, 오랫동안 한 곳에 머물렀던 이유를 물었던 한 숙인에게 나도 모르게 “귀찮아서”라는 대답을 한 적이 있었다. 이사 준비를 하면서는 가구 배치나 정리에 관한 정보를 찾아보다가 정리전문가인 한 업체 대표의 방송을 보게 되었다. 거기서 정리와 관련된 말을 듣게 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무거운 가구보다 더 옮기기 힘든 것이 생각’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유전학과 전염병을 연구하는 생물학자 빌 설리번은 우리의 생각이 왜 이렇게 쉽게 고착되고 잘 바뀌지 않는지에 대해서 생물학적 관점에서 뇌와 에너지를 연관 지어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의 뇌는 선입견으로 가득 찬 편견 덩어리다. 뇌는 심지어 우리가 진리라 생각하는 것이 실제로는 진리가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를 들이대도 무시해버릴 때가 있다. 뇌는 왜 그렇게 게으를까? 뇌가 이런 식으로 정신적 지름길을 애용하는 이유는 생각하는 데 많은 에너지가 들기 때문이다. 뇌가 소비하는 에너지는 우리 몸에서 공급하는 양의 20퍼센트까지 차지한다. 그래서 뇌는 이런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지름길을 이용한다.1)
진화 인류학적 관점에서 인간은 우연히 출현했으며, 우리의 뇌 역시 오랜 시간 진화를 통한 생물학적 산물로 완벽하지도 도덕적인 방향으로 진화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뇌에서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만들어진다. 칼 세이건은 생물의 진화과정에서 ‘모든 적응은 그만한 희생을 동반하는 거래’2)라고 언급하며 생물의 최적화된 적응이 초래하는 위험성에 대해서 경계하기도 했다.
앞서 새로운 장소를 찾아 옮기려는 노력에 대해 내가 표현했던 ‘귀찮음’이라는 단어는 ‘변화’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내적 표상-두려움이나 공포, 막막함, 부담감등-을 드러내는 말이었다. 그리고 공부를 통해 이렇듯 생활에서 새로운 길을 뚫어내지 못하는 몸이 정신의 길과도 이어짐을 알게 되었다. 고착화된 몸-‘귀찮음’이라고 발화되는 말- 최적 적응으로 향해가는 정신으로 이어지는 고리를 끊어내는 것은 분명 자연스럽거나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나에게는 절실한 문제였다.
변화는, 그러므로 공부는 심리와 초월적 타자의 사잇길 속에서 상호모방과 인정의 세속적 관계를 차근차근, 지며리 뚫어 가는 일기일경(一機一境)의 노력과 실천 속에서 가능해진다.3)
‘어리석은 사람은 이동하지 못한다.(下愚不移)’고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버릇과 기질을 조금씩 바꾸어가려는 몸의 공부, 생활의 공부를 통해 나와 내 주변을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어떤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몸이 좋은 사람’이라는 선생님의 개념에 대한 신뢰와 ‘새로운 언어와 개념을 몸에 익히며 새로운 정신의 길을 열어가는’ 장숙의 공부를 통해, 그리고 나보다 앞서서 어렵사리 자신을 바꾸어 나가며 생활양식으로서의 공부를 실천하는 동학들을 통해 변화의 가능성을 엿보기도 했다. 다른 곳으로의 이동이 새로운 풍경을 보여 주었던 것처럼, 공부를 통해 훌쩍 이동한 정신과 몸이 가져다 줄 풍경은 어떤 모습일지 아직 낯설지만 긴 호흡으로 공부의 길을 걷고자 한다.
-----------------------------------------------------------------------------------------
1) 빌 설리번,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들>, 76쪽
2) 칼 세이건·앤 드루얀, <잃어버린 조상의 그림자>, 277쪽
3) <공부론>, 1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