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양이가 나를 다르게 대한다고, 멈춰 생각했다. 소년처럼 걷는 내 기척에 파사삭 피하거나 숨던 것이 보통이었다.
<현성은 어떤 형식의 응하기>라는 것과 <개입의 윤리>를 배우며, 죽은(죽임 당한) 동물을 묻어주는 실천을 알게 되었다. 가던 길을 되돌아와 따라 했던 동학의 이야기도 들었지만 감히 해볼 엄두는 나지 않은 채 그럼에도 내 몸 어느 곳에 그 말이 자리했다. 그러다, 어쩌다 흉내를 내보게 되었지만 아직 남아있던 고양이 사체의 온기는 참담했고 다시는 못한다는 전인격적(?) 부정으로 귀결될 참이었다.
그런데 나의 四隣인 孰人. 그의 四隣인 고양이. 위험에 처한 고양이에게 마음 한 턱을 내주고 길고양이의 밥을 챙기는 이들이 있다. 고양이가 달리 보였다. ‘대책 없이 추워진 날씨에 고양이 걱정’이라던 그녀는 죽은 고양이를 조금 수월하게 옮길 수 있는 방법을 내게 알려주기도 했다. (다시는 못하겠다는 내 말은 진심이었는데!)
오랫동안 사소했던 고양이가 사소하지 않은 이유는 고양이와 살아가는 孰人 덕분이다. 그분(들)의 말에 감수성에 전염되었고 더욱 전염되어도 좋겠다. (한편에서는 무엇이 될지 모르는 경쟁심이 그분(들)을 모델로 삼았다고 생각하자, 그래야 조심할 수 있다.)
오늘도 나는 소년처럼 걸었을 뿐이데, 가만가만 굳이 멈춰 생각해보니 고양이가 나를 피하지 않았다? 고양이가 나를 모르지 않겠는가, 나를 알아보는 건가, 때이른 망상에 기대어본다.
누군가 쓰다듬었던 고양이
이번 주에 읽을 시의 한 구절이에요.
누군가의 손길이 한 번이라도 닿았던 고양이는
누군가의 손길이 한 번도 닿지 않았던 고양이로
결코 되돌아갈 수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야생 삵 새끼 같던 어느 고양이도
사람과 3년 넘게 살다보니
어느 날부턴가 나름의 억양을 가진 음성으로 의사 표현도 하고
사람이 책 읽을 때에는 조용히 해야 하는 것도 알고
언제 짐승이었던 건가 싶게 제법 인간 흉내(?)를 내고 있네요.
평소대로 걸었을 뿐인데 언제부턴가
고양이들이 형선을 피하지 않게 되었다면
형선의 눈길이 닿았던 고양이들은
형선을 이미 훤히 알고 있을 거예요.
“고양이는 다 알아요.”
차방에서, 어떤 대화중에,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온 말이었는데,
약간 어리석은 말 같아 말해놓고도 스스로도 어딘지 우스웠는데,
그럼에도 다시 한번, 고양이는 다 알고 있다고, 자꾸 말하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