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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긋냄의 이야기

 

연니자

 

이것은 그냥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세속의 어긋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긋나는 세속을 살아가는 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선생님께서 이미 <세속의 어긋남과 어긋냄의 인문학>에서 세속에 대응하는 법으로 어긋남이거나 어긋냄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셨었습니다. 인문학은 곧 어긋남에 대한 이론적 관심이며, 더불어 그 상처와 어리석음을 다루는 실천의 노동이라고, 이 노동을 일러 어긋냄이라고 이름지어주셨지요.1) 어쩌면 이것은 '어긋냄'의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우치다 타츠루는 의료라는 것도 병과 환자와 의사라는 세 주체가 참여하는 일종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병을, 환자의 나쁜 생활 습관이 가져온 귀결로 생각하는 이야기, 이와 달리 병을 에일리언 쯤으로 생각하여, 환자와 의사가 한 팀이 되어 싸우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야기, 마지막으로 병이란, 심신의 상태가 흐트러진 것에 지나지 않으니 거기에 맞추어 자신의 생활과 몸의 사용법을 바꾸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야기 즉, 병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병과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야기, 이 중 어떤 이야기를 선택할지는 개인의 자유라고 말이지요.2)

 

살아간다는 것은 다양한 형태의 불행, 상실, 사고, 질병과 만난다는 것입니다. 장애를, 예를 들어 생각해보아도장애의 원인의 90%가 후천적인 원인이었으며 질환이 55.6%, 사고가 원인인 경우가 34.4%였습니다.3) 이를 두고 어느 정도 예방 가능하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의지와 의도와 무관한 일들이 필연적으로 우리를 감싸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우리가 가진 조건인 취약함(vulnerability) 때문이겠지요. 고통과 고난은 우리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삶의 의지를 꺾고, 무력하게 만들며, 살아가는 일조차 힘겨운 짐으로 느끼게 만듭니다하이데거는 삶을 짐으로 여길 수 있는 존재는 우리 인간뿐이라고 말합니다.4)

 

동물의 경우는 자신의 생존과 종족의 번식을 추구하는 욕망인 식욕과 성욕이 본능에 의해 조절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는 본능에 의한 조절 기능이 크게 약화 된 탓에 이미 배가 부른데도 먹는 것에 탐닉하면서 과식을 할 수도 있고, 발정기에만 성욕이 발동하는 보통의 동물들에 반해 끊임없이 성욕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5) 선생님께서는 <집중과 영혼>에서 진화사의 맥락에서 인간과 동물이 분기되는 지점으로서 연기(延期)의 능력과 마침내 차분해진 집중의 힘으로 지향성 없는 의식에 이르게 된 인간이 갈 수 있는 그 너머의 가능성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물리적 현상과 다른 정신적 현상의 핵심적인 특징인 지향성을 지닌 의식이 집중과 공부의 수련을 통해 지향성조차 없는 초월적 의식, 그 너머에 이를 수 있을지 말입니다.

 

인간의 특이성은 인간이 고차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기반합니다. 동물은 사건기억이 빈약하지만, 인간의 사건기억은 일생 동안 지속됩니다. 경험이 사라지지 않고 기억으로 남는다는 현상은 놀랍고 예외적인 현상입니다. 생존에 직결되는 기억은 동물에게서도 오랫동안 유지됩니다. 그러나 인간처럼 일상 행동의 대부분을 기억에 의존하는 동물은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라는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기억은 인간 고유의 사건기억이며, 이야기의 형태가 되는 일화기억입니다. 특정한 장소에서 경험한 내용을 이야기 형태로 구성하는 일화기억은 생존에 중요한 사건에서 시작됩니다.6) 기억 관련 뇌 연구는 해마라는 뇌 영역에 집중되는데, 바로, 이 해마에서 우리 삶의 전 과정이 이야기로 만들어집니다. 서사성(narrativity)은 과거-현재-미래를 일관하는 시간 및 역사의식의 소산이며 이처럼 뇌과학적으로는 전전두엽의 기능과 관련7)되어 있습니다. 결국 인간의 일화기억은 지각으로 범주화된 대상을 출현시키고, 그 대상의 언어적 표현에서 의미가 생겨나게 됩니다. 언어의 출현으로 대상을 단어로 지칭하게 되고, 단어는 필연적으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대상의 구별 자체가 바로 대상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일화기억이 약한 동물은 감각에 구속되고, 인간은 의미에 구속됩니다.8)

 

인간은 의미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로고테라피를 창시한,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은 인생에 의미가 있다면 고통에도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9) 인간의 고통과 마찬가지로 죽음 역시 의미 있게 삶의 일부를 이루고 있고 이 둘은 인간의 현존을 무의미하게 하지 않고 무엇보다 의미심장하게 만들어 준다고 말입니다.10) 독일 속담에 불행은 홀로 오지 않는다, 어깨동무하고 온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홀로 오지 않고 어깨동무하고 오는 불행 앞에 문득, 숨조차 쉬기 힘들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고통 속에서 스스로를 아무 죄 없는 순결한 자로 상정하면 할수록 고통은 이해할 수도, 참아낼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물리적 세계에서 인과관계를 따지듯이 원인과 이유를 물을 때면, 살아갈 힘을 잃어갔습니다고통의 의미를 묻는 대신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그저 생활양식의 힘으로, 현존하고자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내면의 질문이 차오를 때, “삶이 말하게 하라(Let Your Life Speak)”라는 이해할 수 없는 문장 앞에 멈춰 서게 되었습니다인생에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기 전에, 인생이 당신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에 귀 기울이라는 낯선 말은 새로운 이야기의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닫힌 문 앞에서 닫힌 것에 저항하고 있을 때 에고의 소리가 아닌 걸어오는 말에(Zuspruch) 귀 기울여보게 된 것입니다. 


프리모 레비가 말하듯이 완벽한 행복이 실현 불가능한 것처럼, 완벽한 불행도 실현 불가능합니다. 이 양 극단의 실현에 걸림돌은 모든 영원불멸의 것들과 대립하는 우리의 인간적 조건에 기인합니다. 불행으로 의식이 파편화된 그 순간, 에고의 작란없이, 현존하기만을 바라는 텅빈 존재에게 찾아오는 경이와 새로운 인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인간을 자신의 중심으로부터 몰아내는 삶의 불안에 대해, 동물과 달리 인간에게 삶은 자신만이 책임져야 할 자기 자신만의 존재로서 주어지는 것이며, 따라서 남에게 떠맡길 수 없는 자신 만의 짐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는 인식에 대해, 예기치 않은 곳에서 고통이 선사하는 치유력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이것은 다른 문을 향하는 어긋냄의 이야기라고도 할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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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선생님, [세속의 어긋남과 어긋냄의 인문학], 글항아리. 2014. 4

2) 우치다 타츠루, [소통하는 신체], 민들레. 2019. 6

3) 최미영, [장애인의 보건·의료 실태] ,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09

https://www.kihasa.re.kr/api/external/viewer/doc.html?fn=5617:19_158_6.pdf&rs=/api/external/viewer/upload/kihasaold/forum

4) 박찬국,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21세기북스. 2018. 143

5) 박찬국, 위의 책. 147

6) 박문호, [뇌과학 공부], 김영사. 2021. 301

7) k선생님, [집중과영혼], 글항아리. 2017. 59

8) 박문호. 위의 책. 353

9) 빅터 프랭클. <그럼에도 삶에 라고 답할때>. 청아출판사. 2020. 55

10) 빅터 프랭클. 위의 책.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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