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과 ‘인식’, ‘계몽’이 다르게 작용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저자의 의도가 대략 이해가 되면 책을 다 읽은 것으로 하고 덮어버리는 제자리 걷기 독서를 겨우 끌고 가서 앉아있었는데 호네트의 ‘인정’이 인식보다 심오한 것처럼 이해되면 안 된다는 K님의 말씀과 인정의 결과가 응석받이를 만들어낼 수 있음에 대한 의견, 인정과 비평의 관계에 대한 숙인의 얘기들을 통해 부족한 이해들을 보충할 수 있었다. 다음 속속에서 나누게 될 ‘인정’과 ‘물화’ 의 독서 경험들이 기대된다. <물화>라는 이 작은 책을 들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내 ‘소외’의 시선을 의식한 순간이 있었던 것 같다. 조금 덜 빠르게 걷는 한 주를 보내야겠다.
물화 인정이론적탐구(악셀 호네트) 39p. 인간 현존재의 구조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방해해온 존재론적 "눈멂"(Verblendung/blindness)이, 실재에 대한 중립적 파악을 우선시하는 생각 때문이라고(하이데거).
-왜 물화 되어갔는가?라는 질문을 떠올릴 때면 세계와 나 사이에서 끊임 없이 팽팽이 당겨지는 중립의 지향이 얼마나 견고했는지를 깨닫습니다. 그러기에 "중립적 파악의 우선"이라는 말을 만나, 이 중립을 파괴하지 않고도 파괴시킬 수 있는 "응하기"의 세상이 어렴풋 펼쳐집니다. 인식과 인정의 관계가 서로의 되먹임 속에 얽혀든지 오래라, 어디가 먼저인지 알 수 없는 장미넝쿨 마냥 선후先後관계를 분명히 말하기 어렵듯, 아我와 사린四隣의 관계 또한 그 결부(k님)의 선후를 따지는 것이 모호해져버립니다. 이 모호성 안에서의 중립이란 얼마나 위태로우며, 얼마나 사린四隣을 물화시키는지. 결코성립될수 없는 경계(중립)위에서의 까치발 돋움. 절삭되어져버린 운신의 여지가 만들어 낸 물화의 공간. 객관을 갈구하는 어불성설의 중립을 파破하고, 그럼에도 주관 아닌 '응하기'를 가만히 응시합니다.
하람 지린 연니자 형선 양bn 현소자 토우젠 영도 박ㅇㄱ 허 ㄱ 박ㅇㅅ 김ㅂㄹ 장js
오ㅅㅇ 시란 孰人 15명이 참석합니다.